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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코(12.20)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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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도미니코 (Dominic)
성인 기본정보
축일 12월 20일
신분 수도원장
활동지역 실로스(Silos)
활동연도 1000-1073년

  •    성 도미니쿠스(Dominicus, 또는 도미니코)는 피레네산맥이 에스파냐 방향으로 이어지는 나바라(Navarra) 남서쪽, 에스파냐 동북부의 라 리오하(La Rioja)에 있는 카냐스(Canas)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수도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아버지의 양 떼를 돌보며 양치기로 살았다. 일하면서 홀로 있는 시간에 기도하기를 좋아했던 그는 점점 독수 생활에 대한 매력에 이끌려서 라 리오하의 산 밀란 데 라 코골라(San Millan de la Cogolla)에 있는 베네딕토회에 입회해 수도승이 되었다. 그는 기도와 노동 그리고 금욕과 엄격한 생활을 통해 다른 수도승들의 모범이 되었고 후에 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수도 생활과 수도회의 개혁사업에 힘썼고, 그의 지도로 수도원이 점차 번창하자 팜플로나(Pamplona)의 왕인 가르시아 산체스 3세(Garcia Sanchez III)가 수도원의 토지와 재산을 탐내 강제로 징발하려고 했다. 국왕의 요구를 거부한 그는 결국 동료 수도승들과 함께 강제 추방되고 수도원도 빼앗겼다.

       성 도미니코와 그를 따르는 수도승들은 1041년 레온(Leon) 왕국의 페르난도 1세(Fernando I) 왕의 도움으로 이미 쇠퇴하여 몇몇 수도승만 남아 있던 실로스의 성 세바스티아노(Sebastianus) 수도원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이 공동체에서 원장으로 추대되었고,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 정신에 영감을 받아서 수도 생활과 수도원에 대한 쇄신과 개혁 작업을 추진해 나갔다. 생활 규칙을 재정비하고 기도와 전례 생활을 중심으로 하는 수도원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했을 뿐 아니라 에스파냐의 고대 문헌 연구에도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실로스의 성 세바스티아노 수도원은 자연스럽게 에스파냐에서 학문과 영성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 결과 수도원이 비록 한적한 곳에 있었지만, 부르고스(Burgos) 교구의 중심지로 인정받을 만큼 영적 은총이 충만했는데, 이 모두가 성 도미니코 수도원장의 높은 성덕 때문이었다고 한다. 성 도미니코와 그의 수도원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에스파냐의 왕족과 귀족들도 가문에 아기가 태어나면 성인과 그 수도원의 수도승들에게 축복받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귀족들의 후원을 받아 이슬람교도(muslim)에게 포로로 잡힌 그리스도인들을 구출하기도 했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에 성모님의 환시를 본 후 3일 뒤에 천상 잔치에 참여할 것이라고 수도자들에게 미리 예언한 대로 1073년 12월 20일 실로스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자신이 지은 수도원 성당 회랑에 묻혔는데, 그의 무덤을 찾은 많은 순례자가 기도하여 은혜를 받고 치유 받는 기적이 많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는 또한 임산부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았다. 도미니코회를 설립한 성 도미니코(8월 8일)의 어머니인 아자(Aza)의 복녀 요안나(Joanna, 8월 2일)는 실로스의 성 도미니코에게 전구하여 아들을 낳았고, 그래서 아기 이름을 도미니코로 지었다고 한다. 실로스의 성 세바스티아노 수도원은 성 도미니코의 선종 이후 실로스의 성 도미니코 수도원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이 수도원의 도서관은 역사적 가치가 높은 에스파냐의 고대 문헌 희귀본을 소장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옛 “로마 순교록”이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모두 12월 20일 목록에서 그에 대해 기록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은 포로들을 구출하기 위해 행한 기적으로 유명한 그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개정 로마 순교록은 처음에 은수 생활을 하던 그가 폐허가 된 실로스 수도원을 재건하여 수도원 규율과 지속적인 하느님 찬양의 실천을 다시 확립했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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