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자료실

구분 성인명     축일 신분 지역명 검색
원귀임 마리아(9.20)

원귀임 마리아(9.20)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인쇄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원귀임 마리아 (元貴任 Mary)
축일 9월 20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19-1839년
같은이름 마리아, 메리, 미르얌, 미리암, 원 마리아, 원마리아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신앙선조들의 발자취: 의정부교구 신앙 유산의 발견, 고양 용머리 신앙공동체
이전글 성 김대건 탄생 200주년 기념 메달
다음글 성인 이름에 담긴 뜻: 알도(Aldo)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11-13 조회수186 추천수0

[신앙선조들의 발자취] 의정부교구 신앙 유산의 발견, 고양 용머리 신앙공동체

 

 

경기도 고양 용머리에는 1839년 기해박해 이전부터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1835년 11월 말(양력 1836년 1월 중순)에 입국한 모방 신부가 조선 교회의 교세에 대해 보고 받은 내용 중에 용머리 교우촌에 대한 언급이 들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그리고 용머리에 살던 김효임(골룸바) · 김효주(아녜스) 자매와 용머리 출신인 원귀임(마리아)이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순교하여 모두 성인품에 올랐다. 또한 1866년 병인박해 때 용머리에 살던 원윤철도 체포되어 순교하여 현재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는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포함되어 시복 · 시성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아울러 1910~1937년 교세통계표에 용머리 공소가 등장한다. 이러한 사실들로 볼 때, 고양 용머리는 기해박해 이전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교우촌을 이루어 신앙생활을 했던 곳일 뿐만 아니라 병인박해 시기와 개화기 · 일제강점기 때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해 온 유서 깊은 신앙공동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용머리 신앙공동체는 2008년에 ‘경기 북부 지역과 한국천주교’라는 주제로 개최된 학술심포지엄에서 처음 주목을 받아 그에 관한 사실 일부가 교회와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지난 2020년 9월 25일 순교자 성월을 맞이하여 <의정부교구 신앙 유산의 발견>이라는 주제 하에 고양 용머리 신앙공동체 연구 발표회가 교구 주교좌 사적지 성당에서 개최되었다.

 

 

용머리 신앙공동체 위치 확인

 

고양 용머리 신앙공동체는 이번 연구와 용머리 신앙공동체 후손의 증언을 바탕으로 현재 용두초등학교가 위치한 근처 마을(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로 47번길 21-7)에 용머리 신앙공동체가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살고 있으면서 신앙을 전수 받은 후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곳에서 신부들이 미사를 봉헌하였다고 한다. 미사를 봉헌할 때에는 미사에 참석한 신자분들의 감격의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 주민들은 정씨 · 임씨 · 원씨가 60%~70%를 차지하고 있고, 세 성씨의 세거지(世居地)인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곳에서 순교성인 김효임(골롬바) · 김효주(아녜스) 자매와 어머니 정 마리아가 함께 피신해 사셨고, 순교성인 원귀임(마리아)이 태어났다. 현재 이곳은 정부가 발표한 3기 신도시 창릉지구에 포함돼 있다.

 

 

신앙 선조와 함께 하는 삶과 기도

 

“주님, 간절한 마음으로 신앙 선조들처럼 세상이 주는 두려움이 아닌 당신께서 주는 설렘으로 살아가게 도와 주소서” ‘성녀 원귀임 마리아!’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말씀 묵상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 모두 그분의 길을 걷는 이 모두! (시편 128장 1절) [2020년 11월 8일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의정부주보 3면, 의정부교구 교회사 연구소]

 

 

[신앙선조들의 발자취] 의정부교구 신앙 유산의 발견, 고양 용머리 신앙공동체의 순교자 공경 의미

 

 

1. 103위 순교성인 : 원귀임 마리아. 김효임 골롬바, 김효주 아녜스

 

고양 용머리에 거주하던 김효임(골롬바)·김효주(아녜스) 자매와 용머리 출신인 원귀임(마리아)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동정녀로서 모두 103위 순교성인으로 많은 신앙인들에게 공경의 대상뿐만 아니라 위로와 희망을 주고 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점차 격화되면서 용머리 신앙공동체에 대한 박해가 3월 20일 단행되었다. 이때 김효임 · 김효주 자매가 체포되어 포도청 옥에 갇혔다. 포도대장은 두 자매에게 배교하고 교우들과 천주교 서적을 숨겨 둔 곳과 오라비가 피신한 곳을 대라고 다그쳤다. 그러나 두 자매는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신앙을 굳세게 증거했다. 이에 주뢰형을 5차례나 가하지만, 두 자매는 태연하게 참으며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자 포도대장이 두 자매를 발가벗겨 매달아 놓고 마구 매질하고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몸을 지지게 했으나, 두 자매는 의연하게 견디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두 자매를 알몸으로 남자 도둑들 옥에 넣었으나, 역시 두 자매는 초인적인 능력으로 그들을 물리쳤다. 이어 형조로 이송되자, 심문이 끝날 즈음에 김효임이 형조 판서에게 포도청에서 잔인하고 모욕적인 고문을 부당하게 받았다고 호소하자, 형조 판서가 관련 포졸들을 처벌했다. 두 자매는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고 김효주는 7월 26일 23세로, 김효임은 8월 28일 27세로 각각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원귀임도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을 때, 포도대장이 배교하고 목숨이나 구하라고 권유하자, 자신은 천주님을 공경하고 자신의 영혼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이므로, 죽어야 한다면 기꺼이 죽을 것이라고 신앙을 당당히 증거 했다. 이에 그는 주뢰형을 받아 뼈마디가 탈골되고 흘린 피가 땅바닥을 적셨지만, 그의 대답은 끝내 한결같았다. 이어 형조로 이송되어서도 그는 신앙을 굳게 지켰다. 마침내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6월 10일 22세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용머리 출신으로 기해박해 때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김효임 · 김효주 · 원귀임은 1925년 시복되어 복자품에 오르고 다시 1984년 시성되어 성인품에 올랐다.

