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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오 오언(3.22)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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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니콜라오 오언 (Nicholas Owen)
성인 기본정보
축일 3월 22일
신분 수사, 순교자
활동지역 영국(UK)
활동연도 1550?/62?-1606년

  •    성 니콜라우스 오언(Nicolaus Owen, 또는 니콜라오 오언)은 1550년경 또는 1562년경 영국 잉글랜드 옥스퍼드(Oxford)의 열심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 영국 정부는 가톨릭의 모든 종교의식을 불법화하고 가톨릭 신자들의 시민권을 박탈하는 ‘페널 법’(Penal Laws)을 시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형제 중 두 명은 사제가 되었고, 다른 한 명은 비밀리에 가톨릭 관련 인쇄물을 출판하는 인쇄공으로 일했다. 그의 아버지 월터 오웬(Walter Owen)은 목수였는데, 그래서 성 니콜라오 오언은 아버지를 도와 목수와 석공으로 일하며 나중에 은신처(Priest Hole)를 짓는데 필요한 기술을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었다. 그는 1580년에서 1581년 사이에 성 에드문도 캠피언(Edmundus Campion, 12월 1일)의 조수로 일하면서 예수회와 인연을 맺은 것 같다. 그는 성 에드문도 캠피언이 순교한 후 그의 결백을 주장하다가 1582년에 잠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1587년경 당시 영국 예수회의 책임자였던 헨리 가넷(Henry Garnet) 신부는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출판물을 인쇄하기 위해 비밀리에 출판사를 설립하면서 성 니콜라오 오언을 소개받았다. 그는 헨리 가넷 신부의 조수로 일하면서 사제와 평신도들을 위한 은신처를 고안하고 만드는 일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그는 낮에는 평범한 목수로 일하다가 밤이 되면 집안에 은신처를 만드는 일에 집중했다. 보안을 위해 늘 혼자 일했기 때문에 그가 만든 은신처의 위치나 수는 집주인과 그 외에는 알지 못했다. 그는 헨리 가넷 신부와 오랫동안 일하면서 예수회의 평수사로 입회한 듯하다. 공식적인 수련기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헨리 가젯 신부에게 개인적으로 수련받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는 1594년 4월 23일 예수회의 요한 제라드(Joannes Gerard) 신부를 돕다가 함께 체포되어 런던의 포울트리(Poultry)에 있는 작은 감옥에 갇혀 고문과 심문을 받았다. 하지만 그에게서 아무런 혐의도 찾아내지 못하고 몇몇 사제들과 단순히 아는 정도로 여겨져 부유한 가톨릭 신자가 대신 벌금을 내줘 석방될 수 있었다.

       가톨릭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1605년 ‘화약 음모 사건’(Gunpowder Plot)이 발생했다. 일단의 가톨릭 신자들이 11월 5일 의회 개원일에 맞춰 의사당 지하실에 화약을 묻어 놓아 국왕 제임스 1세(James I)를 암살하려던 계획이었는데, 사전에 발각되어 미수로 그치고 모두 처형당한 사건이었다. 그로 인해 가톨릭에 대한 정부의 탄압은 강화되었고, 특별히 예수회를 증오했던 정부는 예수회의 연루 가능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성 니콜라오 오언은 자신이 만든 은신처에 자신이 숨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1605년 11월 24일, 그는 헨리 가넷 신부와 함께 복자 에드워드 올드콘(Edward Oldcorne, 4월 7일) 신부가 있는 잉글랜드 서부 우스터셔(Worcestershire)로 은신처를 옮겼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1606년 1월 20일 한 배신자의 밀고로 군인들이 들이닥쳤고, 23일 은신처에서 나온 그와 다른 한 명은 두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들이 사제라고 말했다. 하지만 군인 중에 가톨릭 사제를 구분할 수 있는 자가 있어 수색을 계속해 27일 두 신부 역시 체포되었다.

       성 니콜라오 오언은 우스터를 거쳐 악명 높은 런던의 마셜시(Marshalsea) 감옥에 갇혔다가 런던탑으로 이송되었다. 잉글랜드 정부는 그동안 성 니콜라오 오언이 했던 일을 알고는 영국 내에 그가 만든 은신처의 위치와 개수를 알아내기 위해 온갖 잔인한 고문을 자행했다. 그러나 그는 신부들의 존재나 은신처의 위치 등 그 어떤 사실도 말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단단한 렉(Topcliffe rack)에 매달려 사지가 뒤틀리는 고문을 받아 내장이 쏟아져 나오는 등 극심한 고통을 겪은 후 숨을 거두었다. 고문 집행관은 자신의 잔혹함을 덮기 위해 그가 자살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그가 감옥에 고문 끝에 순교한 날은 1606년 3월 1일 또는 2일(일부 자료는 11월 12일로 기록하고 있다)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의 축일은 3월 22일에 기념해 왔다.

       성 니콜라오 오언은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개인적으로는 전통적으로 지내 온 3월 22일에 기념하고, 시성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기념해 왔었다.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3월 22일 목록에서 예수회 수도자인 성 니콜라오 오언이 수년 동안 사제들이 숨을 수 있는 은신처를 만들었고, 그 이유로 제임스 왕 때에 투옥되어 잔혹한 고문을 당한 후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참고자료
  • 조지프 틸렌다 저, 박병훈 편, 예수회 성인들 - 예수회 고유미사에서 기념하는 성인과 복자의 약전, 서울(도서출판 이냐시오영성연구소), 2014년, 305-3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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