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을 해주세요.

로그인
닫기
성지 :
지명 :
내용 :
대전교구 > 여사울 성지

내포지방이란?


조선 후기 18세기 후반은, 유교적 신분질서가 서서히 붕괴되어가고, 경제적 능력만 있으면 양반 신분을 살수도 있고 과거에 합격하기만 하면 상민도 얼마든지 양반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신분변동이 심했던 사회였다. 그러나 정치의 부패와 착취는 더욱 더 심해져서 백성들은 압제(壓制)에 시달리며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고 있었다. 이러한 1770년대, 사회 개혁을 꿈꾸던 일부 남인 계통 실학자들은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여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아직 선교사가 들어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천주교 신앙은 순전히 조선 사람들의 자각에 의해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 이어 충청도 내포 지역으로 전파되어 나갔고, 그 중심에 내포 출신 이존창이 있었다.


1. 내포지역의 경제적 특성

‘내포(內浦)’란 삽교천과 무한천을 중심으로 펼쳐진 서산, 당진, 홍성, 예산, 아산, 청양 지역을 말한다. 1861년에 김정호가 완성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보면 조선후기 내포 지역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바닷물이 삽교천과 무한천을 따라 상당히 위까지 올라옴으로써 너른 평야와 함께 신례원과 합덕 아래쪽으로는 아주 너른 갯벌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로 밀물 때를 맞춰 적어도 합덕과 신례원까지는 꽤 큰배도 올라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포 지역은 금강 하구의 강경보다는 못했겠지만, 육지와 바다의 물산이 거래되면서 충청 북부의 수운(水運)과 교통의 중심지로서 많은 포구가 발달하여 경제적으로 상당히 번영했던 곳이었다. 또한 구릉지가 개발되고 간척 사업이 진행되어 경작지가 늘어나면서 전통적 양반인 사족(士族)에 맞먹는 신흥 향반(鄕班) 세력이 성장했던 지역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은 타 지역에 비해 경제적으로 발전되어 있었으며, 한양과 가까운 지리상의 이점으로 인하여 교류가 활발하다보니, 새로운 사조(思潮)를 빨리 받아들일 수 있는 기반을 형성하고 있었다.


2. 내포지역의 사상적 특성

내포 지역은 고려말 성리학 수용에 앞장섰고, 다른 지역에 비해 조선시대 성리학적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경직되지 않았으며, 조선후기에는 실학자들을 많이 배출하였고, 근대화 과정에서도 많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16세기 기호(畿湖-경기도와 충청도) 유학은 서경덕(徐敬德) 계열이었는데, 서경덕과 그의 제자인 이지함(李之函), 서기(徐起), 홍가신(洪可臣) 등은 신분을 초월하고 상공업을 중시하는 학풍을 전개하였다. 김육이 주장한 대동법 실시에 크게 기여한 포저(浦渚) 조익(趙翼)은 신양 사람이었고, 남인의 영수로서 사도세자를 변호하고 탕평책을 추진하였으며 정조 대에는 영의정까지 지내면서 신해통공(서울의 시전 상인들이 갖고 있던 상업 독점권을 폐지하여 상업의 발달을 촉진시킨 조치)을 주도하고 천주교인을 두둔하였던 채제공(蔡濟恭)은 청양 화성 사람이었다. 또한 성호 이익 계통의 실학자들도 많았으니, 이병휴, 이용휴, 이철한, 이가환, 이재위 등이 그들이다. 그 중 고덕 사람 이용휴의 아들 이가환(李家煥)은 뛰어난 국학자로서 채제공의 후계자로 지목되었으나 1801년 신유박해 때 벽파(辟派)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19세기에 활약한 추사 김정희도 내포와 연관이 깊은 인물임은 잘 알려져 있다. 이로 볼 때, 내포에서는 타 지역에 비해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시대의 변화를 주도했던 학문적 전통이 형성되어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전통은 천주교의 수용 뿐 아니라, 동학농민운동이 이 지역에서 활발하게 일어난 점과 구한말과 일제통치 하에서의 구국투쟁에서도 드러난다.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이 양인 신분으로서 성호의 제자이자 양명학자였던 이기양(李基讓)에게서 수학하다가 경기도로 가서 역시 같은 학통인 권철신 문하에 들어가 결국 천주교 신자가 되는 것도 다 이러한 내포의 사상적 특성이 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존창은 명문가 양반들과 교류하면서도 자기 재산을 나누어 천민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새로운 세상을 추구했던 ‘진취적이며 개혁적인 지식인’이었다.


3. 천주교와 내포

충청도에는 순교지와 교우(敎友)촌 등 천주교 성지(聖地)가 많은데, 특히 내포 지역에 합덕 솔뫼, 신암 여사울, 합덕 신리 공소(公所)와 구합덕 성당, 해미 순교지, 홍주 감영터, 당진 신평 성당, 아산 공세리 성당 등 관련 유적지가 집중되어 있는 연유는 이곳이 ‘한국 천주교회의 못자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천주교는 처음에 서울과 경기도를 중심으로 전파되다가, 이존창에 의해 현재의 충남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이후 이 지역은 초기 천주교 신앙의 중심지면서 동시에 가장 가혹한 박해의 피해지가 되기도 하였다.

이곳은 1839년 기해박해에서 1866년 최대최후의 병인박해까지 베르뇌, 페레올, 다블뤼, 오메트르, 위앵 등 파리외방전교회 계통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장기간 거처하면서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나중에 조선 교구 제 5대 교구장이 된 다블뤼 주교는 1845년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하여 1866년 순교하기까지 가장 오랫동안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였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한국 천주교회사와 조선 순교사의 편찬이다. 그는 1857년부터 자료를 발굴해 그것을 프랑스어로 옮겼으며 목격 증인을 찾아 증언을 수집하는 데 힘썼다. 특히 1859년을 전후해 그는 윤지충 등 주요 순교자들의 전기를 파리 본부로 보내는 한편 조선 천주교회사의 편찬을 위해 ‘조선사에 관한 비망기(備忘記)’와 ‘조선 순교사에 관한 비망기’를 저술해 1862년 모두 파리로 보냄으로써 후세의 귀중한 사료를 탄생시켰다. 1874년 샤를르 달레 신부가 편찬한 "한국 천주교회사"는 이 자료들을 정리한 것이다. [출처 : 여사울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