 

 

2. 하느님의 종 : 원윤철 세례자 요한

 

병인박해 때 용머리에 거주하다 체포된 원윤철 세례자 요한은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와 함께 하느님의 종에 올라 시복청원에 들어가 순교선조들의 믿음과 삶을 본받는 계기가 되고 있다.

 

 

신앙 선조와 함께 하는 삶과 기도

 

“주님, 꾸준한 마음으로 신앙 선조들처럼 세상이 주는 불안함이 아닌 당신께서 주는 든든함으로 살아가게 도와주소서” ‘성녀 김효임 골롬바!’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말씀 묵상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 5장 10절) [2020년 11월 15일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의정부주보 3면, 의정부교구 교회사 연구소]

 

 

[신앙선조들의 발자취] 의정부교구 신앙 유산의 발견, 용머리 신앙공동체의 교회사적 의미

 

 

1. ‘마재 마을’ 이후에 교구 내 두 번째 신앙공동체의 형성(1827년 이전)

 

교회 사료를 통해 추정할 수 있는 용머리 신앙공동체의 시작은 하느님의 종 원윤철 요한의 집안을 통해 확인된다. 그의 여동생인 원 루치아가 고아인 원귀임(마리아)을 1827년에 입교시켜 키웠다. 그러므로 원 루치아는 1827년 이전에 입교했고 용머리 신앙공동체는 1827년 이전에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교구 내 최초의 공소 설립(1836년 이전)

 

경기도 고양 용머리는 1839년 기해박해 이전부터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던 공소였다. 1836년 1월에 입국한 모방 신부가 조선교회 교세에 대해 보고 받은 내용 중에 보면, 당시 신자는 고양 용머리 교우촌에 30~40명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당시 용머리 교우촌에는 원 마리아 가족들과 김효임 · 김효주 가족들 외에도 교우들이 많이 있었다. 용머리 교우촌은 모방 신부의 사목방문을 받아 공소로 설립되었다. 김효임 · 김효주의 집은 공소 역할을 했고, 그들의 오빠인 김 안토니오는 공소회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하느님의 종 원윤철(요한)의 딸 원 마리아가 김 안토니오 집에서 모방 신부를 만났다고 증언한 것으로 살필 수 있다.

 

 

3. 초기 교회부터 지속되어온 신앙공동체

 

1839년 기해박해 때 김효임·김효주 가족들만 피해를 입고 그 밖의 용머리 신앙공동체의 신자들은 무사했다. 그러므로 기해 · 병오 박해 뒤에도 용머리 신앙공동체는 와해되지 않고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하느님의 종 원윤철(요한) 가족들이 기해박해 이후에도 용머리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간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1866년 병인박해를 만나 10월에 용머리에서 원윤철과 성연순이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10월 18일 양화진에서 군무효수형으로 순교했다. 원윤철의 딸 원마리아의 증언과 신앙생활을 살펴보면 병인박해 이후에도 신앙공동체가 와해되지 않고 유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용머리 공동체는 1882년 종현 본당(현 명동 성당)이 설립된 뒤 종현 본당 소속이 되었고, 이어 1891년에 약현 본당이 설립되면서 약현 본당에 소속되었다. 또한 1909년 의정부교구의 첫 본당인 행주 본당이 설립되면서 행주 본당에 소속되었다. 행주 본당 소속 시기인 1909년-1937년에는 용머리 공소가 교세 통계표에 구체적으로 등장한다.(1910년-1911년, 1934년-1937년, 평균 21.7명의 신자) 중간에 용머리 신앙공동체에서 공소가 존재하지 않은 시기도 있었지만, 용머리 신앙공동체는 1937년까지 고양 지역의 대표적인 신앙공동체의 하나로 유지되면서 공소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기해박해 이전부터 시작되어 개화기 이후까지 지속되어온 용머리 신앙공동체는 의정부교구의 유서 깊은 신앙의 유산으로서 중요한 신앙적 · 교회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020년 11월 22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의정부주보 3면, 의정부교구 교회사 연구소]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Total 0 ]
등록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