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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환 프란치스코(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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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최경환 프란치스코 (崔京煥 Francis)
축일 9월 2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회장,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05-1839년
같은이름 방지거, 최 프란치스코, 최프란치스코,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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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최경환 성인의 천주신앙과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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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1-16 조회수294 추천수0
파일첨부 최경환 성인의 천주신앙과 순교.hwp [123904]  

최경환 성인의 천주신앙과 순교

 

 

본 논문은 최경환 성인의 생애를 대상으로 그의 천주신앙과 순교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수리산 공소 회장이었던 최경환 성인은 기해박해 때 평신도 순교자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최경환의 천주신앙이 보여주는 가장 큰 특징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결합시키는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최경환이 보여준 하느님 사랑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우선 그는 성경 독서와 공부를 열심히 하여 교리 지식에 해박했고 강론에도 뛰어났다. 또한 《칠극》 수련을 통해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보임으로써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다. 둘째 그의 가문이 오랫동안 신앙생활에 냉담하자 최경환이 주도하여 고향인 청양 다락골에서 떠나 서울, 강원도 김성, 경기도 부평, 수리산 등지로 이주함으로써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셋째 고향에서 모은 많은 재산이 신앙생활에 장애가 되자 그는 자발적으로 재산을 포기하고 가난한 삶을 선택했다. 대신 노동과 절약으로 시련을 극복하고 신앙심을 지켰다.

 

최경환의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가 보여준 이웃 사랑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는 스스로 자기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여 항상 교만을 경계하였다. 둘째 그는 무엇보다 가족을 중시하고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를 실천하였다. 셋째 그는 항상 이웃과 가족들 사이에서 화목했고 자식들에게도 그것을 강조했다. 넷째 신분의 차별을 넘어 이웃을 평등하게 대했다. 이 평등사상은 그 아버지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며 다시 최경환의 아들 최양업 신부에게도 전승되었다. 다섯째 최경환은 자신이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자선을 많이 베풀었다. 순교자의 시신을 매장하고 같이 잡혀간 신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은 것 역시 사랑의 실천이었다.

 

최경환은 수리산에 정착한 뒤 얼마 후에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공소회장이자 신학생의 부친으로서 모범을 보이기 위해 순교를 결심하고 준비하였다. 또한 당시 널리 퍼져 있던 배교의 흐름에 선교사들이 고심하고 대책을 강구할 때 최경환은 앞장서서 순교자의 시신을 매장함으로써 순교자를 공경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 자신도 배교의 유혹을 극복하고 순교하였다. 그의 순교는 배교의 흐름을 거스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많은 신자에게 순교가 신앙 보존과 천주교 확산에 큰 의미가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Ⅰ. 머리말

 

최경환 성인은 그 자신의 삶과 신앙으로 보다도 그와 관련된 인물을 통해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아들인 최양업이 두 번째 한국인 사제였기 때문이다. 또한 한때의 배교를 뉘우치고 순교한 이성례 마리아가 그의 부인이며, 그를 통해 최경환의 가문이 초기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내포의 사도로 유명한 이존창과도 연결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최경환 역시 충청도의 내포지역인 청양 다락골에서 태어나 수리산에서 체포되어 순교할 때까지 보여준 수많은 훌륭한 표양들만으로도 오래 기억하기에 충분한 인물일 것이다. 이에 공소 회장으로 당시 교회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그는 기해박해에서 평신도 순교자를 대표하는 인물이 될 수 있었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경환 성인에 대해서는 현재 단독 연구가 나와 있지 않다. 그것은 최경환 성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시성된 분들이나, 앞으로 시복 · 시성될 분들에 대한 일반적인 연구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최근에 일정한 노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제대로 된 연구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부분에 대한 노력이 앞섰던 것이다. 지금까지 최경환에 대한 관심은 최양업 신부에 대한 몇몇 연구가 진행될 때 부수적으로 다루어졌다. 이를 통해 최경환의 신앙생활과 신심이 간단하게 언급되었으며, 최경환 성인의 수리산 이주시기가 새롭게 밝혀졌을 정도이다.1) 때문에 최경환의 가문에 대해서나, 그와 관련해서 여러 혼란을 주고 있는 자료들의 정리 및 이주한 지역들에 대한 검토 등 여러 부분에 걸쳐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이 글에서 다룰 최경환 성인의 천주신앙에 대한 연구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글 역시 최경환에 대한 기초적인 연구 없이 바로 이러한 부분에 들어가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에서는 최경환의 천주신앙이 보여주는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최양업 신부도 이러한 부친의 신앙생활과 신심을 기록하기를 첫째 교리에 대한 지식이 해박한데다가 묵상과 독서를 통한 신심 함 양, 이웃과의 나눔 운동과 극기의 실천에 뛰어났으며, 둘째 평소에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르고자 노력하였으며, 셋째 회장으로서 교우촌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물론 경제적인 측면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또 최경환은 부친의 유언에 따라 애긍을 실천하고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려고 노력하였는데,2)

 

라고 하여, 최경환이 《칠극》의 가르침을 육화론적 영성의 바탕으로 삼아 종말론적 영성을 추구였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의 이해를 중심으로 정리한 이러한 내용만으로 최경환의 천주신앙을 엿볼 수 있겠지만 조금은 나열적인 까닭에 서로의 유기적인 연관성을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다.

 

그 보다는 《한국천주교회사》를 저술한 샤를르 달레의 말이 최경환의 천주신앙을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천주이신 스승의 영광을 위한 그분의 열정은 이웃에 대한 정다운 애덕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3)

 

최경환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결합시키는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강조한 가장 큰 계명과 관련된 내용들이다. 이 점은 최경환의 천주신앙을 파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지 않을까 한다. 다시 말해서 최경환의 천주신앙을 핵심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최경환의 천주신앙이 이 부분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으며, 이후 순교로 어떻게 이어지게 되는가를 새롭게 살펴보고자 한다.

 

 

Ⅱ. 하느님 사랑 : 버리고 떠나기

 

예수님이 강조한 가장 큰 계명에서 우선 되는 것은 하느님 사랑이다. 최경환의 천주신앙에서 그것이 어떻게 나타는지를 살펴보자.

 

 

1. 신덕의 추구

 

최경환 성인은 1805년 최인주의 셋째 아들로 청양의 다락골에서 태어났다.4) 최인주에 대해서 최양업 신부는 순박함과 신심이 뛰어났다고 말한다.5) 그의 아버지인 최경환에 대해서도 천성적으로 진정한 신앙의 실천자였고, 정직과 순박을 애호하면서도 강력한 성품을 타고 났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최경환은 그의 아버지인 최인주의 신앙과 성품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최경환 성인은 소년시절부터 세속의 오락을 경멸하고 천주교 교리를 듣거나 읽는 것만을 즐거워하였다. 이와 달리 한문 교육을 별로 받은 바는 없었다.6) 이러한 최경환이 천주교에 대해서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5살이 되는 1820년에 혼인을 하면서부터의 일로 생각된다. 이존창의 사촌 누이인 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인 이성례 마리아와 혼인을 하였다.7) 이는 아버지 최인주에 이어 경주 이씨와의 거듭된 혼인이었다.

