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을 해주세요.

로그인
닫기
축일 :
구분 :
이름 :
지명 :
마르가리타(11.16) 기본정보
img01
성녀 마르가리타 (Margaret)
성인 기본정보
축일 11월 16일
신분 왕비
활동지역 스코틀랜드(Scotland)
활동연도 1046-1093년

  •    성녀 마르가리타(Margarita)는 1046년 헝가리의 레스카(Reska)에서 앵글로 색슨 왕조 최후의 왕인 에드워드 애틀링(Edward Atheling)과 헝가리의 왕비 아가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헝가리의 성왕(聖王) 스테파노(Stephanus, 8월 16일)의 조카로 어린 시절 대부분을 성 스테파노 왕의 궁중에서 보냈다. 1066년 부왕이 세상을 떠나자 프랑스 노르망디의 윌리엄(William) 대공이 쳐들어왔고, 헤이스팅스(Hastings) 전투에서 패한 후 그녀의 가족들은 헝가리로 피난을 가려고 했으나 배가 표류하여 스코틀랜드에 도착했다. 이때 스코틀랜드의 왕 말콤 3세(Malcolm III)는 성녀 마르가리타 일행을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그녀의 인품과 선행에 반해 결혼을 청하였다. 이렇게 스코틀랜드의 왕비가 된 성녀 마르가리타는 여섯 명의 왕자와 두 명의 공주를 낳고 직접 훌륭하게 교육하였는데, 스코틀랜드의 성 다윗 1세(David I, 5월 24일)가 바로 그녀의 아들 중 하나이다.

       그녀의 성덕은 더욱 널리 알려졌다. 특히 기도와 고행과 단식에서 철저하였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한 애정은 놀라웠다. 그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 만연하던 성직 남용과 성직매매를 금지하려는 시노드(Synod)를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교회 개혁에도 이바지하였다. 그녀는 또한 남편인 말콤 3세와 함께 스코틀랜드의 예술과 교육의 진흥을 위해 노력했고, 던펌린(Dunfermline)에 성삼위 대수도원을 세우고 이오나(Iona)를 비롯한 여러 곳의 켈트 성당들을 복구하는 일을 후원하였다. 왕비라는 높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성녀 마르가리타는 겸손을 잃지 않았고, 가족에 대한 사랑과 특별히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성녀 마르가리타는 말콤 3세 왕과 장남 에드워드(Edward)가 노섬브리아(Northumbria)와의 안윅 전투(Battle of Alnwick)에서 사망하고 3일 뒤인 1093년 11월 16일 슬픔에 잠겨 에든버러(Edinburgh)에서 선종하였다. 그녀는 1249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Innocentius IV)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 1670-76년 재위)는 오래전부터 스코틀랜드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성녀 마르가리타를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참고자료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상) - '스코틀랜드의 성녀 마르가리타 왕후',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223-225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4권 - '마르가리타, 스코틀랜드의',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1997년, 2340쪽.
  •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스코틀랜드의 성녀 마르가리타', 서울(성바오로), 2002년, 291-292쪽.
자료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