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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교구 > 왜고개 성지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1821-1846)
 
한국교회의 첫 번째 신부로서 거룩하게 순교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는 신앙과 활동력으로 빛나는 일생을 보냈고 죽음 또한 빛나고 장렬한 것이었다. 1821년 충청도 솔뫼, 구 교우 집안에서 태어난 김대건은 어려서부터 비상한 재주와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드러내 나(모방) 신부는 마침내 그를 다른 소년 두 명과 함께 신학생으로 뽑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는데 그 때는 1836년, 그의 나이 15세일 때였다.
 
그는 그곳에서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 수학 중 병사) 등 두 소년과 함께 6년간이나 신학 공부를 하였으며 현지에서 발생한 민란 때문에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역을 치르기도 했다.
 
어쨌든 신학 공부를 하던 그는 기회가 오자 귀국 길에 오르게 되어 우선 요동지방에 와서 대기 중이던 고(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입국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그는 1743년 음력 11월, 변문에 이르렀으며, 그곳에서 때마침 북경으로 가던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고국의 박해 소식을 듣는다. 그의 말인즉 국내에는 아직 박해 위험이 남아있을 뿐더러 선교사의 거처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만큼 그들의 입국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독으로라도 입국할 것을 결심하고 혼자서 국경을 넘어 의주까지 잠입했다. 김대건은 의주에서 하룻밤 묵는 동안 포졸에게 발각되어 하는 수 없이 그들을 피해 요동으로 되돌아왔으며 한편 북경으로 갔던 김 프란치스코는 국경에서 그 이듬해 김대건과 다시 만나고 주교의 입국 시기를 음력 11월로 잡고 헤어졌다. 그러는 동안 김대건은 부제품을 받았고 약속 시기에 마중 나온 김 프란치스코 일행과 같이 서울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국내 사정을 고려하여 고 주교는 동반치 않았다.
 
김 부제는 서울에 들어오자 수개월에 걸쳐 오직 주교와 외국인 선교사들을 입국시키기 위한 만반 준비를 갖추는 데 진력했고 마침내는 10여명의 사공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해 중국으로 건너가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신품을 받아 드디어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으며 그후 갖은 고난을 겪어가며 고 주교와 안(다블뤼) 신부를 배로 모시고 황해를 건너 조선 땅인 강경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고국에 돌아온 김 신부는 약 2개월 간 휴식 후 곧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기 시작했다. 김 신부가 성사를 집전한 곳은 서울과 용인 지방이었으며 당시의 교우들 증언에 따르면 김 신부는 활발한 성격에 얼굴은 고아하고 허우대가 좋았다고 한다. 그는 모친과도 상봉하여 얼마간 같이 머무를 수 있었으나 1846년 음력 4월이 되자 주교의 명에 따라 황해도 지방으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구라파로 보내는 선교사들의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선교사들의 입국하는 길을 새로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이 황해도 지방에의 항해길이 마지막 그의 순교길이 되고 말았다.
 
그는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돌아오는 도중 순위도에서 관헌에게 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곳 관에서는 중국 배들을 쫓으려고 때마침 조선 배를 징발 중이었는데 김 신부의 "양반 배를 어찌 징발할 수 있느냐"는 항의가 도화선이 되어 결국 잡히는 몸이 되었던 것이다. 김 신부는 그곳에서 해주 감영으로 이송되었으며 문초 끝에 교회 일이 드러나자 마침내 서울 좌포도청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중국 배에서 압수된 주교 편지가 "네 글씨와 다른데, 누구의 것이냐"라는 문초에 "철필과 새털로 쓴 글씨는 다르기 마련이며 철필이 있으면 이렇게 쓸 수 있다"는 말로 위기를 넘기는 기지를 보이기도 했으며 그의 넓은 견식과 당당한 태도는 대관들로 하여금 죽이기에는 국가적으로도 아깝다는 말들을 하게끔 했으나 후환을 입을 것이라는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대로 결국은 사형이 선고되고 말았다. 김 신부의 처형은 9월 16일 새남터에서 모든 것이 군문효수의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김 신부는 망나니들에게 "너희들도 천주교인이 되어 내가 있을 곳에 오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태연하게 칼을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 26세, 그의 목이 떨어지자 형장에는 큰 뇌성소리와 함께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고 전해진다. [출처 : 주교회의 홈페이지]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1814-1866년)
 
