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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 남양 성모 성지
남양의 순교자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는 박해의 역사라고 해도 될 만큼, 교회가 창설된 이래로 100여 년 동안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년)를 비롯한 많은 박해가 있었다. 특히, 병인년 대박해 때에는 1만 명을 헤아리는 순교자가 났는데, 당시 교우의 총 수가 2만 3천여 명이었음을 감안해 볼 때 얼마나 잔학한 박해였는지를 알 수 있다. 바로 이 병인년 대박해 때 남양 도호부에도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끌려와 순교하였다.
 
남양성모성지에서는 자신의 이름 석 자조차 남기지 못하고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죽음을 선택한 순교자들, 오직 하느님의 사랑만을 받고 계시는 무명 순교자들을 특별히 기억하고 있다.
 
치명일기와 증언록을 통해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 남양의 순교자는 충청도 내포 사람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부부, 용인 덧옥돌 사람 정 필립보, 수원 걸매리 사람 김홍서 토마 네 분뿐이다.
 
그러나 이분들에 대해서도 어디 사람이고, 언제 치명하였으며, 치명 당시의 나이는 얼마였는지 등 매우 간략한 정보만이 전해지고 있다.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부부(1812-1868년)

김 필립보는 충청도 면천(沔川) 중방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들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부친의 반대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다가 훗날 그의 부친이 마음을 돌려 천주교 신앙을 이해하게 되면서 부친과 함께 교리를 배워 영세하게 되었다. 장성한 뒤 박 마리아와 혼인한 필립보는 자녀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본분을 잘 지키게 하였으며, 다른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도 열심히 노력하였다. 본래 성품이 순량한데다가 신앙생활에 철저했던 그는 이후 회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신부가 공소를 순방할 때마다 모든 준비들을 직접 하였고, 교우들이 타당하게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시키곤 하였다.
 
그러다가 필립보는 좀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가족들을 데리고 경기도 수원 걸매(현 충청남도 아산시 걸매리)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오메트르(Aumaitre, 吳) 신부에 의해 다시 회장으로 임명된 필립보는 한결같이 자신의 본분을 다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 교우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자, 필립보는 아내 마리아와 함께 자식들을 데리고 충청도 신창 남방재로 피신하여 살았다. 그러던 중 1868년에 다시 박해가 성하게 되자, 필립보는 홍주 신리(新里, 현 충청남도 합덕읍 신리)에 살던 사위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남양(南陽)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그곳으로 들이닥쳐 그를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필립보는 아내와 함께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포졸들이 온 것을 알고는 기도를 다 마친 뒤에 스스로 그들 앞으로 나가 자신이 바로 ‘그대들이 찾던 신자’임을 자백하였다. 포졸들은 필립보를 체포하자마자 매질을 하고는, 천주교 신자들과 교회 서적이 있는 곳을 대라고 다그쳤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렇게 체포되었다고 어찌 천주교를 믿지 않겠는가? 우리를 내시고 기르시며 사후에 심판하실 주님을 마땅히 힘을 다해 공경해야 한다.……책은 지난 박해(즉 병인박해) 때에 모두 불태워 버렸고, 아는 신자 하나 없이 나 혼자 얻어먹고 다니며 살았다."
 
그러자 포졸들은 필립보에게 수갑을 채운 다음 남양으로 압송하였다. 이때 그의 아내 박 마리아는 필립보와 포졸들이 말려도 듣지 않고 "남편을 따라가 함께 죽겠다"고 하면서 자원하여 따라갔다. 이들 부부는 남양 옥에 한 달 정도 갇혀 있으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신앙을 굽히지 않고 교회 일은 하나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1868년 8월 3일 부부가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들 부부는 동갑으로 57세였다.
 

정 필립보 (?-1867년)

경기도 용인의 덧옥돌에서 살았는데, 1866년 11월 남양 감영의 포졸에게 붙잡혀 가혹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다음해 1867년 1월에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김홍서 토마(1830-1868년)

수원 걸매리 사람으로 1868년 남양 감영의 포졸에게 아내와 함께 붙잡혀 남양으로 끌려왔다. 아내는 배교하여 풀려났으나, 김홍서 토마는 끝내 배교치 않고 김 필립보 부부와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배교한 아내는 김홍서 토마가 순교하자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렀다. 순교자 김홍서 토마의 나이는 38세였다.
 

부부 순교자들의 얼이 서린 곳

한국천주교회 내의 유일한 성모성지인 남양에는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가족과 친구들이 함께 걸으며 묵주기도를 바칠 수 있는 20단 야외 돌 묵주기도의 길(약 1km 정도)이 조성되어 있다. 많은 순교자들이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묵주를 손에 들고 신앙을 증거했던 순교지에서, 비록 시대는 바뀌었지만 순교자들과 같이 묵주를 손에 들고 성모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뜻 깊고 은혜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기록에 전해지고 있는 남양의 순교자 네 분 중 두 분은 같은 날, 같은 장소, 즉 남양에서 동시에 순교한 부부 순교자들이다. 기록에 의하면 김 필립보는 아내 박 마리아와 함께 충청도 내포의 사위집으로 피신해 있다가 기도 중에 붙잡혔는데, 포졸들이 김 필립보만을 붙잡아 오려는 데도 박 마리아가 "남편을 따라가 함께 죽겠다."며 자원하고 나서, 이들 부부는 한 달 정도 남양 옥에 함께 갇혀 있으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다가 1868년 8월 3일, 같은 날에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고 한다.
 
서로에 대한 굳은 신뢰심을 바탕으로 사랑하며 살다가 주님을 증거하며 죽기까지 몸과 마음이 늘 함께하기를 희망했던 남양 부부 순교자들의 이러한 믿음과 사랑은 이혼율이 급증하고 가정 파괴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까지 대두되고 있는 요즘, 신자들에게 자신들의 신앙과 가정을 되돌아보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부부가 나란히 순교한 장소를 무엇보다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성모님께 봉헌하고 성모님께 기도할 수 있는 장소로 가꾸어가고 있다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다. 남양성모성지는 이렇게 평화를 위해 그리고 우리 가정을 위해 가족들이 함께 순례하며 묵주알 위에 손을 모으고 기도할 수 있는 가정 기도의 장소이기도 하다. [출처 : 성지 홈페이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