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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간난 아가타(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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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이간난 아가타 (李干蘭 Agatha)
축일 9월 20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과부,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14-1846년
같은이름 아가다, 아가따, 이 아가다, 이 아가타, 이아가다, 이아가타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103위 성인 약전: 이간난 아가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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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12-18 조회수129 추천수0

[103위 성인 약전] 성녀 이간난


재가 권고 뿌리치고 입교

 

 

성녀 이간난 아가타는 1813년(純祖13)에 외교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아 입교하기 이전까지의 행적이나 성품에 관하여는 알 수가 없다. 다만 18세에 이르러 혼인을 하였으며, 3년후에 남편을 여의고 홀로 생활을 하였다는 사실이 나타날 뿐이다. 

 

1834년에 비로소 천주교에 대하여 듣게된 아가타는 곧 이를 깊이 인식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재가를 권고하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물리치고는 모친께 청하여 천주교인들을 만나게 하여달라고 청하였다. 마침 친척중에 한명이 천주교 신자였으므로 그녀의 원의는 쉽게 이루어질 수가 있었다. 그 친척은 아가타와 그녀의 모친 그리고 오라버니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여 이를 믿도록 한 후, 다시 경문을 가르쳐 유방제(劉方濟) 빠치피꼬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게 하였다.

 

완고한 외교인이었던 아가타의 부친은 집안 사람들이 천주교에 들어간 것을 알고는 크게 화를 내면서 아내와 아들을 경상도로 쫓아보내고 아가타는 시댁으로 돌려보냈다. 그녀는 부친의 뜻을 어기지 않고 시댁으로 돌아가 온순하고 친절한 행동을 보이며 생활하였다. 그리고 곧은 성품을 바탕으로 열성적인 신앙생활을 하고자하여 여러가지 고신극기를 행하였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대재를 자주 지킴으로서 『거울같이 맑고 눈같이 희다』라는 평판을 교우들로부터 듣게 되었다.

 

1846년(蕙宗12)의 박해가 일어나자 아가타는 얼마동안 자신의 집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7월 15일(陽)에 현석문(玄錫文) 까롤로 회장의 집에 갔다가 그들을 수색하던 포졸들에게 체포당하였다.

 

당시 그녀는 낯빛도 변하지 않은채 포졸들을 향하여 『우선 내집에 가서 옷가지를 가지고 떠납시다』라고 침착하게 말하였다고 한다.

 

포청(捕廳)으로 압송된 아가타는 치도곤(治盜棍) 태형(笞刑) 주뢰형(周牢刑) 등 심한 형벌을 당하였으나 자신의 신앙심을 굽히지는 아니하였다. 다만 어느기록에서 보면 그녀가 배교의 유혹을 받아 잠시 마음이 약해졌을 때 교우들이 권면함으로써 다시 용기를 갖도록 하였다고도 한다. 그러던 중 아가타는 마지막으로 곤장 50대를 맞고 순교함에 이르렀으니, 때는 1846년 9월 20일(陰8월 1일)로 그녀의 나이는 33세였다.

 

「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던 성녀 정철염 까타리나는 1817년경에 종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재질은 그다지 뛰어나지 못하였으나 성격은 온순하고 마음도 매우 용감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본래 김씨라는 외교인 양반의 종으로 있었는데, 16~18세에 이르러 주인집 가족 중의 신자 한사람으로 부터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어려서부터 영세를 받았다고도 증언하였다. 입교한 후 그녀는 교리의 본분을 지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까타리나가 20세에 이르던 해 동지에 주인은 그녀로 하여금 시신행위에 참석하게 하려고 강요를 하였으나, 그녀는 신앙을 지키려는 마음에서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러자 주인은 대노하여 그녀의 팔을 뒤로 결박하고 몸에는 큰 맷돌을 매단 후 미신행위가 끝날 때까지 장작더미 위에 얹어두도록 하였다. 제사가 끝난 다음 주인은 그녀를 끌어내려 직접 혹독한 매질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녀는 4, 5주일 뒤에서야 몸을 회복할수가 있었다. 이듬해 춘분 제삿날이 되자 주인은 다시 까타리나에게 미신행위에 참여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녀가 다시 이를 거절하자 주인은 전보다 혹독한 매질을 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두 차례의 형벌은 그녀의 몸에 심한 고통을 주었으며, 결국 그녀는 깊이 스며든 상처로 인하여 힘든 일은 거의 할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다.

 

상처로 인한 몸이 회복되자 까타리나는 몰래 서울로 도망하여 교우집을 전전하면서 안온한 가운데에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1845년에는 김대건(金大建)신부의 집에서 하인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후 병오교난(丙午敎難)의 박해로 신부가 체포되자 그녀는 현석문 까롤로 회장이 마련한 집으로 가서 김임이(金任伊)데레사와 함께 생활하던 중 포졸들에게 체포당하는 몸이 되었다.

 

한편 어떤 기록에서는 까롤로 회장과 까타리나가 동거생활을 하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함께 생활한 것이 한달 남짓이었다는 점, 그 집에는 동정녀 김데레사가 함께 있었다는 점, 그리고 여러 교우들이 그 생활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때 그러한 기록은 외교인들의 추측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교우들과 함께 포청으로 압송된 까타리나는 여러가지 혹형을 당하였으나 끝까지 진리를 증거함으로써 신앙심을 굽히지 아니하였다. 그러던 중 혹독한 매질을 당함으로써 순교함에 이르니, 때는 1846년 9월 20일로 그녀의 나이는 30세였다.

 

[가톨릭신문, 1985년 3월 3일, 김옥희 수녀(한국순교복자회, 오륜대순교자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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