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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 명동 주교좌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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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앙의 땅: 서울 성지순례길 말씀의 길 명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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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02-13 조회수795 추천수0

[신앙의 땅] 서울 성지순례길 말씀의 길 ‘명동성당’


명례방공동체에서 발전한 최초의 성당

 

 

공식적으로 천주학이 시작된 ‘명례방공동체’의 탄생지

 

명동대성당의 옛 이름인 종현(鐘峴)성당의 ‘종현(鐘峴)’은 북고개 또는 북달재의 한자 표기이다. 명동성당 앞의 고개는 원래 남현(南峴)인데, ‘종현’으로 바뀐 까닭은 선조 30년(1597) 겨울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한성에 입성하면서 명례방 일대에 진을 치고, 남대문에 달려 있던 억울한 일을 임금께 간(諫)하는 간고(諫鼓)를 명례방 남현 마루턱에 옮겨 달고 파루와 인정을 알리게 하였기 때문이다. 종현성당이 명동성당으로 바뀐 것은 1945년이다.

 

‘명동’은 ‘명례방골’에서 온 이름이며, 이 명례방골에 위치한 김범우의 집에서 태동한 명례방 공동체에서 비롯한 신앙공동체를 중시하여 명동성당이라는 이름이 지어진 것이다 . 명례방에서 천주학이 공식적으로 시작하였음을 의미하는 ‘명례방공동체’는 우리나라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 베드로를 중심으로 교리공부(강학회)가 이루어지며, 이승훈에 의하여 ‘명례방공동체’에 몸담은 김범우(토마스) 등이 세례를 받게 된다. 이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로 교회법에 어긋나는 것이어서 북경에 신부님의 파견을 의뢰하게 되었다. 

 

‘명례방공동체’는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도록 권고한 이벽의 집에서 시작하였으나, 집이 협소하고 서민들의 출입이 어려워 1784년부터 중인 역관인 김범우의 집에서 본격적인 신앙공부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1785년 봄 이승훈과 정약전·약종·약용 3형제와 권일신 부자 등 양반과 중인 신자 수십 명이 모여 이벽의 설교를 듣고 있는데, 형조의 관원이 도박장으로 의심하고 수색하여, 예수의 화상과 천주교 서적을 압수하고 형조에 바치는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중지되기에 이른다.

 

형조에서는 양반을 구속하기 어려워 중인인 김범우 (토마스)만 구금하고, 마침내 밀양으로 귀양을 보내게 된다. 김범우 토마스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이듬해인 1786년 병사함으로써 한국최초의 순교자가 된다.

 

 

한국 최초의 고딕식 성당

 

명동성당은 명례방공동체에서 발전한 최초의 성당이다. 성당건물은 중림동 약현성당보다 비록 늦게 준공되었지만, 약현성당은 명동성당(당시의 이름은 종현성당)의 공소였다가 한국의 두 번째 본당으로 발족(1891년)된 것이다. 1882년 7대 교구장 블랑 주교가 성당터를 매입하기 시작하여 1887년에 공사를 시작하였지만, 성당 아래에 조선의 어진을 모신 영희전이 있음을 핑계로 관에서 공사를 금지시켜, 1892년에 이르러서야 기공식을 갖게 된다. 여러 우여곡절을 겪느라 1898년 5월에 이르러 축성식을 할 수 있게 된다.

 

명동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고딕식 성당으로 코스트 신부님이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들이 건립하였다. 종탑은 고딕식의 특징인 첨탑을 높이 세웠고, 성당 건축 과정에서 많은 신자가 무료로 노력 봉사하였으며, 성당 건축에 쓰인 벽돌은 중국 청나라의 벽돌공을 데려다가 만들었다.

 

위에서는 라틴 십자가형 삼랑식(三廊式)의 장중한 고딕형이며, 내부는 왼쪽에 1952년 설치한 79위(位) 복자 제대(祭臺) 및 복자 상본(像本)과 예수성심상이 있다. 오른쪽엔 세례를 위한 세두대(洗頭臺) 대리석과 건축가의 주보성인 성베네딕토 상이 있다. 교구장석 강론대(講論臺)는 프와넬 박 신부의 고향에 있는 성당의 강론대를 모방한 것이라 한다. 후에 뒷면 성가대석에 한국 최초의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되었다.

 

- 중앙문인 청동 부조문(최의순 요한 비안네 작)과 무염시태 성모상.

 

 

명동성당 지하 묘역에는 순교성인 아홉 분의 유해 모셔져 있어

 

명동성당 지하에는 순교성인 아홉 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척불숭유로 세워진 조선에서 조선인들에게 서학을 믿는 이들은 금수보다 못한 존재로 여겨져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순교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타종교에 대한 이해와 화해가 아니라, 배척과 처단만이 길이라고 여겨 학살을 저지른 것이다. 죽음 앞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이들이 있었을까? 그러나 순교자들은 죽음의 두려움보다 배신의 두려움, 아니 진리의 길을 벗어나는 두려움을 안고 처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순교자들이 뿌린 피가 이 땅을 적신 덕분에 오늘의 우리는 순교의 두려움을 겪지 않고도 손쉽게 신앙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한국의 천주교도 서구처럼 평생 세 번 성당에 가고도 만족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저어한다. 성지순례를 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성지는 다만 지리적 공간에 머물 수는 없는 일이다. 성지가 신앙의 공간의 모델이요, 심적 공간으로 안착되지 않는다면, 순례는 다만 호사가의 사치이거나, 교회사를 훑어보는 계기로 타락하게 될 것이다. 성지가 ‘그때 ? 그곳’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 ? 여기’의 각자의 마음에 새겨져야 할 것이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9년 2월호, 육근웅 베다(동서울 Re.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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