 

최경환 성인은 결혼 후 처가를 방문하게 되었다. 처남의 부인들이 그에게 천주교 신자이므로 강론을 잘 할 것이라고 하여 이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당시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에 그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칠극》을 숙독하고 외웠다.8) 그런 다음 다시 처가에 가서 2~3일 동안 강론을 할 정도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가 경향에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무렵에 들어와서 그가 천주교에 대해서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읽게 된 《칠극》은 최경환 성인에게 신심의 바탕이 된 책이었다. 그는 서울을 떠나 산속의 교우촌에 머물 때에도 《칠극》을 통해 수신 입공에 전념하였던 것이다. 《칠극》은 잘 알려지고 있는 것처럼 수양서이다.9) 사람들이 일곱 가지 죄를 극복하여 극기를 완성해야 하는 내용을 다룬 것이다. 인간의 최종 목표로 마지막 때의 복락을 말하고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이 세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구체적인 삶에서 사악함을 극복하고 덕을 쌓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칠극》이 최경환 성인에게 영향을 준 것은 무엇보다 그의 성격을 바꾸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그의 성격은 본래 가파르고 급하며 혹독하였다고 한다.10) 그러나 《칠극》을 공부하면서 힘써 분노와 독한 마음을 이기고 억제하여 나중에는 도리어 유순한 성품이 되었던 것이다. 즉 도리로서 나쁜 성격을 억제하여 온순하고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후 최경환은 더욱 자주 묵상하고 여가만 있으면 신심 독서를 함으로써 천주교의 신비에 대한 훌륭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11) 그는 매일 규칙 생활을 하면서 아무리 바쁜 날이라도 신심 독서를 중단하지 않았다.

 

최경환 성인의 교리에 대한 이해는 서울을 떠나 산속의 교우촌으로 옮겨가서 생활하면서 보다 확고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가 독서와 지식을 얻는 데에 부지런했기 때문에 믿을 교리에 대해 매우 확고해졌다는 것이다.12) 이에 그는 낮에는 집안일에 전념하고 저녁에는 가족과 교우들을 모아 천주교의 진리를 자세히 설명하였으며, 일요일과 축일에는 그것을 더욱 상세하게 가르칠 수 있었다. 자기 스스로 교리에 대해서 깨우쳤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이 된 것이다.

 

특히 최경환 성인은 성경 읽기를 중요시하였다. 그가 성경을 얼마큼 중요하게 여겼는가는 수리산에서 체포되기 전의 일을 통해서 알 수 있다.13) 그는 아무리 위험한 경우라도 항상 십자고상과 성경을 제대위에 모셔두고 있었다. 그런데 한번은 조카가 이를 보고 이 같은 위험한 시기에 어찌 성물을 강에 던져버리거나 숨겨두지 않느냐고 묻자, 전쟁에 나설 우리의 무기는 고상과 성경이기 때문에 한때도 멀리할 수가 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성경을 항상 가까이에 두고 열심히 읽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노력하였다.

 

최경환 성인의 성경에 대한 이해는 서울에서 박해를 받게 되어 그곳을 떠나게 되었을 때 친지들이 최경환을 괴롭힌 외교인을 처벌하여 그를 도와주고자 했을 때에 악을 악으로 갚거나 박해자들을 폭력으로 격퇴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합치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며 거절한 말에서 엿볼 수 있다.14) 부인인 이성례 마리아가 남편을 따라 먼 곳으로 이사를 갈 때나 먼 길을 걸을 때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지쳐서 칭얼거리면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와 요셉이 이집트로 피난을 가던 이야기와 갈바리아 산에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15) 후술하겠지만 그가 재산을 포기하고자 한 것도 그러할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의 모범을 철저하게 따르는 것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살았던 것이다.16)

 

최경환 성인이 이렇게 기도하고, 독서를 한 것만이 아니라 대단히 훌륭한 강론가였다는 점도 주목된다. 그는 항상 천주교 교리와 심신 사정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였던 것이다.17) 이때 그가 얼마나 꾸밈없이 순박하게, 그리고 몸짓을 해가면서 힘차게 말하는지 듣는 사람은 누구나 탄복할 정도였다. 그만큼 그는 열변과 달변으로 교리의 전달에 열성적인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서울에서나,18) 부평이나,19) 수리산에서도20) 이러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그가 수리산에서 체포되어 주막에서 쉴 때에도 신자들에게 강론을 하였던 것이다.21) 때문에 박학한 신자들이나 유식한 사람들까지도 그의 강론을 듣기 위해서 아주 멀리서도 종종 찾아오곤 했다.22)

 

그것은 외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최경환 성인의 강론은 매우 까다롭게 꼬치꼬치 따지는 비신자들까지도 그의 변론에 설복되어 돌아가게 만들었다.23) 특히 심문을 받으면서 한 권의 신심 서적을 읽으라고 했을 때에도 그러하였다.24) 그가 너무나 열심히, 감격적으로 읽었기 때문에 외교인들이 모두 일어나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극구 찬미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처참하고 무시무시한 상황 속에서조차 독서를 통해 그렇게도 자유롭고 깨끗한 기쁨을 자아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그의 노력은 이들로 하여금 천주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해주었다.

 

이러한 까닭에 최경환 성인은 세속의 일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으로 보였다. 육신을 가꾸는 일이나 세속적인 평판이나 세속적인 관심이나 현세적인 사정에 대해서는 전혀 도외시하였다.25) 때문에 한때 최경환 성인에 대해 마귀의 투기가 심하여 이상한 소리와 자취로 그를 혼란하게 하였는데, 최경환이 이를 영적인 현상으로 알고 믿으려고 하자, 앵베르 주교는 그것을 마술이라고 결단을 해주며 깨우쳐준 일이 있을 정도였다.26)

 

이에 대해서 달레는 최경환이 일할 때나 쉴 때에나, 집에서나 들에서나 길을 갈 때에나 항상 어디서나 천주와 결합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서 천주이신 스승의 영광을 위한 최경환의 열정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27) 그가 항상 어디서나 천주와 결합되어 있었다는 것은 하느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최경환의 하느님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당시의 신자들은 그의 신덕이 굳세고 확고하다고 보았으며, 이에 그의 행위와 표양을 찬미하게 되었다.28)

 

 

2. 떠남의 신앙

 

최경환 성인의 하느님 사랑은 그의 신앙생활에서 찾아지는 여러 번의 이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최경환은 고향인 청양 다락골을 떠나서 서울로, 서울에서 강원도 김성으로, 김성에서 부평으로, 부평에서 다시 수리산으로 이주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신앙생활에서 이러한 이주는 또 다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최경환 가문에서 이주를 주도한 사람은 바로 최경환 성인이었다. 최경환 성인은 성장하면서 자기 가족의 신앙심이 냉담해진 상태 때문에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이 역시 그가 결혼한 이후의 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미 최경환 가문은 일찍부터 그러한 상태에 있었다.29) 그 시기는 그가 태어나기 이전인 1801년부터였다.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와 주문모 신부의 순교라는 두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박해와 신부의 부재로 상당한 영향을 받았던 것이 다. 이러한 외적 조건은 집안의 내부적인 문제와 결부되어갔다. 재물과 비신자 친척들과의 갈등으로 말미암아 점차 천주교 계율 준수의 열심이 식어갔던 것이다. 비신자 친척과의 갈등은 천주교를 계속적으로 믿어야 하는가 하는 종교적인 문제였을 것이며, 여기에 재물까지 개입되어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805년 청양 다락골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교회 재건 운동이 주목된다.30) 같은 다락골 출신이고, 최씨 가문인 최신덕은 학식이 있고 열심하고 마음이 단단한 사람이었다. 그는 애덕의 길을 실행하였는데, 여러 마을의 신자들 사이에 다시 내왕이 있도록 주선하는 일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는 모든 이들에게 배울 방법을 마련해주려고, 자기 손으로 교회 서적을 많이 베껴 어느 누구보다도 중요한 신자집단을 재건하는데 이바지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새로운 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복음전파가 새로이 힘차게 행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도 최경환 가문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최경환 성인이 천주교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때에는 집안의 신앙상태는 냉담 상태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31) 최경환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마침내 이주를 생각하였다. 이에 그는 부모와 형제들을 권고하여 고향과 재물을 버리고 고향마을을 떠나서 영혼을 구원하기 편한 곳으로 이사를 하자고 졸랐다. 고향을 버리자는 것이다. 타향으로의 이주를 통해 그는 풍족한 현실생활에서 오는 형제들의 세속에 대한 관심을 성실한 신앙생활로 전환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최경환이 고향을 떠나 타향으로 이주하게 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최경환 성인이 가족들에게 처음 이주를 언급한 시기는 부모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그의 아버지인 최인주가 사망하는 1824년 이전의 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말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에 그는 혼자 집을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그 대상지역은 서울이었 다.32) 그리고 그가 떠남을 단행한 그 시기는 집에 모친이 있다고 하면서 아버지가 언급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1824년 이후의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마도 아버지의 사후 곧바로는 아니었을 것이다. 대체적으로 그 시기는 1827년으로 생각된다. 1827년에 일어난 정해박해가 최경환 가문의 이주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33) 이에 그는 긴 편지를 남겨두고 신앙을 열심히 실천하고 교리에 더 밝은 서울의 신자들을 찾아 집을 몰래 빠져나왔다.34) 이후 최경환이 집에서 보이지 않자 가족들은 대책을 세울 수가 없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모든 형제들이 그를 찾아 나선지 몇 십 일 만에 다시 집으로 함께 돌아왔다. 그리고서 가족 전체는 만장일치로 합의하여 고향과 친척과 재산 등을 모두 버리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25명이나 되는 가족 모두가 서울로 이사하게 되었다. 그것은 서울에 인연이 있는 이국빈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최경환 성인이 다른 교우촌이 아니라 서울을 선택한 것은 서울과 같은 곳에 가서 살아야 교회소식도 잘 알고, 수계사정도 편리하며, 주교나 신부를 속히 만날 경우를 생각한 것이다. 청양 다락골에서 서울로 옮긴 최경환 가문이 머문 장소에 대해서는 공덕리,35) 벙거지골,36) 낙동 근처37) 등으로 여러 곳이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이들이 서울에서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닌 것을 말하는지, 아니면 3형제들이 서로 나누어 살았던 것을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38) 그러나 최경환 가문은 서울에서 3년 밖에 머물지 못하였다.39) 최경환의 집에 신자들이 너무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에 이웃사람들한테 신자집이라는 것이 탄로가 나서 관가에 붙잡혀 갈 위기에 처하였기 때문이다.40) 이에 친지 중에 세력이 있는 고관들이 최경환의 집안을 외교인들의 술책으로부터 구출하려고 하나 최경환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떠남을 선택하였다.