성 시메온 프랑수아 베르뇌(Simeon Francois Berneux) 주교의 한국명은 장경일(張敬一)이다. 그는 1814년 5월 14일 프랑스 르망(Le Mans) 교구의 샤토 뒤 루아르(Chaeau-du-Loir)에서 평범한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장간 일을 하던 부친의 신앙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으나, 모친은 신앙심이 깊은 부인으로서 모든 사랑을 쏟아 아들을 가르쳤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고 또 신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본당 신부가 학교에 보내어 공부하던 중, 1831년에 르망 교구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여 1837년 5월 20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어 그는 신학교에서 교수생활과 지도신부의 역할을 담당하던 중 외국 선교사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837년 7월 15일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이어서 그는 두 명의 젊은 사제와 함께 1840년 6월 26일 필리핀의 ‘마닐라’에 도착하였다. 그는 1841년 1월 16일 ‘통킹’(Ton King, 현 북베트남)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는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으나, 1843년 3월 프랑스 함대 사령관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같은 해 8월 23일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그 해 10월경에 그가 만주 주교로 물망에 오르게 되자, 그는 중국어 공부를 하면서 그 후 10여 년간 모든 열성을 다해 전교 임무를 완수하면서 현명하게 교구를 이끌어 갔다. 그러나 1849년에 요동 지역에 박해가 일어나자 상해로 피신했다가 만주로 다시 돌아왔다. 1854년 8월 5일 교황 비오 9세(Pius IX)는 그를 조선 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Ferreol, 高) 주교의 후임으로 제4대 조선 교구장에 임명함과 동시에 조선 입국을 명령하였다. 이에 그는 두 신부와 함께 두 달 동안 숨어서 조선 입국을 준비하던 중, 다행히 조선의 교우 홍봉주의 안내로 상복을 입고 미투리를 신은 후 중국을 출발하여 4일 만에 서울에 당도하였다.
 
그는 입국하자마자 상복을 입고 경기도 지방의 60여 개 공소를 돌아보았다. 1년 후인 1857년 한국 최조의 성직자 회의를 열어서 기도서의 개편과 직무를 분담하였으며, 11년 간 한국에서 선교하였던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의 부주교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이 성직자 회의의 결과로 그는 1857년 8월에 “장 주교 윤시 제우서”(張 主敎 輪示 諸友書)라는 사목 서한을 발표하면서, 그 당시 한국 교회가 내외적으로 직면했던 여러 가지 법규와 제도 등의 문제들을 규명하면서 한국 교회의 입장을 과시했다. 또한 배론에 신학생을 양성하기 위한 신학당을 세웠으며, 교회서적이나 출판물을 저술, 정리하여 대량으로 출판하였다. 그래서 교세가 날로 확장되었고 교우 수도 증가하였다.
 
1864년 국경 북쪽에 러시아 상선이 나타나서 통상을 요구하자 대원군은 베르뇌 주교에게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를 물리치겠다는 제의를 해왔다. 그러나 러시아가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이 사건이 해결되자, 대원군은 태도를 바꾸어 쇄국정책을 강행하면서 1866년 초에 병인년 대박해를 일으켜 그동안 활약했던 성직자들과 신자들 수천 명을 한꺼번에 학살하였다.
 
1866년 2월 23일 다섯 명의 포졸들이 주교 댁을 급습하여 베르뇌 주교를 체포한 후 포도청으로 끌고 갔다. 같은 달 27일 대원군과 형조 재판관들은 베르뇌 주교를 끌어내어 갖은 신문을 다하면서 발목과 무릎을 조여 주리를 틀고, 나무걸상 형틀 뒤로 두 팔을 제쳐 매어 놓고서는 큰 곤장대로 매질을 가했다. 이즈음에 도리(Dorie, 金) 신부와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 그리고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신부도 체포되어 의금부에 갇히게 되었다.
 
이윽고 1866년 3월 6일 베르뇌 주교 일행은 참수형을 선고받고, 다음날 서로 머리를 맞대고 묶인 채 감옥에서 끌려나와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향하였다. 이때 장 주교는 “우리가 한국에서 죽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고!” 하면서 기뻐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이들 얼굴에는 희색이 넘쳐흘렀다. 사형장은 한강의 새남터 강변이었는데, 이미 3천 명의 군졸들이 천막을 쳐놓고 죄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교사들이 도착하자 둘씩 무릎을 꿇게 하고 양쪽 귀를 화살로 내리 꿴 다음, 이들 얼굴에 백회를 뿌림으로써 모든 처형 준비를 다 갖추었다.
 
