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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 마원 성지(복자 박상근 마티아 묘)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칼래 신부와 순교자 박상근 마티아의 우정을 기리며
지번주소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마원리 600-1 
전화번호 (010)9944-0145
홈페이지 http://cafe.daum.net/Mawon.Jinan
관련기관 마원진안 성지 담당    
관련주소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청운로 95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신앙의 땅: 안동교구 마원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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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04-18 조회수736 추천수0

[신앙의 땅] 안동교구 마원성지


장한 믿음, 숭고한 사랑, 눈물겨운 우정

 

 

안동교구 문경지구에는 한실 교우촌, 여우목 교우촌, 마원성지와 순교자 박상근 마티아의 묘소,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사적지, 건학 교우촌 등의 성지가 있다.

 

문경지역은 충북과 경계를 이루는 경상도의 관문이면서 주흘산, 조령산, 백화산 등의 높은 산들이 있고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일찍이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에서 박해를 피해서 정착했던 교우들에 의해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한실, 문경, 여우목, 건학 등과 함께 마원은 교우들이 화전을 일구며 모여 살았던 곳으로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천주교 안동교구 두렛베미 홈페이지에는 마원성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마원성지는 문경시 문경읍 마원 1리에 있다. 이곳에서는 병인박해(1866~1873) 때 문경 출신인 박상근 마티아 등 30여 명의 신자들이 충주, 상주, 대구 등지로 압송되어 순교했다. 박상근 마티아는 문경에서 아전이었다. 그는 평소에 숙모 홍 마리아와 친척들은 물론 이웃 사람들에게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비신자 어린이들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으면 언제든지 그곳으로 달려가서 대세를 주곤 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 그와 칼레(N. Calais) 신부의 일화는 실로 눈물겹다. 칼레 신부와 눈물의 이별 뒤, 박상근 마티아는 얼마 후 숙모 홍 마리아와 친척 박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되어 상주로 끌려갔다. 그는 다른 교우들과 함께 1867년 1월(음력 1866년 12월)로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칼레 신부와 복자 박상근 마티아의 눈물겨운 우정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무수한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던 순교의 역사 속 박상근 마티아 순교자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는 중인의 신분으로 한학에 밝았던 지식인이었다. 마을 사정을 잘 알아서 백성의 애환을 관헌에 알렸고 관헌의 명을 백성에게 전했던 소통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교우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가 만약에 하느님을 믿는 신자가 아니었다면 신앙을 박해하는 자들의 편이 되어 교우를 해치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성지해설사인 이열 아오스딩 형제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잠시 동안 133년 전 시간으로 되돌아갔다. 하느님을 믿는 것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해치기도 하는 중대한 이유가 되었던 시절로 말이다.

 

문경 토박이였던 그는 박해를 피해 정착했던 교우들에 의해 입교하였고, 1866년 3월15일쯤 매형과 함께 좁쌀을 사러 한실 교우촌에 갔다. 그곳에는 프랑스인 칼레 신부(1833~1884)가 숨어 지내고 있었는데, 칼레 신부는 1861년 한국에 입국하여 1866년까지 백화산을 넘어 문경과 연풍 등을 다니면서 전교에 힘썼다. 교우촌도 인근에 알려졌기 때문에 칼레 신부가 3~4일 정도 안전하게 피신해 있을 곳이 필요했다. 발각이 되는 날에는 목숨이 달린 일이었지만, 마티아는 신부를 문경읍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모셔갔다. 피신한 지 삼일 째 되는 날 신부의 기침소리를 수상하게 여긴 이웃사람이 방문을 열었고, 서둘러 두 사람은 1064미터의 험준한 돌산인 백화산을 넘어서 다시 한실 교우촌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제 20리만 더 가면 한실이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 닿을 테고, 어느 산봉우리에서도 그 산을 알아볼 수 있을 터이니, 나는 이 길을 거뜬히 갈 거요. 자네는 너무 지쳤으니 자네가 알고 있는 이 근처 마을을 찾아 끼니를 들어요.” “신부님, 제가 어찌 초행길이신 이 산에 신부님을 홀로 두고 갈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 말씀에 결코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행여 한실에 아무도 없으면 어디로 가시려고요? 신부님께서 피신할 곳이 없을 터인데. 거듭 저는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신부님께서 가시는 곳이라면 저도 갈 겁니다. 신부님께서 이 험한 곳에서 돌아가시기라도 한다면 저는 참으로 기쁘게 신부님과 함께 죽을 겁니다.”  (중략) “사실 제 마음도 비수에 찔린 듯 아팠고, 저 또한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손을 잡고 저희 둘은 함께 울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희를 지켜보고 계셨으며, 모든 것을 당신 뜻대로 마련해 주셨습니다.”<칼레 신부의 1867년 2월 13일자 서한을 인용함.>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데다가 험한 산길을 헤매고 다니느라 허기와 피로로 지친 마티아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칼레 신부는 그에게 돌아갈 것을 단호하게 명령하였다. 두 사람은 이렇게 헤어졌다. 마티아는 관원을 피해 도망 다니다가 12월에 체포되었는데, “저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것이 나쁜 짓이라면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문경현감은 그를 살리고 싶어 하였지만 그의 믿음은 의연하였다. 순교 직전에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를 불렀다.

 

 

안동교구의 제2주보 복자 박상근 마티아

 

마원성지로 오르는 길에 가지가 아래로 휙 꺾어진 채 자란 나무에는 30세 미성인 마티아의 장한 기상이 서려 있다. 잘 다듬어진 잔디밭 위쪽 야외 제대상, 마티아의 묘소와 형구돌, 그 위 예수 부활상을 사이에 두고 한복 입은 칼레 신부와 관복을 입은 마티아가 마주 보며 손을 든 동상이 있다. “어서 내려가게나.”, “신부님, 부디 무사하십시오.” 서로에게 눈을 떼지 못한 채 결연하게 팔을 내젓는 두 사람을 예수님은 지금도 지켜보고 계신다. 성지 둘레에는 십자가의 길이 있고, 그 사이로 소나무 옆 의자에 앉으면 시간을 거슬러 사제와 평신도 사이에 오갔던 눈물겨운 우정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복자 박상근 마티아는 2014년 8월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고, 2014년 9월21일 마원성지에서 교구장 권혁주 주교 주례로 ‘순교자 박상근 마티아 시복 경축미사’를 거행했다. 안동교구의 제2주보이다. 마원성지 조성과 관리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한 문경지구 평신도들의 노고를 생각하며 성지를 내려왔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9년 4월호, 배효심 베로니카(안동 Re.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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