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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유스토(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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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백 유스토(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白 Ranfer de Bretenieres Justus)
축일 9월 2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38-1866년
같은이름 브르뜨니에르, 유스또, 유스뚜스, 유스투스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103위 성인 약전: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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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12-18 조회수103 추천수0

[103위 성인 약전] 성 랑페르 백신부


첫미사 집전 때 순교의 특은 빌어

 

 

聖 유스뜨 마리아 백 신부는 1838년 2월 28일 프랑스 샬롱-쉴-스완느(Chalon-Sur-saone)에서 한 귀족인 남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착실한 신앙을 간직할 수 있도록 부모 밑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신앙인으로서 당당한 기품이 있었다 한다. 

 

그리고 그는 1859년에 파리에 있는 聖 슐삐스 신학교에 입학하여 열심히 학업을 닦던 중 어린시절부터 갈망해오던 외국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1861년 9월에 부모의 승낙을 얻어 빠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로 옮겼다. 그의 동료 한 사람은 「유스뜨 마리아의 마음은 참으로 비범하였으므로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순교의 특은을 허락하시지 않더라도 그는 언젠가는 꼭 성인품에 오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1864년 5월에 신품성사를 받았고 첫미사를 지낼 때 순교의 특은을 빌었다.

 

1864년 6월 13일 자신이 어느 선교지로 가게 되는 지를 알기 위해 장상을 찾아갔을 때 한국이 자신의 전교지가 될 것이라는 것을 듣고 「이 나라가 바로 내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곳이었다」고 말하였다. 이틀 후 15일에 그는 서 볼리외 신부, 민 위앵 신부, 김 도리 신부 등과 함께 본국을 떠나 홍콩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한국에 입국할 수 있는 적당한 기회가 올 때까지 만주지방 베롤 주교 댁에서 대기하다가 다시 1864년 10월 28일에 만주해안 「내호」 하류에 머물며 한국에서 올 배를 6개월간이나 기다렸다. 이때 이들 젊은 선교사들은 중국 뱃사공들한테 한문공부를 열심히 배웠다. 1865년 5월 2일 이 뱃사공들이 마침 백령도로 가게 되어 이들도 백령도에 가서 20일간 머물다가 장 주교께서 보낸 배가 관리들에게 발각되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다른 범선을 얻어타고 많은 고난을 겪은 끝에 충청도 내포지방 부근에 상륙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침내 1865년 5월 27일에 한국땅을 밟았다. 그들이 서울로 장 주교와 연락할 방도를 찾던 중 마침 당시 안 다블뤼 부주교께서 집에 화재가 나서 바로 이곳 내포지방에 피신해 있었기 때문에 안 부주교의 안내로 백 신부는 장 주교를 대면한 후에 정의배(마르코) 회장집에 거처를 정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한국말을 배우며 밤을 이용하여 장 주교를 도우며 전교활동을 막 시작하던 무렵, 1866년 2월경에 뜻하지 않았던 대박해가 일어났다. 2월 23일에 장 주교께서 체포되었다. 이에 백 신부는 곧 지방에 있는 모든 동료 성직자들에게 이 놀라운 박해 소식을 인편을 통해 알리고 24일에는 그도 체포될 각오를 하면서 열심으로 신발을 신은 채로 마지막 미사를 올렸다. 25일에는 정의배 회장이 체포되었고 27일에 바로 이선이의 고발과 안내로 백 신부도 체포되고 말았다. 그가 거처하는 방에 갑자기 포졸들이 들이 닥치자 그는 「나는 당신들이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오」라고 태연히 말하면서 장 주교께서 체포될 때 제의를 입었다는 것을 말하고 자신도 제의를 입고 가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결박을 당하지 않은 채 순순히 포도청으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옥사장들에게 「나는 한국사람인 여러분들의 영혼을 구해주려고 나왔으므로 주님을 위해 기꺼이 죽겠오」라고 하면서 장 주교가 갇힌 의금부로 이송되었다.

 

대원군은 말이 잘 통하지 않았으므로 백 신부에게는 별로 문초나 심문을 하지 않은 채로 그냥 형벌을 가하게 하였다. 백 신부는 신음소리 한번도 내지 않고 조용하게 모든 형벌을 잘 참아 견디어 냈다. 3월 5일 문초에서 관리들은 백 신부에게 「차마 죽일 수 없어 본국에 돌려보내 주려는데 어떠한가?」라고 하자 백 신부는 「이 나라에 와서 해를 넘겼습니다. 이 나라 풍습에 익어 이곳에서 여생을 즐기려 하는데 어찌 돌아갈 마음이 있겠읍니까? 생사에 구애를 받아 변심하지 않으렵니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하였다. 드디어 그는 장 주교와 같은 날 1866년 3월 6일에 사형선고를 받고 이튿날 7일에 사형집행 장소인 새남터로 향하였다.

 

죽음을 앞두고 사형장으로 가는 이들 성직자들의 얼굴에 기쁨이 넘쳤기 때문에 경비병들이 놀라워하며 「죽으러 가는 사람들이 저렇게 태평스러울 수 가 있을까?」하며 경탄하였다고 한다.

 

드디어 새남터에 도착하자 사형수들에게 내리는 여러가지 형벌인 귀에 화살을 꽂고 조리돌리는 등의 형벌을 받으면서 사형절차를 기다리는 중에 백 신부가 심한 갈증 때문에 물을 청하자 동정심 많은 한 졸병이 물을 가지고 죄수에게 주려고 하자 다른 병졸 하나가 「곧 죽여야 할 죄인에게 물을 주어서 무엇하겠는가?」 하면서 그 물을 땅바닥에 쏟아버렸던 것이다.

 

그때 백 신부는 자신의 머리 위에 있었던 밧줄을 물어 씹었다는 것이다. 이때 이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한 구경꾼이 「당신의 이 상태를 후회하는 거냐」고 묻자 백 신부는 「당신도 신앙을 가지시오. 나는 이 좋은 것을 끝까지 사수할 것이오」라고 세 번씩이나 반복하여 말하였다 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장 주교와 몇 마디 프랑스말로 마지막 대화를 나누자 장 주교께서 웃으며 대답하였는데 이때 형리들이 「죽는 놈들이 무엇이 좋아서 웃느냐?」 하자 그들은 「좋고말고」라고 답하였다. 이때 사형장에는 3천 명의 군중이 대기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 다음 백 신부는 장 주교의 참수 광경을 끝까지 지켜보고 난 후에 드디어 그의 차례가 되어 너댓번 내리친 칼날에 참수되어 그가 어릴 때부터 갈망해 오던 순교자의 대열에 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는 1866년 3월 7일이며 그의 나이 28세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의 못다한 선교사의 역할과 사명을 그가 흘린 순교의 피로써 다하였고 그 피는 바로 이 땅의 신앙의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 이들 서양 선교사들의 머리는 군문효시되어 사흘동안 장대에 매달려 사람들에게 현시되었다가 박순집(베드로)과 여러 신자들이 이들 성직자들과 교우들의 시신을 찾아 와고개(瓦署峴)에 안장하였던 것이다.

 

[가톨릭신문, 1985년 3월 24일, 김옥희 수녀(한국순교복자회, 오륜대순교자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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