사형집행 선언문의 낭독이 끝나자 여섯 명의 희광이가 날뛰고 소리를 지르며 돌다가 베르뇌 주교의 목을 칼로 내리쳤다. 베르뇌 주교의 목이 두 번째로 내려친 칼날에 땅에 떨어지니, 한 병졸이 그 머리를 포도대장 앞에 갖다 보인 다음 높이 군문효수로 매달았다. 이때 순교한 선교사들의 시체는 3일 후 교우들이 와서 그곳 부근인 왜고개에 정성껏 장례를 지내고 모셨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신부(1838-1866)
 
성 시몽 마리 앙트완 쥐스트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Simon Marie Antoine Just Ranfer de Bretenieres) 신부의 세례명은 유스투스(또는 유스토)요, 한국 성은 백(白)이다. 그는 1838년 2월 28일 프랑스 디종(Dijon) 교구 관할인 샬롱쉬르손(Chalon-sur-Saone)에서 브르트니에르 남작과 안나(Anna de Montcoy)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형이 이미 8년 반 전에 사망한 터였으므로 태어나자마자 장남이 되었다. 그의 부모는 매우 신심 깊은 어른이었기에 자녀들의 신앙생활을 늘 뒷바라지하였다.
 
그러던 중 1859년에 브르트니에르는 파리(Paris)에 있는 성 쉴피스(Sulpice)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후 1861년 7월 25일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로 편입하였다. 그는 1864년 5월 21일 성품성사를 받았고, 첫 미사를 지낼 때에 순교의 특은을 기도하였다고 한다. 1864년 장상이 조선 선교를 명하자 그는 “이 나라가 바로 내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곳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 위앵(Huin, 閔) 신부, 도리(Dorie, 金) 신부 등과 함께 본국을 떠나 홍콩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조선 입국을 위해 상해, 요동 등을 거쳐 많은 고난을 겪은 끝에 충청도 내포 지방에 상륙하여 마침내 1865년 5월 27일 조선 땅을 밟았다. 그들이 서울에 있는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와 연락할 방도를 찾던 중, 마침 다블뤼(Daveluy, 安敦伊) 부주교의 집에 화재가 나서 바로 그곳 내포 지방에 피신해 있었기 때문에, 다블뤼 부주교의 안내로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베르뇌 주교를 대면한 후 정의배 회장 집에 거처를 정하였다. 그는 한국말을 배우며 베르뇌 주교를 도와서 밤을 이용하여 전교활동을 막 시작하여 80명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40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런데 1866년 2월경 뜻하지 않은 대박해가 일어났다. 2월 23일에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자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곧 지방에 있는 모든 동료 성직자들에게 이 놀라운 박해 소식을 인편을 통해 알리고, 24일에는 그도 체포될 각오를 하고 신발을 신은 채로 마지막 미사를 올렸으며, 25일에는 정의배 회장이 체포되었고, 27일에는 이선이의 고발과 안내로 브르트니에르 신부도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결박을 당하지 않은 채 순순히 포도청으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옥사장에게 “나는 조선 사람인 여러분들의 영혼을 구해주려고 나왔으므로 주님을 위해 기꺼이 죽겠소.”라고 하여 베르뇌 주교가 갇힌 의금부로 이송되었다.
 
대원군은 브르트니에르 신부에게 별로 문초나 심문을 하지 않은 채 그냥 형벌을 가하게 하였다. 3월 5일 문초에서 관리들은 그에게 “차마 죽일 수 없어 본국에 돌려보내 주려는데 어떠한가?”라고 하자 그는 “이 나라에 와서 해를 넘겼습니다. 이 나라 풍습에 익어 이곳에서 여생을 즐기려 하는데 어찌 돌아갈 마음이 있겠습니까? 생사에 구애를 받아 변심하지 않으렵니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하였다.
 
드디어 그는 베르뇌 주교와 같은 날인 1866년 3월 6일 사형선고를 받고, 이튿날 7일에 사형 집행 장소인 새남터로 향하였다. 그리고 새남터에 도착하여 귀에 화살을 꽂고, 조리 돌리는 등의 형벌을 받으면서 사형절차를 기다리는 중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심한 갈증 때문에 물을 청하니 동정심 많은 한 병졸이 물을 주려고 하였다. 그때 다른 병졸 하나가 “곧 죽여야 할 죄인에게 물을 주어서 무엇 하겠는가?” 하면서 그 물을 땅바닥에 쏟아버렸다.
 