 

이에 최경환 성인 가문은 산속의 교우촌으로 피신하였다. 이 산골에서 저 산골로 이사를 다녔다고 한다.41) 우선 강원도의 김성으로 이주하였다. 그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서울에서 상당히 먼 지역을 선택하였다. 김성에는 당시 약 300명의 신자들이 산재해있었다.42) 그러나 이 지역에서의 신앙생활에 대해서는 자세히 파악할 수 어렵다. 거의 6년 동안이라는 상당한 기간 동안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주는 최경환의 신앙생활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던 것임은 분명하다. 이제 그가 목표로 삼은 이주의 목표가 달성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주를 통해서 그의 교리에 대한 지식이 매우 확고해졌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성에서 다시 옮기게 된다. 그 원인은 알 수 없다. 이에 새롭게 옮겨간 곳은 부평의 접푸리 지역이다.43) 왜 다시 서울로 들어가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44) 최경환 성인의 이주는 1810년대 혹은 그 이전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경기 서부지역의 천주교 집단에45)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 베드로 증언을 따른다면 최경환은 3년을 그와 함께 살며46) 어려움과 괴로움을 감수했으나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기 때문이다. 3년이라는 기간과 최경환 가문이 1838년경 과천 수리산으로 옮겨간 시기를 고려한다면 늦어도 1836년 2월 이전에 부평에 들어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서 그는 모방 신부를 만나게 되고, 첫째 아들인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최양업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 뒤인 1838년경에 다시 수리산으로 이주하였다. 외교인을 피하여 수리산으로 옮기게 되었다고 하는데47), 1838년 10월 인천에서 박해가 발생하여 많은 신자들이 피신하거나 체포된 사실이48) 최경환으로 하여금 수리산으로 옮겨가게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최경환 가문의 세 형제의 분산이 언제쯤 이루어진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서울생활의 다음에 그 내용이 기록되고 있기는 하지 만49), 수리산이 언급된다는 점에서 부평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이때 한 사람은 목천으로, 한 사람은 김대건 신부 집안이 머물고 있는 용인으로 옮겨갔다. 이것은 합덕 솔뫼에서 용인으로 옮겨간 김대건 가문의 이주와는 다른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처럼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최경환이 김제준을 만난 기록이 증언록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50) 용인의 한덕골에 있는 김대건 신부 집안과도 일정한 교류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이때 그는 김제준이 신자들에게 오랫동안 염경(念經)과 간서(看書)만을 지루하게 한다는 사실을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요소가 그가 경기 남부지역이 아니라 경기 서부지역을 선택한 것에 작용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최경환 성인이 옮겨간 수리산 지역은 그에 의해서 새롭게 형성된 교우촌이 아니라 1836년 초부터 50~60명의 신자가 이미 살고 있었다.51) 최경환 집안의 이주와 함께 1839년에는 100여명으로 증가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던 최경환은 수리산을 사목 방문한 모방 신부에 의해 1839년에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를 통해 그는 교회 지도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52) 이때 서울과의 교류도 다시 전개되었다.53) 그리고 가장 큰 떠남인 순교를 준비하게 된다.

 

최경환 성인 가문에게 고향을 버린 타향으로의 이주는 바로 최경환 가문의 신앙을 지탱해준 요인이었다고 이해된다.54)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이러한 떠남이 시작되었는데, 최경환은 이주를 거듭할 때마다 새로운 신앙생활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최경환이 처음에 목표로 했던 영혼의 구제, 다시 말해서 하느님 사랑과 관련된 것이었다.

 

 

3. 재물의 포기

 

최경환 성인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아버지 최경환이 경제적으로 부유한 신자 부모에게서 태어났다고 말한다.55) 최경환의 집안이 이와 같이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하게 된 과정에 대해서는 〈최 바실리오 이력서〉에 잘 설명되고 있다. 아버지인 최인주가 다락골에서 황무지에 대한 개간을 통해 당대에 커다란 재산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그는 남들이 천석추수를 말할 정도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와 같은 재물은 최경환 가문의 신앙생활에 문제를 일으켰다. 박해라는 이유 이외에 재물로 인하여 이들의 수계활동이 점차로 희박해졌던 것이다. 그래서 최경환이 영혼의 구제를 위해서 재물을 버리자고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것은 서울로의 이주와 함께 곧바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역시 경제적 기반의 처리 문제가 작용하였던 것이다.

 

최경환 가문이 청양에서 서울로 이주하였을 때에도 재산을 버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서울로의 이주가 쉬웠던 것은 바로 재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56) 이국빈은 재정이 풍부하니 하는 일마다 순조로웠음을 말한다. 이렇게 편리하게 무리가 없이 바로 이사가 이루어진 것이 처음이라고까지 언급한다. 서울에서 최경환 가문은 증언록에서는 큰 집으로,57) 〈최 바실리오 이력서〉에서는 수십 칸의 기와집을 샀음을 알려준다.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최경환 가문의 가세가 넉넉하다고 소문이 났으며, 급기야 어떻게 하여 이러한 재산을 유지하게 되었느냐고 궁금해 하다가 천주교 신자가 아닌가 하고 의심을 받게 되었다.58) 그러므로 서울로의 이주를 통해서 최경환 가문은 고향은 버린 것이 되었지만, 신앙에 걸림돌이 되었던 재물은 포기하지 못하였다. 그만큼 재물을 포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것이 그들의 신앙생활에 제약요소로 여전히 작용하였던 것이다.

 

 최경환 성인은 서울을 벗어나기로 하면서 비로소 재산을 버리기로 결정한다.59) 이국빈과 여러 친구들에게 가옥과 제반사를 위탁하고 서울을 떠났다. 여기에도 작은 망설임이 있었다. 이때 유기그릇만을 수합하였는데, 삼십 두를 담는 그릇으로 하나였을 정도였다. 그래서 집사람들은 이것만 보아도 또 문제가 될 것이라며 하면서 그조차 포기하였다.

