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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 갈곡리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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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설명 박해를 피해 공동체를 이루며 옹기를 굽던 교우촌
지번주소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갈곡리 182 
도로주소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화합로466번길 25
전화번호 (031)959-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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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남북대화의 징검다리가 되고픈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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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07-11 조회수180 추천수0

[이 땅에 빛을] 남북대화의 징검다리가 되고픈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

 

 

우리 역사상 가장 큰 민족 이동은 6·25전쟁 때 일어났다. 천만 명을 헤아리는 대규모 이동이었고, 그중 상당수가 북에서 남으로 옮겼다. 지금도 남쪽에는 북한에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다. 남북대화는 피해갈 수 없는 민족 현안이다. 당시 월남하지 못한 남매가 있었다. 누나 김정숙(1903.10.18.~1950.10.17) 수녀는 황해도에, 동생 김치호(1914.3.31.~1950.10.5.) 신부는 함경도에 있었다. 동서로 나뉘어 주님을 따르던 남매는 거의 같은 시기에 공산당에게 희생되었다. 그리고 현재도 누나는 홍용호 주교와 동료 순교자로, 동생은 신상원 보니파시오와 동료 순교자로 시복과정을 밟고 있다. 그 누나의 삶을 통해 주님 메시지를 읽고자 한다.

 

 

교우촌 칠울공소의 뿌리깊은 신앙 가족

 

김정숙은 파주 칠울 공소(현 의정부 교구 갈곡리 준본당)에서 아버지 김화서 베드로와 어머니 김인순 마리아의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마지막 박해시기에 할머니 등에 업혀 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하며, 한 집안에서 한국교회 아홉 번째 신부인 김원영 신부가 나올 만큼 뿌리 깊은 구교우 집안이다. 칠울 공소는 최창무 대주교를 비롯하여 사제 · 수도자 20여 명을 배출한 교우촌이다. 김화서 슬하에서도 장남과 막내를 제외하고 다섯 명이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김명호는 신학교에서 4품까지 받고 나왔고, 다섯째 딸은 건강 때문에 치료차 집으로 보내졌다. 그 밑의 딸도 수도회에 입회했으나, 일제 말기 수녀원의 식량난으로 ‘작은 수건 수녀’들을 퇴회시킬 때 나오게 되었다. 수도자가 된 두 남매는 치명했다. 이 집안은 일찍 칠울 공소를 떠났다. 그들은 김치호가 숭공학교에 입학하는 1920년대 이미 서울 아현동에 살고 있었고, 김치호가 수도원에 입회하게 되면서 가족들은 수도원이 있는 덕원으로 이사를 했다. 그들은 초기에는 덕원 수도원 일을 도우며 수도원 내 공간에서 생활했고, 나중에는 수도원 소유 농장을 소작했다. 김정숙의 남동생 김명호는 덕원 신학교 주방장을 했다. 고향을 더난 초기에는 온 식구가 김원영 신부의 사제관에서 복사일을 하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여러 곳을 전전한 것 같다.

 

김정숙 수녀는 황해도 매화동 본당 봉삼유치원에서 1926년 9월부터 순교하는 날까지 24년간 교육사도직 활동을 했다. 김정숙 수녀는 1921년 수녀원에 입회하여 1928년 첫서원, 1934년에 종신서원을 했는데, 유치원 소임은 서원하기 전부터 시작했다. 이름이 묵주를 가리키는 매화동 마을에는 성당을 중심으로 약 30가구의 신자가 살고 있었다. 이 본당은 1896년 황해도 첫본당으로 설립되었다. 2대 주임 우도 신부는 1898년 봉삼학교를 세웠고, 2년 뒤부터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들이 파견되었다. 봉삼유치원은 1926년 4대 주임 퀴를리에 신부가 설립했는데, 설립 때부터 김정숙 수녀가 맡았다.