끝으로 그는 베르뇌 주교와 마지막 대화를 나눈 다음 베르뇌 주교의 참수 광경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런 후 드디어 그의 차례가 되어 네다섯 번 내리친 칼날에 참수되어, 그가 어릴 때부터 갈망해오던 순교자들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이때가 1866년 3월 7일이고,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1840-1866년)
 
성 베르나르 루이 볼리외(Bernard Louis Beaulieu) 신부의 세례명은 베르나르두스(Bernardus, 또는 베르나르도)이고, 한국명은 서몰례(徐沒禮)이다. 그는 1840년 10월 8일 프랑스 보르도(Bordeaux) 교구의 랑공(Langon)에서 베르나르와 마리 데지레(Marie Desiree)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은 결혼 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모친은 아들을 낳자 성모님께 봉헌하였다. 그는 여섯 살 되던 해에 공민학교에 들어갔고, 일곱 살부터 복사를 하였으며, 아홉 살이 되던 1849년 10월에 고향의 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해에 그는 중국 사천(四川)에서 전교한 경험이 있는 한 선교사 신부로부터 중국의 사정을 듣고는 동양 전교에 대한 열망을 품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857년에 보르도 대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이듬해에 모친을 여읜 후 전교를 향한 그의 마음은 더욱 열렬해졌다. 그러나 그는 교회법상의 연령 미달로 사제 서품을 받지 못하였으며, 보르도 교구의 교구장인 대주교는 누구든지 교구를 떠나지 않도록 종용하고 있다가 뜻밖으로 그에게 전교를 위한 출국의 허락해 주었다. 그래서 그는 곧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1864년 5월 21일에는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같은 해 6월 15일에 조선의 전교 신부로 임명되었다. 1864년 7월 15일에 프랑스 파리(Paris)를 출발한 볼리외 신부는 도리(Dorie, 金) 신부,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신부, 위앵(Huin, 閔) 신부와 함께 1865년 5월 27일 조선의 내포 지방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미 조선에 입국하여 있던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와 조선 교우들의 환영을 받았다.
 
같은 해 6월 그는 경기도 광주 지방에 있는 뫼논리(현 경기도 성남시 운중동의 山畓里)라는 교우촌에서 본격적인 사목활동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그는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장제철이라는 교우 집에서 조선말을 열심히 공부했다. “이토록 잘 전교할 수 있는 지방에 오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라고 행복하게 말했으며, 고해성사를 들을 정도로 한국말에도 능숙해졌다. 이때 배교자인 이선이가 뫼논리에 볼리외 신부가 살고 있다고 실토하였기 때문에 그는 장제철의 집을 떠나 광주 산답리 이 요셉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 후 베르뇌 주교가 볼리외 신부의 조선말 실력과 열심함을 감안하여 충청도 지방으로 그의 임지를 정해 주려고 하던 참에, 그는 임지에 가보기도 전에 처음에 기거했던 집 주인 장제철과 이선이의 밀고로 포졸들에게 발각되어 마침내 1866년 2월 27일에 도리 신부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 다음날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에 바로 연행된 후 곧바로 심문을 받았다. 이리하여 볼리외 신부는 마침내 베르뇌 주교와 도리 신부 그리고 브르트니에르 신부 등 동료들과 함께 새남터의 형장에서 희광이의 세 번째의 칼을 맞고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이때가 1866년 3월 7일이었고,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도리 헨리코 신부(1839-1866년)
 