 

서울을 벗어나서 최경환 가문은 산골의 교우촌에서 살기로 결정하였을 때에도 여전히 일정한 경제적 기반이 남아 있었다. 어떤 기록은 모든 재산을 버리기로 산속으로 피신하였다고 하고 있으며,60) 달레는 그 재산을 거의 다 잃어버렸다고61) 표현하고 있다. 서울에서 많은 부분을 버리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소규모의 재산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증언에서는 서울에서 시골로 피하니 재산이 점점 다 없어지게 되었다고 언급한다.62) 또 다른 증언에서나 〈최 바시리오 이력서〉에 의하면 청양 다락골에 몇 두락의 토지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최경환이 고향의 토지를 팔러 다니던 일에 대한 증언도 찾아볼 수 있다.63) 그러나 이 재산조차도 산속의 교우촌에서 수 삼년을 지나면서 모두 팔아버리게 되었다고 한다. 토지를 팔게 된 것은 산농이 생소하여 농형은 부실하고 식솔은 많았기 때문이다.64)

 

최경환 가문은 그가 바라던 것처럼 경제적으로 무로 돌아가게 되었다. 때문에 최양업 신부는 이러한 최경환 가문의 경제적 변화에 대해서 자발적으로 재산을 버렸다고 말한다.65)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향에 이어 재산을 포기한 것으로 보았다.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과거에는 부자였으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진하여 이러한 궁핍과 재난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에 최경환 가문은 이것이 예수그리스도와 성인들의 모범을 더욱 철저하게 따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만족해하며 살았다고 한다.

 

이제 최경환 성인의 가문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부평에서 머물 때 어려움과 괴로움을 겪었다고 한 말에서 알 수 있다.66)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스스로 일을 하여야만 하였다. 이것은 노동의 강조로 이어졌을 것이다. 최경환의 가족은 이 산골에서 저 산골로 이사를 다니면서 그들의 손으로 가시덤불과 돌 자갈 밭을 개간하여 연명해 나갔다. 이러한 개간 이외에 담배 농사를 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또한 생활에서 절약을 실천하였다.

 

때문에 이러한 경제적인 어려움과는 달리 최경환 가문은 새로 옮겨간 산 속의 교우촌에서 아주 마음 편하게 천주교를 실천했다고 한다.67) 다시 말해서 이들은 이러한 어려움을 통해서 신앙생활에서 새로운 태도를 배웠던 것이다. 궁핍과 재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또 그것을 만족스럽게 생각하며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성례 마리아의 말을 통해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68) 그는 극도의 궁핍과 굶주림 가운데 험한 산속으로 방황하기를 수년을 거듭하였는데도 이 모든 것을 기쁘게 참아 받았다고 한다. 달레는 그의 입에서 불평불만의 말이 새어 나오는 일이 결코 없었음을 전해준다.69) 그리고 최경환을 따라 서울로 이사를 왔다가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지극히 헌신적으로 그의 모든 고통을 나누어 받았음을 강조한다. 있는 그대로 고통을 수용하고, 그것을 나누어 견디어 내었다는 것이다.

 

최경환 성인이 홍수나 기근과 같은 재난을 겪을 때에도 보여준 태도에도 잘 나온다.70) 어느 해 추수할 무렵 농작물에 굉장한 폭우가 쏟아져서 곡식을 다 잃게 되었다. 모든 이가 그러한 재난을 당하여 눈물로 탄식하면 실망하고 있을 때에 최경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평온한 얼굴을 보여주었고, 오히려 평소보다 더 명랑하여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이상하게 여기는 신자들에게 최경환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절망에 빠져있고, 이처럼 비탄에 잠겨 있습니까? 모든 일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까? 세상 일이 다 하느님의 안배대로 되는 것임을 왜 믿지 않습니까? 우리의 탓과 게으름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면 모르거니와 하느님의 섭리로 추수를 망친 것인데 슬퍼할 까닭이 무엇입니까?”하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최경환 성인이 체포되고 감옥에 있을 때나 순교할 때에도 이러한 정신에도 드러났다.71) 도적과 한 옥중에 갇혔으니 그가 업신여기고 깔보고, 비웃으며, 형벌을 당하여 상한 데를 마구 발로 찼는데도 아프다는 말을 한 마디도 내지 않아, 최경환이 참으로 성스러운 교를 믿는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았다.

 

 

Ⅲ. 이웃 사랑 : 평등 속의 사랑 실천

 

하느님 사랑이란 바로 이웃 사랑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함으로써 가장 큰 계명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경환 성인의 이웃 사랑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살펴보자.

 

 

1. 겸손의 지향

 

최경환 성인은 항상 자기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중하게 여기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72) 때문에 사람의 과실을 보지 못하는 것 같다고 언급된다. 이것은 겸손의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겸손이란 이웃 사랑을 할 때 필요한 가장 중요한 태도로 생각한 것이다.

 

한편 이것은 최경환 성인이 자신의 교만을 경계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교만에 대한 경계는 최경환 성인의 아버지인 최인주가 언제나 자녀들에게 강조한 부분이다.73) 그는 “교만이라 하는 것은 천상으로조차 세상까지 무너진 원인이다. 천만번 주의하여 일평생을 겸양으로 마쳐야 사주구령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교만에 대한 경계는 최경환이 신심의 바탕으로 삼은 《칠극》의 정신이기도 하였다. 《칠극》의 제 1편은 바로 〈교만을 누르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복은 겸손한 사람을 따르고, 화는 교만한 자 위에 내려온다는 것을 경계시키고 있다. 때문에 가장 지혜로운 자는 겸손한 사람이며, 가장 우둔한 자는 교만한 사람임을 알려주고 있다.

 

 

2. 화목의 강조

 

최경환 성인이 화목시킨 일을 모두 다 말로 할 길이 없다고 한다.74) 그는 형제간의 화목을 중요한 덕목으로 삼아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아들 최양업 신부에 의하면 최경환은 남들이 탄복할 만큼 형제들과 화목하게 살았고 한다.75) 이성례 역시 18살에 결혼하여 집안일을 지혜롭게 꾸려가면서 식구들과 불화가 없이 지내도록 하였다.76) 그것은 부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이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데도 남편을 공경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며 부부가 한마음 한뜻으로 화목하게 살았던 것이다. 특히 그녀는 처형날짜가 가까워지자 유언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부지런히 지키고, 형제들 사이에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도록 타일렀다.

 

최경환 성인의 아버지인 최인주의 세 가지 유언 가운데 하나는 자식들이 이웃들과는 항상 화목하게 지내라는 것이었다.77) 그는 그러한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웃과의 관계에 있은 하나의 예를 언급해두고자 한다. 한번은 가계가 몰락하여 홍주의 몇 두락 토지를 팔아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어떤 두 사람이 채무문제로 심하게 싸우자, 그는 빚을 갚지 못한 채무자를 불쌍히 여겨 갚지 못한 돈을 대신 갚아주어 화목하게 했다는 것이다.78) 화목의 개념이 이렇게도 적용된다. 최경환에게 화목이란 싸움을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용서와 화해의 정신을 사람들이 가지기를 바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평등의 추구

 

최경환 성인이 겸손과 화목을 강조한 것은 무엇보다 사람들 사이의 평등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최경환 가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인 이 부분을 그에게서 바로 찾아보기는 어렵 다. 아래 사람에게 자상하게 보살펴주었다는 사실만이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79) 이것은 최인주의 말을 연상시킨다. 최인주는 자기 집 종들에게 자기들을 영감님이나 마나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부르라고 명하였다.80)

 

또한 최인주는 자식들에게 자기를 드러내지 말라고 말하였다.81) 남의 앞에 근본을 자랑하는 것은 신분을 손상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십분 조심하고 주의하라는 것이다. 자기 과시를 경계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신분의 차별을 넘어 이웃을 평등하게 대하는 바람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정신은 그대로 최경환 성인에게도 이어졌을 것이다. 이것은 그가 가난한 사람뿐만 아니라 무식한 사람에게도 직분을 다하여 섬겼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 다.82)

 

최경환 성인의 혼인과 관련해서 살펴볼 수 있다.83) 최경환 성인의 신분에 대해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검토할 여지가 있다. 어떤 자료에서는 그를 양인 가문의 사람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84) 그러나 그가 현재의 이해처럼 몰락 양반으로 파악된다면 천주교 신자 안에서 이루어진 양반과 양인과의 혼인은 당시로서도 드문 사례였기 때문이다.

