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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 인언민 마르티노 사적지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1737-1800년)
 
<사진설명> 고문으로 걸을 수조차 없게 된 인언민을 포졸들이 말에 실어 해미로 압송하고 있다. 그림 탁희성.

 

1737년 충청도 덕산 주래(현, 충남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인언민(印彦敏) 마르티노는 온순하면서도 꿋꿋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상당한 학식도 쌓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평소에 알고 지내던 황사영 알렉시오를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이내 그에게서 교리를 배운 뒤, 한양으로 올라가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때 인 마르티노는 장남 요셉을 주 신부 곁에 남겨 두었으며, 얼마 뒤에는 차남을 유명한 교우의 딸과 혼인시켰다. 그러고 나서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집과 재산을 버리고 공주로 이주하였다. 이때 친척들이 그의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하자, 그는 이주하는 이유를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친척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797년에 시작된 정사박해가 한창 진행되던 어느 날, 인 마르티노는 공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밝히고, 천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를 원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고백한 뒤 옥으로 끌려갔다. 그런 다음 청주로 이송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감사의 명에 따라 다시 그의 고향을 관할하던 해미 관장 앞으로 이송되었다.

인 마르티노는 청주에서 받은 형벌 때문에 걸을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청주에서 해미까지 가는 동안, 조정 관리들이 이동할 때 사용하는 말을 타고 가야만 하였다.

해미에 있는 감옥에서 인 마르티노는 젊은 이보현 프란치스코를 동료로 만나게 되었다. 이후 그들은 언제나 서로를 권면하면서, 갖은 형벌과 문초와 유혹 아래서도 변함없이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어쩔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인언민도 이보현과 같이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형리들은 관례에 따라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음식을 인 마르티노에게 가져다 준 뒤, 그를 옥에서 끌어내 매질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그들 가운데 하나가 엄청나게 큰 돌을 들어 그의 가슴을 여러 번 내리쳤다. 이내 그의 턱이 떨어져 나가고 가슴뼈는 부서지고 말았다.

결국 인언민 마르티노는 이러한 형벌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때가 1800년 1월 9일(음력 1799년 12월 1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마지막으로 매질을 당하는 동안에도 그는 여러 차례 다음과 같이 되뇌었다고 한다.

“그렇구 말구.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께 바치는 거야.”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인언민 마르티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 인언민과 이보현, 김세박과 안군심
 
충남 예산 출신인 인언민 마르티노(1737-1800년)와 이보현 프란치 스코(1773-1800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세박 암브로시오(1761-1828년)와 안군심 리카르도(1774-1835년) 순교자의 삶과 순교신앙을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유순하면서도 강인한 성격을 지닌 인언민 마르티노는 충남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상당한 학식을 쌓았습니다. 그는 친분이 있던 황사영 알렉시오에게 교리를 배운 뒤, 서울에서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외교인 친지들에게도 숨김없이 고백하면서 천주교를 설명하였습니다.
 
공주에서 체포된 그는 기탄없이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청주에서 주리질, 몽둥이 찌르기, 굵은 곤장 등 가혹한 형벌을 당해 걸을 수조차 없었음에도 그의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해미로 이송된 그는 20여 명의 포졸에게서 끔찍한 매질을 당하면서도 힘 있고 분명한 목소리로 “나의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나의 진심입니다.”라고 하면서 배교를 거부하였습니다. 옥졸 하나가 커다란 돌을 들어 여러 차례 그의 가슴을 내리쳤습니다. 이내 그의 아래턱이 떨어져 나갔고, 가슴뼈들이 으스러지면서 그는 순교하였습니다. 그때가 1800년 1월 9일(음력 1799년 12월 15일),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습니다.
 
이보현 프란치스코는 충남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에서 태어났고,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습니다. 곧고 고집스럽기까지 하였던 그는 24세에 매제 황심 토마스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습니다. 그의 성실함과 훌륭한 행동은 다른 이들의 주목을 받게 하였습니다. 고행과 금욕 실천에 전념하였던 그는 황심과 함께 연산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하느님을 섬기고 자신의 영혼을 구하려면 동정으로 살든지, 아니면 순교로써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는 유일한 방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는 순교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박해가 일어나자 “오히려 천국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한 그는 포졸들에게 “나는 천주교인일 뿐만 아니라, 이틀 전부터 여러분이 나를 체포하러 오기를 기대하고 있었소.”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서적들을 내놓으라는 말에 “그것들은 만물의 군주이신 하느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에 무분별하게 관장 손에 넘길 수가 없습니다.” 하고 거부하였습니다. 그는 온갖 고문을 받았지만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신자들을 고발하라는 말에는 “도처에 스승과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고발하면 당신들은 그들을 이와 같이 다룰 것이니 나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무거운 칼을 씌워서 감옥에 가두었지만, 그는 만족해하고 기쁜 마음으로 기도하였으며, 함께 갇힌 사람들을 격려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사형터에서 그는 한 바퀴 조리돌림을 당하고 난 뒤 한도 없이 매를 맞았습니다. 그럼에도 목숨이 끊어지지 않자 형리들은 그를 바로 눕히고는 몽둥이로 불두덩을 짓찧어 죽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는 27세의 나이로 순교하였습니다. 여러 날 뒤에 교우들이 그의 유해를 거두었는데 눈부신 모습이었고, 그는 미소 짓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를 직접 본 두세 사람이 입교하였다고 합니다.
 
김범우 토마스의 먼 친척인 김세박 암브로시오는 1761년 한양의 역관 집에서 태어나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1784년)된 직후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1791년 이후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가족을 떠나 지방 교우들의 집을 전전하면서 교리를 가르치고, 교회서적을 필사하면서 살았습니다. ‘암브로시오 스승’이라고 불릴 정도로, 무지한 이들과 어린이들, 그리고 냉담 교우들을 가르치면서 그들을 덕행으로 이끄는 데 전념하였습니다.
 
그의 훌륭한 본보기는 그의 말에 더욱 효과를 더하여 주었습니다. 겨울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그는 날마다 자정에 일어나 기도하였고, 음식을 절제하여 제공되는 음식이 좋건 나쁘건 간에 자기가 정해놓은 양을 넘지 않았으며, 그것을 규칙으로 삼아 생의 마지막까지 지켰습니다. 그의 발걸음이 닿은 교우촌마다 열의가 새롭게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1827년 5월 정해박해 때 안동 관아에 가서 천주교 신자임을 밝힌 뒤 대구로 이송된 그는 감옥에서 형벌을 받으면서도 기쁨으로 다른 모든 궁핍함을 견디어냈습니다. 결국 1828년 12월 3일(음력 10월 27일) 감옥에서 68세의 나이로 순교하였습니다. 다블뤼 주교는 “많은 신자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고 그의 거룩한 생애와 영광스러운 죽음에 합당한 크나큰 존경을 오늘날까지 지니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충남 보령 출신 안군심 리카르도는 매우 밝은 표정과 솔직하고 겸손하며 친절한 성격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가 기도에 열심인 것과 주변에 대한 자선, 그리고 일주일에 세 차례 단식하면서 실천하던 고행에 사람들은 주목하였습니다. 경북 상주시 화남면 평온리에서 체포된 그는 대구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기다리다가 옥중에서 61세의 나이로 순교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은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순교에 대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덕행으로 이끄는 데 전념하였고, 그들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열의가 새롭게 생겨났다고 합니다. 성모님의 성월에 우리도 그분들의 삶을 본받으면 좋겠습니다. [여진천 신부, 경향잡지, 2010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