성 피에르 앙리 도리(Pierre Henri Dorie) 신부의 세례명은 베드로(Petrus)이고, 한국 성은 김(金)이다. 그는 1839년 9월 23일 프랑스 뤼송(Lucon) 교구 내에 있는 생 틸레르 드 탈몽(Saint Hilaire de Talmont)의 한 농가에서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염전과 농사일을 하는 가난한 부부였다. 이들 부부는 가난했으나 신심이 깊었고 또 평화스럽게 가정을 꾸며갔으므로 도리는 건전하고도 행복한 가정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곳의 보좌신부가 그에게 관심을 두어 부모의 승낙을 얻어 도리를 신학교에 입학시키려고 추천하였다. 그래서 그는 소신학교에서 8년간 수학한 후 1860년 뤼송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1862년 8월 23일에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그의 건강 상태를 알고 있던 부모나 본당신부는 이를 극구 말렸다. 그러나 그는 “어머님! 외국 선교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저에게 있어 진실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8년 동안이나 이 소명에 대하여 제 맘속에서 생각해 왔었습니다. 하느님이 저의 마음속에 말씀하셨으니, 저는 그분께 순명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여 승낙을 받고, 1864년 5월 21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6월 15일 조선의 선교 신부로 결정되었다. 그래서 그는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신부,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 위앵(Huin, 閔) 신부와 함께 1864년 7월 15일 파리(Paris)를 출발하여 마르세유(Marseille)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홍콩, 요동, 백령도를 거쳐 충청도 내포 지방에 도착하였다. 이때가 1865년 5월 27일이었다.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경기도 용인 손골(孫谷里)에서 한국말을 배우면서 그곳 교우들과 함께 지냈다. 마침 1866년 2월 병인년 대박해의 소식과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의 체포 소식을 들은 지 며칠 후 그 자신도 체포되고 말았다. 포졸들은 ‘하우고개’에 있던 볼리외 신부를 체포하고, 같은 날 산등성이 하나 너머에 있던 도리 신부를 체포해서 서울로 압송하였다. 이렇게 해서 의금부 옥에서 도리 신부는 베르뇌 주교와 다른 동료 신부들을 만났다.
 
3월 5일 문초에서 관리들이 본국에 송환하겠다고 하자 그는 “이 나라에 머무는 동안 말을 배웠으니, 죽었으면 죽었지 돌아가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결국 베르뇌 주교와 같은 날 사형선고를 받고, 역시 같은 날 베르뇌 주교와 여러 동료 신부들과 함께 사형 집행일인 3월 7일 의금부 옥에서 새남터 형장으로 끌려갔다. 목격했던 한 교우의 증언에 의하면 “도리 신부는 눈을 내리뜨고 참된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 순교자로서의 당당함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도리 신부는 이날 순교자들 중에서 맨 마지막으로 처형되었는데, 두 번째 내리치는 칼날 아래 순교의 영광을 천상 제단에 바쳤다. 그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의 시신 역시 다른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 현재 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이상 가톨릭 성인사전]
 
 
프티니콜라 신부(1828-1866년)
 
순교자 프티니콜라(Michel Alexandre Petitnicolas)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로 한국성(韓國姓)은 박(朴)이다. 1828년 8월 21일 프랑스 생 디에(Saint-Die) 교구의 코앵시(Coinches)에서 출생. 샤텔 쉬르 모젤의 소신학교를 거쳐 생 디에 교구의 대신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1850년 1월 20일, 차부제(次副祭)로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했으나 그해 10월 병 때문에 외방전교회를 나와 1852년 생 디에 교구 소속으로 사제 서품을 받고 라블린본당 보좌신부로 1년 동안 사목하였다. 그러나 1853년 6월 다시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인도, 홍콩 등지에서 포교하다가 1856년 3월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 푸르티에(Pourtie, 申) 신부와 함께 한국에 입국, 충청도지방에서 사목하였고 1862년부터는 배론신학교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로 신학교 교장 푸르티에 신부와 함께 배론에서 체포되어 이 해 3월 1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당하여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대성당으로 옮겨졌다.
 
 
푸르티에 신부(1830-1866년)
 
순교자 푸르티에(Jean Antoine Pourthie)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로 한국명은 신요안(申妖案)이다. 1830년 12월 20일 프랑스 알비(Albi) 교구의 ‘발랑스 앙 알비즈와(Valence en Albigeois) 지방에서 출생. 1854년 6월 11일 알비 교구 소속으로 사제서품을 받고 즉시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1855년 중국 귀주(貴州) 지방의 선교사로 파견되었으나 포교지가 한국으로 변경되어 1856년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와 함께 상해(上海)를 거쳐 해로(海路)로 한국에 잠입, 충청도 배론[舟論]의 성 요셉신학교 교장으로 한국인 신학생 양성을 위해 일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신학교 교수 프티니콜라 신부, 신학교 주임 장주기(張周基, 요셉)와 함께 체포되어 그해 3월 1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로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출처 : 이상 한국가톨릭대사전]
 