 

 

“수녀를 돕자”, 매화동본당 신자들의 단결

 

민족이 해방되고 북한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기승을 부렸다. 이때 매화동 본당에는 김정자, 김정숙, 강양자 수녀 셋이 해방 이후 위태로운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공산당 법령에는 ‘신앙의 자유’라는 문구가 있었다. 그러나 그 자유는 내용이 달랐다. 세상은 변했다. 해방 바로 다음 해 수녀들은 길에서, “무슨 짓을 못해서 비과학적인 종교로 사람을 미혹하게 하느냐?”, “그따위 옷은 무어냐?”고 소리치며 돌멩이를 던지고 모래를 뿌리는 아이들과 마주쳤다. 이런 세월을 3년이나 겪고 그들은 학교에서 쫓겨났다. 수도복이 혁명사업에 방해가 되니 평복으로 입으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퇴직했다. 공산당은 교회의 육영사업이나 신자들의 단체 행동을 금했다. 미사 참례를 방해하려고 주일마다 신자들을 오전 다섯 시부터 동원하여, 삼십 리 밖에 가서 땅을 파고 증명서를 받아 인민위원회에 제출토록 했다. 성당에서는 새벽 세 시에 주일 미사를 드렸다.

 

이러한 시달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신자의 품격은 어디서나 드러났다. 북한에서는 이론적으로 모든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 분배한 것으로 설정했다. 그리고 농지 값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의 현물세를 부과했다. 교회도 공산당 토지개혁으로 모든 부동산을 몰수당했고, 성당 근처의 과수원만을 신부와 수녀들의 자작농지 명목으로 인정받았다. 어느 날 느닷없이 복숭아 현물세로 소 마차 20대 분을 다음날 오후 3시까지 도착시키라는 명령이 있었다. 이를 이행하지 못하면 숙청하려는 올가미였다. 이때 성당 회장 이하 모든 단체가 나섰다. 그날이 주일이었는데, 평소 새벽 3시에 봉헌하던 미사를 더 당기고 총출동했다. 정오가 넘자 현물세 전 분량이 준비되었고, 신자들은 점심도 거르고 2시 40분에 군 인민위원회에 도착했다. 숙청 기회를 노리던 그들은 불량한 물품으로라도 흠을 잡으려고 하나하나 일일이 조사했다. 결국 그들은 “이 물건은 최상품이니까 평양에 올린다.”고 했다. 수녀들은 온갖 구실로 트집 잡는 이들을 분노하지 않게 하면서 자신들이 지켜야 할 본분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터진 뒤인 7월 17일 이여구 본당 신부가 납치됐다. 공산당이 사제관을 지역 노동당 위원장인 학교장 사택으로 쓴다며 무시로 드나드는 속에서 수녀들은 성체 훼손을 막고 성물과 교회 문서들을 보존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예수를 따른다’는 수도서원의 참혹한 실천

 

1950년 10월,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해주에 상륙했다는 소문이 들리고, 퇴각하는 공산군들이 양민을 학살하고 가옥을 방화했다. 이때 우익청년들의 멸공 시위가 일어났다. 10월 14일 밤에 숨어있던 우익청년들이 나와서 좌익을 몰아내었다. 그러나 10월 15일 공산당들이 들이닥쳤다. 새벽 5시쯤 유엔군인 줄 알고 나왔던 사람들이 모두 처참하게 당했다. 그들은 수녀들을 찾아내어 밖에 세웠다. 그리고 군중들이 달려들어 총, 칼, 낫, 도끼, 몽둥이 등으로 수녀들을 때렸다. 그들은 수녀들이 쓰러지자 버리고 갔다. 여덟 시간쯤 지나 강양자 수녀가 의식을 되찾았다. 왼팔이 으스러지고 왼쪽 다리가 창에 찔렸는데, 전신이 피에 엉겨 땅에 달라붙어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강양자 수녀는 김정숙 수녀의 치명 순간을 이렇게 전했다.

