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사적지 앨범

교구 성지명     지역명     내용 검색

인천교구 >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무명 순교자 넋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현양동산
지번주소 인천시 강화군 내가면 고천리 1486(바다의 별 청소년 수련원 내) 
도로주소 인천시 강화군 내가면 고비고개로741번길 107
전화번호 (032)932-6354
팩스번호 (032)932-6307
홈페이지 http://ilmanwe.or.kr/
관련기관 바다의 별 청소년 수련원    
관련주소 인천시 강화군 내가면 고비고개로741번길 107
성인자료실
제목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 순교자의 십자가 길12처
다음글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 순교자의 십자가 길 11처
이전글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 순교자의 십자가 길 13처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5-19 조회수754 추천수0 첨부파일수4

일만위순교자현양동산_순교자의십자가길_제12처_DSC06532.JPG

일만위순교자현양동산_순교자의십자가길_제12처_DSC06531.JPG

일만위순교자현양동산_순교자의십자가길_제12처_DSC06534.JPG

일만위순교자현양동산_순교자의십자가길_제12처_DSC06536.JPG

인천교구 한국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의 순교자의 십자가 길 모습입니다. 위로의 문을 지나면서 한국 교회사의 중요한 15가지 사건을 묵상할 수 있도록 매 처마다 순교자의 삶과 교회사의 발자취를 묵상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습니다. 2013년 3월에 찍은 사진입니다.

  

작품 해설

  

우리 순교자들이 옥에 갇혔을 때 목에 채워 곰짝하지 못하게 했던 형벌도구가 ‘칼’입니다. 설 수도 없고 누울 수도 없어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만 했습니다. 앉아 있어도 어깨를 짓누르는 그 무게로 말미암아 쉴 수도 없었습니다. 순교자들에게 그 칼을 채워 놓아도 가슴속의 주님께 대한 사랑을 채워 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분들은 소중하게 주님의 십자가를 가슴에 품으신 분들입니다. 이를 기억하며 십자가를 가슴에 품은 칼의 형상으로 병인대박해를 표현하였습니다.

   

제12처 병인교난(1866, 丙寅敎難)

  

철종이 세상을 떠난 후 1863년 12월 13일 제26대 고종(高宗)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그 때 나이 12세였다. 정치권력의 실권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고종이 즉위하던 1863년 12월, 조선에는 베르뇌(Simeon F. Berneux, 張敬一, 1814-1866) 주교 이하 8명의 성직자가 활동하고 있었으며, 교우수는 2만 3천명에 이르렀다.

  

대원군은 처음에 통상을 요구하는 러시아 배를 몰아내기 위해서 베르뇌 주교를 통해 프랑스의 힘을 빌리도록 하자는 의견에 솔깃해서 베르뇌 주교를 만나기로 했다가 러시아 배가 흐지부지 떠나버리자 마음이 돌변하여 천주교 박해의 칼을 뽑았다. 이것은 새로 득세한 풍양 조씨 일파의 종합된 의견도 있었으나 불타버린 경복궁을 복원하는데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천주교도들의 재산을 몰수해서 써 보자는 속셈도 있었다고 한다.

  

베르뇌 주교도 체포되어 극심한 문초를 받았다. 함께 선교하던 3명의 신부(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도 체포되어, 1866년 3월 8일 새남터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그 이후 남종삼, 홍봉주, 최형, 전장운 등의 신자들이 순교하였으며 국내에서 선교 중이던 또 다른 5명의 성직자(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매뜨르 신부 등)들도 모두 순교하였다.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피신한 리델 신부는 프랑스 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을 만나 도움을 청하였고, 제독은 1866년 9월 한강의 해로도 작성을 위해 1차 원정을 한 후, 10월 14일 군함 7척을 이끌고 염하를 거슬러 갑곶에 이르러 닻을 내리고 수백 명의 군대가 상륙하여 16일 강화부를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이를 일컬어 병인양요(丙寅洋擾)라 한다. 프랑스 군인들은 약탈과 만행을 저질렀고, 외규장각에 소장되었던 각종 도서들과 수많은 은괴, 도자기, 직물 등 귀중품을 약탈해갔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조선은 더욱 견고한 쇄국 정책과 척사 정신을 강화하게 되고 천주교는 더욱 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대원군은 양요 직후인 11월 21일에 천주교도들을 남김없이 색출해 내도록 전국에 명하였고, 이 박해는 6년이나 계속되었다. 이 병인년 대박해에 순교한 이들이 만여 명에 이르렀다.

  

(잠시 묵상합니다.)

(주모경을 바칩니다.)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Total 0 ]
등록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