 
성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1845-1866)
 
성 우세영 알렉시우스(Alexius, 또는 알렉시오)는 세필이라고 불렸는데, 황해도 서홍 땅에서 대대로 선비생활을 하던 양반집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난 그는 16세가 되던 해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그는 우연히 만난 김 요한이라는 전교회장을 통해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삶의 의의와 보람을 느끼게 되어 천주교에 입교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을 외면한 채 집을 나와 몇몇 예비신자들과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찾아갔다. 그를 만나본 베르뇌 주교는 그의 학식과 신앙과 열성은 대견스러우나 아직 나이가 어리고 주위 환경이 너무 어려워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선뜻 세례를 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간청하였고, 결국 그는 정의배 마르코(Marcus) 회장의 인도를 받아 알렉시우스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즉시 집으로 돌아갔다.
 
막상 집으로 돌아와 보니 천대가 대단할 뿐 아니가 수개월 동안 계속되는 저주와 악담까지 참아 받아야만 했고, 마침내 남의 구설수에 오르기가 두렵고 부끄럽다는 이유로 그를 감금하기까지 하였지만, 그는 모든 것을 양순함과 인내로써 잘 이겨냈다. 그 후 그는 “차라리 네가 집에 없으면 죽은 것으로 여겨 위안이 될지 모른다.”는 부친의 말을 듣고, 집을 떠난 서울의 정 마르코 회장 집에 일 년 동안 머물며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집안 식구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면서 한편으로는 교리서 번역과 십이단 편찬에 전력하였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아버지도 아들이 믿는 천주교에 관심을 보였으므로, 그가 차근차근 천주교 진리를 설명해 드린 결과 온 가족들과 이웃 등 20여명이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가 있었고, 정부에 대한 고발 소동이 일어나자 하는 수없이 모든 가산을 버리고 평안도 논재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 후 1866년 정초에 알렉시우스는 정 마르코 회장을 찾아가 세배를 하였는데, 포졸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그와 정 회장을 잡아갔다. 처음 심문과 고문은 잘 참아 받았으나, 두 번째에는 위협에 못 이겨 배교하였다. 그러나 곧 참회와 식음을 전폐하는 극기를 통해 마음을 다시 굳히고 포도청으로 나아가 옥중에 있는 베르뇌 주교에게 지난 일들을 사죄받았다. 이윽고 그는 평온한 마음을 되찾고 용덕을 더욱 발휘하여 모든 고문을 잘 참아 견디었으며, 혹심한 곤장과 많은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 신앙을 용감하게 고수하여 기다리던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 이윽고 우 알렉시우스는 1866년 3월 1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고, 이때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남종삼(南鍾三) 요한(1817-1866년)
 
성 남종삼 요한(Joannes)은 충주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남상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통정대부의 중직을 맡고 있었지만, 신앙생활에 방해가 됨으로 관직을 떠나 살던 인물이다. 남 요한은 1838년인 헌종 4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홍문관 교리, 영월 현감, 영해 부사 등을 거쳐 승정원의 승지까지 지냈다. 이러한 그가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된 것은 물론 부친의 영향이 컸겠으나 무엇보다도 학자인 그 자신이 학문을 통하여 신앙을 크게 꽃피웠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그가 지은 “천주가사”를 통하여 분명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도 신앙생활을 충분히 할 수 있으며, 만일 신앙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경우 물러나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관직과 신앙생활을 겸하던 남 요한은 나라의 공식예절이 있을 때마다 조상 숭배행위에 참여해야 하였으므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한편 남 요한이 관직에서 떠날 수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가문의 생계를 꾸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세속의 관직 때문에 당시의 선교사들로부터 미움을 받았으며 성사까지 막힌 경우가 있었으나, 방인사제이신 최양업 신부와의 교분으로 그의 신앙생활은 크게 진보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영해 군수로 있을 때에 남들이 상상할 수 없는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지방의 관리가 향교의 제사에 참석치 않는다고 말썽이 생기자 그는 즉시 사표를 낼 정도로 신앙이 깊었다. 사실 그는 관료생활과 신앙생활을 병행시키는 생활을 했었다.
 
