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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벤투라(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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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보나벤투라 (Bonaventure)
축일 7월 15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추기경, 신학자, 교회학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217?-1274년
같은이름 보나벤뚜라, 보나벤처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보나벤투라의 성 프란치스코 대전기 입문: 성 보나벤투라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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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2-13 조회수1434 추천수0

[하느님을 향한 상승의 전기문학] 보나벤투라의 성 프란치스코 대전기 입문 (2)

 

 

이번에는 바뇨레조의 성 보나벤투라의 생애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성 보나벤투라의 생애를 되짚어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에 대한 연대기는 완벽하게 확고하다. 그의 작품들에 대한 연대표 또한 완벽하지만, 그에 대한 실제 역사는 결코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었다.

 

보나벤투라의 생애는, 로마 아라첼리 특별 총회에서 작은 형제회의 일곱 번째 총장으로 선출되기 전후, 두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 a) 1217년부터 1257년까지, b) 1257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274년까지.

 

프란치스코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 보나벤투라는 아직 매우 어렸다. 그는 조반니 디 피단자라는 이름으로 1217년 투시아(오늘날의 비테르보 지방)의 바뇨레조에서 태어났다. 그의 유년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확실한 것은, 보나벤투라 스스로 프란치스코의 전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그의 치유에 관한 일화가 확인해주듯이, 어릴 적부터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작은 형제들의 바뇨레조 수도원은 1222년 세워졌다. 자끄 귀 부제롤에 따르면, 조반니는 이 수도원에 푸에르 오블라투스(Puer Oblatus : 수도 지원 아동)로 속해있었다.

 

그는 그 뒤 파리로 보내졌고, 1235년부터 1242년까지 인문학부에서 철학과 학생으로 공부하였다. 1236년 파리대학교에서 조반니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사건이 일어났다 : 헤일스의 알렉산더가 50세의 나이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기로 하였다. 이로 인해, 그와 함께 신학부의 학장직도 프란치스칸들에게 옮겨지게 되었다. 조반니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하라는 하느님의 영감을 강하게 느꼈다.

 

1243년 즈음 조반니는 프란치스칸 수도복을 입었고 보나벤투라라는 이름을 얻었다. 같은 해에 헤일스의 알렉산더와 라 로쉘의 요한 아래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고, 1245년 둘 다 세상을 떠난 후에는, 오도 리갈디와 멜리톤의 월리엄 아래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1248년 그는 성서 학사(baccelliere biblico) 학위를 취득하였고 그다음 2년 동안 성경을 가르쳤다.

 

1250년부터 1252년까지, 명제집 학사(baccelliere sentenziario) 학위를 취득하고 중세 신학의 기초를 형성했던 『피에트로 롬바르도의 명제집(Libro delle sentenze di Pietro Lombardo)』을 가르쳤다. 1252년과 1253년에는 토론과 설교에 종사하였다. 1253년 또는 1254년에는 파리에서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에서 가르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리고 1253년 말에는, 프란치스칸 학교의 총장으로 임명되었지만, 탁발 수도자들(도미니칸과 프란치스칸)에 대한 재속 사제 교수들의 반대로 인하여 대학교에서 공식적인 인가를 얻지는 못한 채, 1253년부터 1257년까지 이 총장 직함으로 가르쳤다.

 

이 시기 동안 보나벤투라는 몇몇 작품들을 집필하였다 : 『명제집 주해(Commentaria in libros Sententiarum)』(1250-1252) ; 『요한복음 주해(Commentarius in Evangelium Ioannis)』(1254-1257) ; 『그리스도의 인식에 대한 토론 문제집(Quaestiones disputatae de scientia Christi)』(1254) ; 『삼위일체 신비에 대한 토론 문제집(Quaestiones disputatae de mysterio Trinitas)』(1255); 『복음적 완덕에 대한 토론 문제집(Quaestiones disputatae de perfectione evangelica)』(1255-1256) ; 『신학요강 (Breviloquium)』(1257). 이 작품들을 통하여 보나벤투라의 사상은 뿌리내리고 이후 그의 후기 작품들 안에서 성숙에 이르게 된다.

 

1257년 2월 2일 보나벤투라는 수도회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17년의 재임 기간 동안 많은 업무를 수행하였다 : 그는 관구들을 방문하였고, 각 관구회의를 주재하였으며, 형제들에게 알리고, 무절제함을 없애기 위해 엄정함으로 자주 개입하였다. 또한, 그는 통치 활동에 있어 신학적 원칙과 뛰어난 분별력을 부여하였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특별히, 수도회의 일치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은 『성 프란치스코 대전기(Legenda maior Sancti Francisci)』(1262)와 『소전기(Legenda minor)』(1262)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 때문에 보나벤투라는 수도회의 두 번째 창립자로까지 평가받는다.

 

보나벤투라는 총장으로서 일하면서, 자신의 영성을 심화시키는 데 있어 소홀히 하지 않았다. 총장 선출 이후 쓰인, 그의 주요 작품들은 보다 더 깊게 수도회의 본성에 다가선 것들이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정신의 여정』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보나벤투라는 이 관상적이고 신비적인 작품을 1259년, 프란치스코가 오상을 받은, 라 베르나에서 집필하였다.

 

1273년 보나벤투라의 삶은 또 다른 변화를 맞이한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그를 주교로 축성하고 추기경으로 임명코자 하였다. 1274년 5월 19일 그는 총장직에서 물러났고 훗날 교황 니콜라오 4세가 되는, 아스콜리의 지롤라모가 그의 후임자가 되었다. 그 후 2차 리옹 공의회의 폐막을 이틀 앞둔 7월 15일 리옹에서 선종하였다.

 

한 익명의 교황청 공증인은, 우리에게 이 위대한 성인이요 탁월한 신학자에 대한 결정적인 인물상을 전해주는, 보나벤투라에게 바치는 헌사를 작성하였다 : “선하고, 다정했으며, 경건하고 자비로웠던 사람, 덕이 충만하고,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던 사람 (…)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

 

1482년 4월 14일 보나벤투라는, 꼰벤뚜알 형제들(Conventuali)과 엄수주의 형제들(Osservanti)의 일치를 바라던, 프란치스칸 교황 시스토 4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그 뒤 1588년 5월 14일 또 다른 프란치스칸 교황, 시스토 5세에 의해 교회 박사로 선포되었다.

 

[성모기사, 2018년 2월호, 한규희 보나벤투라(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신부, 관구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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