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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라시오(3.27) 기본정보
성인 젤라시오 (Gelasius)
성인 기본정보
축일 3월 27일
신분 대주교
활동지역 아마(Armagh)
활동연도 +1174년

  •    아일랜드 시인 디아메이드(Diarmaid)의 아들인 성 젤라시우스(또는 젤라시오, 예수의 종이라는 뜻)는 데리(Derry)의 대수도원장으로부터 16년간 교육을 받았다. 그는 성 말라키아 오모르(Malachias O'More, 11월 3일)가 은퇴한 1138년 아마의 주교로 축성되어 1174년까지 아일랜드의 수석 대주교로 봉직하였다.

       그의 긴 주교직 동안 성 젤라시우스는 노르만족의 침략 전후의 사건들과 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Hadrianus IV)가 영국의 헨리 2세(Henry II)에게 아일랜드를 기부한 진위가 의심스러운 사건 등에 직면해야 했다. 헨리 왕은 1171년에 아일랜드에 도착하였고, 교황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III)는 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가 허가한 모든 것을 확정하였다.

       성 젤라시우스는 아마의 대성당을 재건하였고 노르만족의 더블린(Dublin) 침략과 정착이 더블린 관구의 신자들에게 있어 아마보다는 캔터베리(Canterbury)에 더 의지하였던 1162년에 성 라우렌티우스 오툴(Laurentius O'Toole, 11월 14일)을 더블린의 대주교로 축성하였다. 그 해 킬데어(Kildare) 지방 클레인(Clane) 시노드에서 아마에서 교육을 받았거나 아마와 일치된 신학 교수들로 하여금 아일랜드 교회에 속한 학교들에서 가르치도록 하는 규정을 만들어 전례의 통일을 가져왔다.

       성 젤라시우스는 지칠 줄 모르는 성직자였다. 그는 아일랜드 전역을 지속적으로 방문하였으며 오래된 수도원들을 재편성하였고 시노드를 소집했다. 그는 팔리움(Pallium)을 받은 첫 아일랜드 주교로 알려져 있다. 교황 에우게니우스 3세(Eugenius III)의 재위기간 중에 파파로 추기경은 네 개의 팔리움을 1152년 켈스(Kells) 시노드에 가져와 아마, 카쉘(Cashel), 더블린, 투암(Tuam)의 대주교에게 수여하였다. 이 시노드의 기록에는 아일랜드 연감에 있는 십일조에 대하여 먼저 언급하고 있는데, 파파로 추기경이 제안했지만 참석자 아무도 지지하지 않았다. 십일조와 베드로 헌금은 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와 영국의 헨리 2세 간에 계속해서 진행된 협상의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

       성 젤라시우스는 1170년, 전년도에 아일랜드를 침략한 앵글로노르만(Anglo-Norman)족이 자리를 잡기 전에 그들을 쫓아낼 수단을 찾기 위하여 시노드를 소집하였다. 1171년 헨리 2세가 도착하여 아낌없는 향락을 베풀어 아일랜드 군중과 교회 지도자들을 대접하였고, 아일랜드 교회의 발전을 위한 계획을 제시할 카쉘 시노드의 소집을 요청하였다. 이 시노드에서는 캔터베리의 주장이나 기증에 관련된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노드 결의안 제8항에서 아일랜드 교회는 당시 가톨릭이었던 영국 교회와 성무일도 사용법을 함께 하기로 결의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의 주교는 카쉘 시노드에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코노트(Connaught)와 얼스터(Ulster)를 방문하여 그곳의 왕과 협력하여 아일랜드 방어책을 조직하려 하였다. 성 젤라시우스는 헨리 왕이 자신의 참된 의도를 위장하여 많은 아일랜드 왕자들을 속였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다음 해에 헨리 2세는 성 토마스 베케트(Thomas Becket, 12월 29일)의 살해 때문에 파문당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토마스 베케트를 성인으로 공포하자 헨리 2세는 공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게 되었다. 맨발로 성 토마스 성당까지 걷고 아일랜드 교회의 지위 향상 계획을 포함한 헨리 2세의 참회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가 아일랜드를 영국에 기부한 사실을 확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일랜드 교회는 영국 교회가 됐다. 아마의 학교는 폐교되었고, 종교 개혁 전까지 아마의 마지막 토착 주교는 1313년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