그 후 그는 생활이 궁하였으므로 또 다시 승지가 되었다. 1866년 러시아 배 한 척이 함경도 국경을 넘나드니 대원군은 북경에 와 있는 프랑스 사람들과 영국 사람들을 이용하여 러시아를 물리치고자 하였다. 이때 천주교인들에게 호의를 가진 대원군 부인 민씨가 조선에 와 있는 프랑스 선교사에게 의뢰하기 위해서 남 요한을 불러 천주교에 관해 여러 가지로 이야기를 나눈 후 장 베르뇌 주교를 대궐로 모셔다가 그분에게 이 일을 맡기자고 하였다. 남 요한이 장 주교를 찾아 나섰을 때 장 주교는 이미 서울을 떠난 후였다. 평안도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장 주교는 급히 서울로 올라왔으나, 그때는 이미 러시아인들이 물러간 후였으므로 러시아의 침략 위험은 저절로 사라진 때였다. 상황이 이렇게 급변하자 흥선 대원군은 다시 쇄국정책을 강화하고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1866년 3월 1일 남 요한이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그는 조정에 있는 세 명의 대신들로부터 문초를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하였다. 남 요한이 이를 거절하자 심한 고문과 곤장을 맞고, 천주교를 신봉한 죄목으로 참수형이 결정되었다. 그의 사형은 1866년 3월 7일 서울 서소문 밖에서 집행되어 장렬하게 순교하니,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최형(崔炯) 베드로(1814-1866년)
 
성 최형 베드로(Petrus)는 일명 최치창으로도 불렸다.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와 함께 수원으로 이사했다가 1863년에 또다시 서울 석정동으로 이사하였다. 20세 때 영세 입교한 그의 부친은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는데, 최 베드로의 동생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는 최초의 유학길에 오른 3명의 신학생중 한 명이었고, 그의 형인 최수 요한은 순교자이다. 어려서부터 한문을 잘 배워 익힌 최 베드로는 집이 넉넉지 못해 집안일을 도와 농사일이나 수공업 등의 손일을 통하여 가계를 도왔다.
 
1836년 모방(Manbant, 羅) 신부가 입국한 이래 베드로는 모방 신부의 복사로 일하였는데, 그의 재주와 신심이 크게 돋보였기 때문에 모방 신부는 자신이 순교한 1839년까지 그를 자기 옆에 있게 하였다. 1845년 유학길을 떠난 김대건 신학생이 부제가 되어 돌아오자 김 부제를 도와 조선 입국을 기다리던 페레올(Ferreol, 高) 주교와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를 모셔 들이는데 많은 힘을 썼다. 그는 사공 하나 없는 배를 타고 상해로 건너가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 부제의 서품식에도 참석하였다.
 
그 후 36세쯤에 결혼하여 서울 남쪽 교외로 내려가서 틈틈이 종교서적을 번역하고 묵주도 만들어 팔아가며 생활하였다. 1856년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입국하자 모든 교회 서적의 정리를 단행했는데, 이 일의 책임자로 최 베드로가 임명되자 그는 기꺼이 이 일을 맡아 여러 가지 어려움과 장애를 이겨 나가며 4년 동안 교회 서적을 많이 출간하였다.
 
1826년 2월 23일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자 사태가 위태롭게 전개됨을 알고 피신하였으나, 이선이라는 밀고자가 그의 집을 알려주었다. 포졸들이 그의 집에 들이닥쳤으나 그가 피신하고 없었으므로 그의 아내가 문초를 받아 피와 살이 범벅이 되고 말았지만 끝까지 남편의 거처를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 베드로의 집에 사는 14세 된 하녀가 밤중에 몰래 집을 빠져 나가는 것을 보고 포졸들이 붙잡아 곤장을 쳐서 베드로가 숨어 있는 곳을 알아내었다.
 
포졸들은 3월 1일 최 베드로를 체포하여 온 몸에 석회를 뿌리고 주먹으로 마구 친 다음 포청으로 데려갔다. 그는 천주교를 신봉했다는 죄와 사악한 책을 출판했다는 죄 그리고 다른 신자들을 선동했다는 죄 등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사형 선고문에는 “혹심한 곤장에도 굴하지 않고 쇠나 돌같이 고집이 세어 사교를 단념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였다. 또 진리를 고백하면서 사형 선고문에 직접 서명까지 하였으니 이에 국법을 따라 마땅히 사형에 처하노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최 베드로는 그의 성실한 벗 전장운 요한과 함께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때가 1866년 3월 9일이며,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이상 가톨릭 성인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