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을 해주세요.

로그인
닫기
축일 :
구분 :
이름 :
지명 :
빌프리도(4.24) 기본정보
img01
성인 빌프리도 (Wilfrid)
성인 기본정보
축일 4월 24일
신분 주교
활동지역 요크(York)
활동연도 634년경-709년

  •    영국 노섬브리아(Northumbria)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성 빌프리도(Wilfridus, 또는 빌프리도)는 일찍이 린디스판섬(Lindisfarne Is.)의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프랑스의 리옹(Lyon)과 이탈리아의 로마(Roma)에서 수년 동안 지내며 공부했다. 그는 영국 북부 켈트족(Celts)의 전례 관습을 반대하는 로마 교회를 지지하는 견해를 지니고 귀향하여 리펀(Ripon)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664년 휘트비(Whitby) 시노드에서 부활절 날짜 계산 방법 등에서 로마 전례를 지지하는 이들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후 그는 요크의 주교로 임명되어 프랑크 왕국에서 주교품을 받고 666년 노섬브리아로 돌아왔으나 정치적 상황이 급변한 상태였다. 이미 요크의 주교로 머시아(Mercia)의 성 체아다(Ceadda, 3월 2일)가 부임했기 때문에 그는 리펀 수도원으로 돌아가 은거하며 머시아의 주교로 활동했다. 그리고 669년 캔터베리의 대주교인 성 테오도로(Theodorus, 9월 19일)가 그를 요크의 합법적인 주교라고 선언하면서 뒤늦게 주교좌에 앉을 수 있었다.

       성 빌프리도는 요크 대성당을 재건하고 여러 성당과 수도원을 건립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678년에 성 테오도로 대주교가 자기와 아무런 의논도 없이 요크 교구를 몇 개의 작은 교구로 분할했을 때 그는 자기 주교좌에서 물러나야만 했고, 이 문제에 대한 교황의 의견을 묻기 위해 로마로 향했다. 교황 성 아가토(Agatho, 1월 10일)는 그와 성 테오도도 사이의 논쟁을 화해시키고자 노력했고, 결과적으로 성 빌프리도를 복권하며 수도원을 그의 관할 하에 두되 새로운 교구도 유지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는 680년에 노섬브리아로 돌아와 자신의 복권을 명령하는 교황령을 제시했으나 오히려 왕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추방당했다. 그 후 그는 색슨(Saxon) 지방으로 피신하여 그 지방의 복음화를 위하여 헌신하였다. 다시 노섬브리아로 돌아온 그는 리펀 수도원으로 은퇴하여 수도원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다가 선종하였다.

       성 빌프리도는 당대의 위인으로 유능하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또한 정치와 교회 모두에서 큰 인물로 반대자들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는 발프리두스(Walfridus, 또는 발프리도)로도 불리는데,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12일 목록에서 그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였다. 그런데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그가 선종한 날로 여겨지는 4월 24일로 옮겨 그에 대해 전해주었다. 즉, 영국 노섬브리아의 요크에서 자신의 직위를 다른 사람에게 양위하도록 강요받으면서도 45년 동안 헌신적으로 자신의 직무를 수행한 성 빌프리도 주교가 대수도원장으로 있었던 리펀 수도원에서 평화롭게 생애를 마쳤다고 기록하였다.♣

자료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