 

이는 최경환 가문의 특징적인 가문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85) 최양업 신부가 그의 양반 신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점이 한 번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그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최경환 가문의 인식은 천주 앞에서 같은 형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그들이 조선 사회의 신분제를 아직은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었지만, 신자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천주 앞에서 같은 한 형제임을 인식하기를 바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점은 최양업 신부의 양반제도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게 되었다.86) 그는 조선의 양반제도가 그리스도의 정신에 위배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 모순과 오류를 비판하였던 것이다. 페레올 주교가 양반만을 편애하는 사실도 이 점에서 비판하였다. 이에 그는 반상의 갈등, 양반의 착취와 하층민의 고통을 언급하면서 언제나 억압받는 민중의 편에 서고자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최경환 역시 신앙을 통해서 평등이념을 추구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조선의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이상적인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4. 가족의 중시

 

최경환 성인은 이웃 사랑에서 우선 가족을 중시하고 있다. 애덕을 실천하면서도 가정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웃 사랑을 위해서는 자기 사랑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때 최경환의 부모에 대한 효가 언급되고 있다. 최경환이 홀어머니에 대해서 가장 다정한 효도로 섬겼다는 것처럼.87)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형제들과의 관계를 매우 중요시하였다. 그가 형제 사이의 화목을 강조한 것 역시 가족을 그만큼 중시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아버지 최인주에 이어 최경환 역시 6명의 자식을 두었다는 사실도 그러한 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최경환 성인의 가문은 가족이 집단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가족이 집단으로 천주교를 수용하였던 것이다. 할아버지인 최한일 형제는, 최한일의 부인과 함께 이존창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88) 최경환 역시 가족들이 냉담해지자, 가족들의 회심을 위해 가족이 함께 고향을 떠나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가족들 25명은 집단으로 서울로 이주해갔다. 이후 여러 곳을 옮겨 다닐 때에도 가족들이 함께 이주하기도 하였다. 이는 무엇보다 가족들이 신심생활을 함께 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에 최경환은 가족 모두와 함께 공동으로 아침과 저녁 기도를 공동으로 하였다.

 

그것은 순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가족들이 집단으로 체포되었던 것이다. 함께 체포된 40명이 모두 같은 가족은 아니겠지만,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인물임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들이 수리산에서 서울의 감옥까지 행렬을 보여준 사실은 보통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다.89) 40명이나 되는 온 집안 식구가 모여 길을 떠날 때 맨 앞에는 남자들이, 큰 아이들을 데리고 걷고 그 뒤에는 엄마들이 젖먹이들을 업고 걷는 것은 기이한 풍경이었기에 일반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때문에 기해박해 관련 순교자들은 한 가족이 순교한 경우가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데,90) 최경환 가문에서도 찾아지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최경환은 가족에게 순교준비를 시킬 때가 되었다고 하면서, 그것이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것임을 가르쳤던 것이다. 이에 최경환은 그의 아들 한 명과 부인과 함께 순교하였다.

 

 

5. 애덕의 실천

 

최경환 성인의 이웃 사랑은 가족사랑을 넘어서 이제 이웃에 대한 애덕의 실천으로 구체화되었다. 특히 그는 자선을 많이 베풀었다. 때문에 그의 애긍 역시 다 말로 할 길이 없다고 한다.91) 이 역시 그의 아버지인 최인주와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친척들과 이웃들에게 미리 알아서 구제의 손길을 펼치는 자세가 유별났던 것이다.92)

 

최인주는 유언의 하나로 서로 무엇을 줄 때 거저 주어라고 강조하였다.93) 이러한 측면은 최경환 성인에게서도 쉽게 찾아진다. 떡과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한번은 시장에서 떡 장수 노파가 떡판을 엎지르고 앉아 울며 “이 떡을 팔아야 어린 자식과 생명을 보존할 터인데, 이 지경이 되었다”고 하자 값을 다 물어주었다.94) 떡 이야기는 다른 방식으로 또한 전해준다. 한 노파가 길에서 쉰 떡을 팔지 못하여 애를 쓰자 그가 먹을 수 없는 것을 사주기도 하였다.95) 그와 비슷한 내용으로 그는 장을 보러 갈 때에도 물건 중에서 제일 나쁜 것이나 흠 있는 것을 골라서 샀다.96)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나무라는 사람들에게 “제일 나쁜 물건을 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런 사람이 없으면 이 불쌍한 장사꾼들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소?”하고 대답하였다.

 

최경환 성인의 애긍은 거의 대부분의 재산을 버리고 산 속의 교우촌으로 들어간 이후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가산을 버리고 산중으로 들어와 처자와 한가지로 독실하게 수계하고 먹는 것과 입는 것을 박하게 하면서 애긍에 힘썼던 것이다.97) 이것은 달레에 의하면 자기도 가난하면서 다른 이웃에게 애긍을 베푼 것을 말해준 다.98) 그는 절약을 통하여 동냥을 주는 것을 좋아했으며, 자기가 입고 있던 옷들을 옷이 없는 사람들에게 여러 번 주었다.99) 사람을 극진히 사랑하여 혹 구차한 교우가 오면 음식을 예비하여 대접하였다.100) 흉년이 되면 최경환은 주변에 사는 가난한 이들을 백방으로 도와주었다. 과일을 추수할 때가 되면 가장 좋은 것을 골라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101). 특히 자기를 잡으러 온 포졸들에게도 아침밥을 후하게 대접하였으며, 포졸 가운데 한 사람이 헐벗은 것을 보고 옷 한 벌을 주어 입게 하여 그를 감격시킨 것도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다.102)

 

최경환 성인의 애덕 가운데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것은 순교자의 시신을 매장해주었다는 점이다.103)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불쌍한 교우들을 구원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던 최경환은 서울에서 많은 순교자들의 시체가 유기되자 남다른 애덕을 실천하였던 것이다. 신자들이 박해와 기근으로 굶주림에 시달리고 지쳐서 순교자들의 시체를 수습하고 매장할 겨를이 없게 되자 그는 자기 마을에서 신자들을 권고하여 의연금을 거두고 그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많은 순교자들의 시체를 찾아 매장하였던 것이다. 이는 이후 신자들이 순교자의 시신을 목숨을 던져 구하는 일로 이어졌다.

 

이러한 애덕의 실천은 최경환 성인에게는 물질적인 것에만 그친 것은 아니었다. 정신적인 부분에도 미쳤다.104) 체포되어 끌려가면서 많은 모욕을 당하게 되자 그는 신자들에게 큰 목소리로 외쳤다. “형제들이여, 용기를 냅시다. 이 정도의 여행을 힘겨운 고난으로 여기지 맙시다.” 이것은 그의 열렬한 애덕에서 나온 격려의 소리였다. 신자들에게 그러한 고난은 고난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최경환 성인이 보여준 애덕의 실천은 그로 하여금 모든 사람의 신뢰와 존경을 받게 하였었다. 천주이신 스승의 영광을 위한 열정은 이웃에 대한 정다운 애덕과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애덕이 이웃으로 하여금 신앙의 열심을 일으키게 하였지만, 분명 그것을 넘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비신자와 신자의, 가난하고 부유한, 배우고 무식한 사람들의 차별이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최경환의 애덕은 더욱 자라나면서 재난의 시기에 영웅적인 것이 될 것이라고 달레는 보았다.105) 이제 이것은 순교와 연결되었다.