 

“신음하는 김 마리안나 수녀를 보니 너무나 참혹하여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바른팔은 아예 꺾어져 옆에 버려졌고, 뺨은 낫에 베이고 이마는 도끼에 맞아서 불쑥 솟아올랐고, 코는 삼각창에 찍혀서 구멍이 뚫렸다. 그 구멍에서 숨 쉴 때마다 검붉은 피가 솟았다가 뺨으로 흐르는 것이 마치 분수와 같았다. 주위는 소라도 한 마리 잡은 것처럼 검붉은 피가 낭자하게 엉겨 있었다. 마리안나 수녀는 꾸르륵하는 소리만 내며 괴로워했다. 기어가 머리를 흔들며 귀에 대고 큰소리로 “마리안나 수녀!” 하니까 “오” 하는 작은 소리를 내었다. 앞뒤를 돌아보니 산 사람은 하나도 없고 여기저기 시체가 가을바람에 나뭇잎 떨어지듯 흩어져 있었다. 동네 개, 돼지들이 죽은 사람에게서 흐르는 피를 핥아먹으며 돌아다녔다. … 그 뒤에도 김정숙 수녀는 계속 피를 토했다. 이틀도 넘게 계속되더니 17일 저녁 6시가 넘자 소리도 작아지고 코에서 피 대신 하얀 물이 나오더니 그것도 그치고 말았다.”

 

강양자 수녀는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지만, 김정자 · 김정숙 두 수녀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마침 도착한 문 요한나(후일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쁘로타시오 수녀)와 할머니들이 한복차림의 두 수녀 시신에 수도복을 입혔다(수녀들은 9월 25일부터 평복을 했다). 하지만 관이 없었다. 학교의 탁구대로 관을 하나 짰고, 또 하나는 동네 할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마련해 둔 것을 구해 2주일 만에 입관했다. 그러나 사람이 없어 매장을 할 수가 없었다. 그 후 유엔군이 평양에 진격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우익청년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해서 16일간이나 수녀원 마당에 방치됐던 관을 성당 옆에 묻었다.

 

김정숙 수녀의 가족은 김치호 신부의 권고로 해방 이듬해 월남하여 아현동 일대에 자리 잡았다가 이후 수원 왕림동에 정착했다. 38선을 넘나드는 사람들이 무시로 소식을 전해주었다. 김정숙 수녀보다 약 보름 앞서 치명한 김치호 신부의 부음이 전해졌을 때, 그의 부모는 밥상을 받고 있다가 둘 다 쓰러졌다. 3일 후 부친이 죽고, 그 3일 뒤 모친이 죽었다. 김정숙 수녀의 치명 소식이 이 이전에 알려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순교자가 보내는 편지

 

순교란 혼자 이루는 은총이 아닐지 모른다. 매화동 본당 수녀와 신자들 모두는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단 한번도 공산당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도우며 천주교인의 고고함, 인간다운 고고함을 잃지 않았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박해자 자신들이었다. 물론 신자들에게는 체험으로 얻은 용기가 남았다. 오늘날 북한에 교회가 아직도 살아있는 건 이러한 기억의 열매일 것이다. 북한의 체제와 교회는 별개이다. 북한 교회는 힘겹게 유지되어 왔다. 그리고 그들 신앙의 열정 덕택인지 1970년대부터 북한이 가톨릭 교회를 대하는 태도가 변하고 있다. 더욱이 1980년대부터 북한 교회 접촉을 시작한 고종옥 신부는 6·25전쟁 중 칠울 공소를 도왔고, 민족화해위원회를 만든 최창무 대주교는 칠울 공소 출신임도 의미심장하다. 당시 교회에서 일어난 일을 철저히, 자세히 돌아보고 각기 상호 무지, 오해, 상황, 이념에서 빚어진 요소들을 찾아내면서 남한과 북한은 서로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 한반도 중간지역 칠울에서 태어난 김정숙 수녀의 삶과 신앙은 남북대화의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 1950년 11월 강양자 수녀가 월남할 때, 매달리던 매화리 교우들은 “매화리 교회를 대표해서 주교님께 하루빨리 신부님을 보내 주십사고 말씀드리기 위하여 가시는 겁니다.” 하고 말하며 수녀를 놓아주었다. 그 부탁은 언제쯤 전달되는지?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9년 여름(Vol. 46), 글 · 사진제공 김정숙 소화 데레사(영남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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