 

 

Ⅳ. 배교의 흐름을 거스른 순교

 

최경환 성인은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 때 순교하였다. 그는 모진 형벌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잃지 않고 옥사함으로써 35세의 나이로 순교에 이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최경환 성인에 대해서 그가 일찍부터 순교에 대한 원의를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106) 평시에도 마음에 그윽하게 치명원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체포되어 길을 걸어갈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장을 서서 십자가를 지시고 갈바리아 산으로 올라가시는 것을 생각합시다.”고 한 말에서도 그의 지향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체포되었을 때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이성례를 통해서도 이미 그가 이곳저곳의 교우촌으로 옮겨 다니면서 십자가의 길을 생각한 것을 살필 수 있다. 그렇다면 그에게 십자가의 길이 말해주는 최종적인 종착지는 순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그러했을 수 있다. 그동안 충분히 순교를 보았고, 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같이 최경환 성인이 오랫동안 순교를 생각하고 있었다면 박해를 피해서 왜 여러 차례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는 물음이 따르게 된다. 왜 그때에는 순교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이미 살핀 것처럼 그의 이주 이유는 대체로 신앙생활을 유지하고, 더 성숙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한편으로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부평 지역에서 수리산 지역으로 옮겨온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므로 순교를 직접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최경환이 수리산에 정착한 이후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사실 기해박해가 일어나면서 최경환 성인은 그 이전과는 다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피난을 가는 것과는 달리 그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이나 수리산 지역으로까지 천주교 신자에 대한 체포가 이루어지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의 이주를 그만두고, 수리산에 그대로 머물면서 순교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순교자들의 시신을 매장한 다음 집으로 돌아온 최경환은 자기 마을 신자들에게 순교를 준비시킬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였다.107) 이에 날마다 자기 마을의 신자들을 모아 놓고 열성적인 말로 격려하면서 용감히 순교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따라서 포졸들이 그를 체포하러 오자, 왜 이렇게 늦게 왔는가 하고 말하면서 그가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음을 강조한다. 그것은 그 이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만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최경환 성인에게 이제 순교의 때가 왔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순교 역시 그에게 새로운 떠남이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제 죽음을 통해서 영원한 본향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순교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가 수리산 공소에서 이와 같이 순교를 결심하고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우선은 그가 공소 지도자인 회장직에 머물렀던 사실과 관련해서 생각할 수 있다. 회장은 신앙에 있어서 교우촌 신자들에게 모범을 보인 인물이 임명되었다.108) 사실 그는 여러 부분에서 충분히 많은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신자들이 체포되고 배교하고 순교하는 가운데에서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 그가 어떠한 입장을 취하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첫째 아들인 최양업 신부의 신학교 입학과도 관련시켜 생각해볼 수 있다. 그가 앞으로 사제가 된다는 것은 당시의 현실을 고려할 때 바로 순교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학생을 둔 아버지로서 더 이상 박해를 피해 다닌다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이러한 사실 이외에 당시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와 관련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모방 신부의 선교와 관련해서 이해할 수 있다. 모방 신부가 보여준 선교의 특징은 이미 잘 지적되고 있듯이 그가 순교를 무서워하기보다 오히려 순교를 부추기는 선교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이다.109) 그것은 그 이전에 들어온 중국인 여항덕 신부의 선교방법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는 조선인들의 문화와 풍습을 고려하는 적응주의적 선교방법을 취했다. 즉 조선의 선교는 유럽인도, 심지어 중국인도 안 되며 오직 조선인들에 의해서만 선교가 가능하다고 강조하였다.

 

모방 신부의 순교에 대한 태도는 현재 자세히 살필 수 없지만 그 단면을 엿볼 수 있다. 1839년에 들어와서 이곳저곳에서 박해소식을 듣게 되자 앵베르 주교의 피신이 논의되었다. 이때 앵베르 주교는 신부들을 바다로 통해 중국으로 다시 보내고 자신이 혼자 박해의 희생이 되려고 하였다.110) 그러나 다른 두 신부들은 그러한 견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므로 모방 신부 역시 조선에서 순교를 할 결심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순교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던 모방 신부는 그것을 신자들에게도 강조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신학생이 되는 아들 최양업을 통해서 모방 신부를 이미 만났고, 그에 의해 회장이 된 최경환 역시 순교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게 되었을 것이다.

 

당시 교회의 지도자가 신자들의 순교를 강조하였을 가능성은 달레의 말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1839년 초에는 조선 성교회에 좋은 세월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중략) 그러나 이 역사의 어디서나 뇌여야 하였고, 되 뇌여야 할 것은 신앙의 나무가 외교지방에 뿌리박기 위해서는 피를 흘려야만 하고, 이 나무가 자라면 자랄수록 더 많은 피가 그 뿌리 위해 흘러야 한다는 것이다. 1839년에 천주께서 조선에 대한 그 신비스러운 자비의 의도로 신자들이 얼마 전부터 의지하던 유일한 인물을 물리치시니, 그 전보다도 더 격심한 박해가 다시 일어났다.111)

 

조선의 천주교회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서울의 신입교우들은 1,000명을 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조선의 교회는 신유박해 이후 약 30여 년 동안 가까운 시간의 고난을 겪으면서 새로이 재생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에 모방 신부가 도착하였을 때 6,000명이었던 신자 수는 1838년 말에는 9,000명으로 증가하였다.112) 이밖의 다른 요소들도 새로운 변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달레의 표현을 빈다면 더 많은 피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것은 배교와 관련된 문제였다. 신유박해 이래로 크고 작은 박해를 겪으면서 배교의 문제가 심각한 것으로 부각되었다. 1827년의 상황이었다.113) 전에 있었던 박해와 뒤에 있을 박해들과 1827년의 박해가 또 다른 점은 슬프게도 배교자의 숫자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여항덕 신부의 경우 주문모 신부와 달리 신자에게 세례를 줄 때 예비자의 인적 상황과 자세에 대해 상당히 조사하고 고려를 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114) 박해의 주된 원인이 밀고자나 배교자들의 밀고에 의해서 야기되었기 때문이다. 기해박해가 김순성 등의 대표적인 밀고자에 의해서 주교나, 신부, 정하상, 최경환 등이 체포된 사실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앵베로 주교의 배교자에 대한 사목까지 나오게 되었다.

 

1838년 12월 20일에서 이듬해 1월 30일까지 앵베르 주교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시골의 신자들을 순회하였다. 모방 신부는 그때에 이웃 도에 있었고, 샤스탕 신부는 남쪽 지방 신자들에게 가 있었다. 가장 곤란한 일의 하나는 상당수의 배교한 신자들에게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취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 불행한 사람들을 너무 엄혹하게 물리쳐도 안 되었지만,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나 다른 신자들의 이익을 위해서나 그들의 죄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깨닫게 할 필요가 있었다.115)

 

비록 조선정부의 박해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배교는 널리 퍼져 있었다. 이에 앵베르 주교는 조선에 들어오자마자 배교자에 대한 사목을 실시하게 되었다.116) 그러므로 이러한 사정은 수리산 공소의 회장인 최경환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누군가 올바른 신앙의 모범을 보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박해를 받을 때 순교에 대한 독려가 나온 것이 아닐까 한다.

 

이때 최경환의 순교자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주목된다. 순교자의 시신을 거두고 매장한 것은 그의 순교자 공경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최경환의 활동은 당시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 이전에 어떠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좋은 표양이 된 것임은 분명하다. 이후 그는 순교를 가족들에게 역설하고, 스스로도 순교를 그대로 실천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해박해 당시 최경환의 순교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40여명이 넘는 신자들이 최경환 성인과 함께 갔지만, 모두 끝까지 항구하지는 못하였다. 최경환 부부를 포함하여 3 사람만 남게 되었다. 최경환은 여러 사람들이 배교하는 것을 보고 마음에 원통하여 아무 말도 없이 머리를 숙이고 묵묵히 앉아 오래도록 슬픈 생각을 견디지 못하였다.117) 그리고 그는 원통하여 슬피 울며 “수리산 모든 교우가 다 이렇게 배주하니 참혹하지 아니하냐?”고 하면서 한탄하였다. 그러나 최경환은 40일 이상 지극히 혹독한 고문을 헤아릴 수 없이 계속해서 당하였으나 요지부동의 항구한 마음으로 견뎌내었다.118) 배교에 대한 유혹을 극복했던 것이다. 천주는 천지만물의 대주재자이기 때문에 결단코 배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죽을 시간을 미리 예언한 대로 순교하였다.

 

그러므로 최경환 성인의 순교는 당시의 신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달레는 최경환 성인의 죽음에 대해 그 많은 괴로움 가운데에서도 온화함과 조용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그를 떼어 놓으려는 사탄의 앞잡이들에게 도전하는 듯하였음을 말하고 있다.119) 그래서 고문자들은 그에게 ‘바윗덩어리’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120) 따라서 그의 순교는 당시 만연하던 배교의 흐름을 거스르는 중요한 한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자들에게 순교라는 것이 여전히 신앙의 보존과, 더 나아가 천주교의 확산에 여전히 의미가 있다는 일깨움을 던져 준 것이었다.

 

 

Ⅴ. 맺음말

 

지금까지 최경환 성인의 천주신앙과 순교에 대해서 검토하였다. 그는 짧은 생애 동안 예수님이 강조한 가장 큰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며 무엇보다 하느님과 함께 하고자 노력한 인물이었다. 또한 그의 가난하고 겸손한 삶은 이웃을 위한 자기희생으로 이어져 이를 기쁘게 실천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천주신앙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그것이 서로 결합하여 그가 순교할 때 중요한 신앙적 기반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앞으로 본격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몇 가지 과제들을 지적함으로써 맺음말에 대신하고자 한다.

 

먼저 최경환 성인의 선조들이 천주교 신앙을 어떻게 수용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들의 활동은 어떠하였는가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인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이 글에서도 간간히 비추었지만, 최경환의 선조들의 가계 및 활동에 대한 자료가 우선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조상들의 생몰 연대와 활동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사실도 그러하지만, 최경환의 가문이 내포지역이냐, 아니면 서울지역의 어느 곳에서 출발하였느냐는 첫 부분에 대한 설명부터 너무 막연한 상태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게 된 배경에는 기존의 연구가 최양업 신부에 너무 치중하다보니 최경환 성인을 비롯해서 다른 인물들에 대한 기초적인 연구를 소홀히 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따라서 앞으로 조금은 더 의식적으로 이들 인물들을 개별적으로 구체적으로 분석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지적하고 싶은 사실은 조선후기 천주교회사 연구를 수행하면서 순교자들에게 나타난 여러 현상들을 너무 일반적인 상황, 다시 말하면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이해하는 것은 역시 문제가 있는 점이다. 한국 순교 성인들 중 고향을 떠나지 않은 분들이 거의 없기 때문에 여러 번의 이주가 최경환 성인의 한 특징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그러하다. 이러한 견해는 한 마디로 비역사적인 이해라고 할 수 있다. 분명 최경환 성인의 경우 가문의 냉담에서 자발적으로 이주를 선택한 부분에서 그것은 다른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한 개인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이해 없이 무차별적으로 이들은 집단으로 묶어서 일반화시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한국천주교회사연구가 인물 연구를 어떻게 하면 역사적으로 깊이 있게 다룰 수 있는가의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한다.

 

순교와 배교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사연구에서 여전히 순교의 문제만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도 초점을 맞추었지만, 순교사를 어떻게 하면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인 고민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순교사 연구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만 매달려 외형적인 결과로서의 순교만을 계속적으로 강조한다는 것은 교회사연구의 수준을 높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배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천주교 신자들이 배교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해서 배교를 하였으며, 이들의 고민은 무엇이었는가, 교회는 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에 대해서 보다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배교를 넘어서 순교로 향한 신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연구는 배교를 통해서 순교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조선후기 천주교회사 연구는 연구방법과 주제에 대한 새로운 고민과 함께, 더욱 치열한 노력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1. 원사료 및 사료번역본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 한국교회사연구소 영인본(2004년)

《조선 주요순교자 약전(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ee)》(다블뤼 주교)

〈최 바시리오 이력서〉 《순교자와 증거자들》,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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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레 저, 최석우 · 안응렬 역, 《한국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2. 연구논저

 

김수태, 〈초기 한국천주교회의 배교문제〉 《동양학》 29, 1999.

김승혜, 〈칠극에 대한 연구〉 《칠극》(판토하 저, 박유리 역), 일조각,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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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재연, 〈페레올 주교의 조선 입국 후 사목활동〉 《교회사학》 5, 수원교회사연구소, 2008

전수홍, 〈유방제 신부의 조선 선교와 그 문제점〉 《역사와 사회》, 1997,

차기진, 〈예산 여사울과 내포의 사도 이존창〉 《한국사회와 천주교》, 흐 름, 2007

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선교활동의 배경〉 《최양업 신부의 선교활동과 천주가사》, 양업교회사연구소, 2003

홍연주, 〈기해 박해(1839) 관련 자료 연구〉, 이화여대 석사학위논문, 2004

 

…………………………………………………………………

 

1) 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선교활동의 배경〉 《최양업 신부의 선교활동과 천주가사》, 2003 및 방상근, 〈수리산 공소와 최양업 신부〉 《한국사회와 천주교》, 2007.

 

2) 차기진, 앞의 논문, pp.26~27.

3) 샤를르 달레, 최석우 · 안응렬 역, 《한국천주교회사》 중, 1980, p.431.

 

4) 그가 일반적으로 파악하고 있듯이 3형제의 막내(차기진, 앞의 논문, p.20)인지, 아니면 6

남매(달레, 위의 책, p.429)인지 혹은 7남매(배티 성지 사적연구소 편, 〈여덟 번째 서한〉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1996 이하 〈여덟 번째 편지〉로 줄인다) 의 막내인 지에 대해서도 논의가 필요하다.

 

5) 〈여덟 번째 서한〉, pp.155~156.

 

6) 〈여덟 번째 서한〉, pp.157~159. 이에 대해서 이원순은 한문교리서를 읽을 수 있을 정도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최경환 성인과 수리산 성지》, 2009, 학술회의의 토론).

 

7) 차기진, 〈예산 여사울과 내포의 사도 이존창〉 《한국사회와 천주교》, 2007, p.65.

8)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최 바시리오 이력서〉 《순교자와 증거자들》, 1982, p.120.

9) 김승혜, 〈칠극에 대한 연구〉, 박유리 역, 《칠극》, 1998.

10)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 회차 101 최 베드로 증언(이하 회차로 줄인다) 및 〈최 바시리오 이력서〉, p.214.

11) 〈여덟 번째 서한〉, p.159.

12) 다블뤼, 《주요 순교자약전》, pp.26~28.

 

13) 회차 101, 최 베드로 증언 및 〈최 바시리오 이력서〉, p.216. 여기에서의 성경은 오늘날의 성경을 그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당시의 표현을 따른다면 〈복음성경〉 혹은 《성경직해광익》을 의미한다.

 

14) 〈여덟 번째 서한〉, pp.157~159.

15) 〈여덟 번째 서한〉, p.173 및 달레, 앞의 책, p.435.

16) 〈여덟 번째 서한〉, p.159.

17) 〈여덟 번째 서한〉, p.159.

18) 《최 바실리오 이력서〉, p.212.

19) 회차 97, 이 베드로 증언.

20) 회차 102, 이 마리아 증언.

21) 회차 101, 최 베드로 증언.

22) 〈여덟 번째 서한〉, p.159.

23) 〈여덟 번째 서한〉, p.159.

24) 〈여덟 번째 서한〉, pp.167~169.

25) 〈여덟 번째 편지〉, p.159 및 회차 101, 최 베드로 증언.

26) 〈최 바시리오 이력서〉, p.214 및 회차 102, 이 마리아 증언.

27) 달레, 앞의 책, p.431.

28) 회차 101, 최 베드로 증언.

29) 〈여덟 번째 서한〉, p.155.

30) 달레, 앞의 책, p.17.

 

31) 〈여덟 번째 편지〉, p.157. 다락골 출신인 최봉한이 대구에서 1825년 을해박해로 순교하는 일이 발생하였는데(달레, 앞의 책, p.55), 이것이 어느 정도의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32) 〈최 바시리오 이력서〉, p.121.

 

33) 방상근은 앞의 논문에서 1824년부터 1827년으로 파악하였는데, 차기진은 더 구체적으로 1827년을 한정시켰다(〈최경환〉 《한국가톨릭대사전》 11, 2006, p.8218).

 

34) 〈여덟 번째 서한〉, p.157.

35) 회차 101, 최 베드로 증언.

36) 회차 97, 이 베드로 증언.

37) 〈최 바시리오 이력서〉, p.212.

38) 방상근, 〈마포지역의 가톨릭 성장사〉 《교회사연구》 20, 2003에서는 공덕리로 파악하고 있다.

39) 방상근, 〈수리산 공소와 최양업 신부〉를 참고할 것.

40) 〈여덟 번째 서한〉, p.157.

 

41) 〈여덟 번째 서한〉, pp.157~159. 최경환이 청양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강원도로 이동한 경로에 대해서는 현재 자세하게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서울에서 정착한 지역이 공덕리라고 한다면 청양에서 해로를 이용해서 마포의 공덕리로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공덕리에서 김성 지역으로 옮겨갔을 때도 역시 한강의 수로를 이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자세한 검토가 필요하다.

 

42) 방상근, 앞의 논문, p.124. 김성에서 현석문? 현경련 남매와 이웃해 살았다(회차 99, 최 베드로 증언).

 

43) 회차 97, 이 베드로 증언. 민극가의 경우에는 김성에서 함께 살다가 부평으로 옮겨와서 최경환의 집에 기거하였다(회차 100, 최 베드로 증언).

 

44) 현석문 집안은 강원도 김성에서 살다가 서울로 옮겨왔다(회차 99, 최 베드로 증언).

45) 방상근, 앞의 논문, pp.118~119. 당시 김대건 가문은 경기도 남부지역에 머물고 있었다.

46) 회차 97, 이 베드로 증언. 47) 회차 101, 최 베드로 증언. 48) 방상근, 앞의 논문, p.119 및 pp.124~125.

49) 〈최 바시리오 이력서〉, p.213.

50) 회차 99, 최 베드로 증언.

 

51) 방상근, 앞의 논문, p.125. 이 에메렌시아의 오빠인 이순빈이 수리산에 살고 있었는데, 이순빈과 최경환이 서울에 살 때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이국빈과는 어떤 사이인지 역시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52) 여기에 대해서 앵베르 주교는 그를 ‘이정’(里正 마을 이장)으로도 표현하고 있다(《한국천주교회사》 중, p.429). 이에 대해서 당시 회장은 종교와 생업에 대한 경제적인 방책까지도 마련해야만 했기에 촌장 이상의 역할과 교회의 회장직을 함께 수행한 것으로 이해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보다 자세한 검토가 필요하다.

 

53) 1840년대 중국을 왕래했던 조선 교회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김 프란치스코가 서울에서 수리산으로 내려와 최경환을 보기도 하고, 서울에서도 최경환을 많이 보았다고 한다(회차 80, 김 프란치스코 증언)

 

54) 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선교활동의 배경〉, p.26. 

55) 〈여덟 번째 서한〉, p.155.

56) 〈최 바시리오 이력서〉, p.212.

57) 회차 101, 김 프란치스코 증언.

58) 〈최 바시리오 이력서〉, pp.212~213.

59) 〈최 바시리오 이력서〉, p.213.

60) 다블뤼, 《주요 순교자약전》, pp.26~28.

61) 달레, 앞의 책, p.430.

62) 회차 97, 이 베드로 증언.

63) 회차 101, 최 베드로 증언.

64) 〈최 바시리오 이력서〉, pp.213~214.

65) 〈여덟 번째 서한〉, p.159.

66) 회차 97, 이 베드로 증언.

67) 다블뤼, 《주요 순교자약전》, pp.26~28.

68) 〈여덟 번째 서한, p.175.

69) 달레, 앞의 책, p.434.

70) 〈여덟 번째 서한〉, pp.159~161 및 〈최 바시리오 이력서〉, p.214.

71) 회차 101, 최 베드로 증언.

72) 〈최 바시리오 이력서〉, p.214.

73) 〈최 바시리오 이력서〉, p.210.

74) 회차 101, 최 베드로 증언.

75) 〈여덟 번째 서한〉, p.159.

76) 〈여덟 번째 서한〉, p.173.

77) 〈여덟 번째 서한〉, p.155.

78) 〈최 바시리오 이력서〉, p.124 및 회차 101, 최 베드로 증언.

79) 〈여덟 번째 서한〉, p.161.

80) 〈여덟 번째 서한〉, p.155.

81) 〈최 바시리오 이력서〉, p.210.

82) 회차 97, 이 베드로 증언.

83) 방상근, 〈조선 후기 천주교회의 신분관〉 《19세기 중반 한국천주교회사》, 2006, p.232.

84) 다블뤼, 《주요 순교자약전》, pp.26~28.

 

85) 원재연, 〈페레올 주교의 조선 입국 후 사목활동〉 《교회사학》 5, 2008, p.142. 김대건 신부와는 다른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86) 차기진, 앞의 논문, pp.37~38 및 방상근, 앞의 논문, p.235.

87) 〈여덟 번째 서한〉, p.161.

88) 차기진, 〈예산 여사울과 내포의 사도 이존창〉 《한국사회와 천주교》, p.65.

89) 〈여덟 번째 서한〉, pp.163~165.

90) 홍연주, 〈기해 박해(1839) 관련 자료 연구〉, 이화여대 석사학위논문, 2004, pp.48~49.

91) 회차 101, 최 베드로 증언.

92) 〈여덟 번째 서한〉, p.155.

93) 〈여덟 번째 서한〉, p.155.

94) 〈최 바시리오 이력서〉, p.214.

95) 회차 27, 김 막달레나 증언 및 회차 42, 유 바르바라 증언.

96) 〈여덟 번째 서한〉, p.159.

97) 회차 102, 이 마리아 증언.

98) 달레, 앞의 책, p.430.

99) 다블뤼, 《주요 순교자약전》, pp.26~28.

100) 회차 42, 유 바르바라 증언.

101) 〈여덟 번째 서한〉, p.161.

102) 회차 101, 최 베드로 증언.

103) 〈여덟 번째 서한〉, pp.161~163.

104) 〈여덟 번째 서한〉, p.165.

105) 달레, 앞의 책, p.431.

106) 〈최 바시리오 이력서〉, p.216.

107) 〈여덟 번째 서한〉, pp.161~163.

108) 모방 신부는 마을에서 가장 능력있고, 학식 있는 교우를 회장으로 삼았다(달레, 앞의 책, p.335).

109) 전수홍, 〈유방제 신부의 조선 선교와 그 문제점〉 《역사와 사회》, 1997, pp.102~103.

110) 달레, 앞의 책, p.429 및 〈모방신부의 마지막 편지〉를 참고할 것.

111) 달레, 앞의 책, p.385.

112) 달레, 위의 책, p.377.

113) 달레, 위의 책, p.184.

114) 전수홍, 앞의 논문, p.103.

115) 달레, 앞의 책, pp.381~382.

116) 김수태, 〈초기 한국천주교회의 배교문제〉 《동양학》 29, 1999.

117) 회차 102, 이 마리아 증언.

118) 〈여덟 번째 서한〉, pp.167~169.

119) 달레, 앞의 책, p.447.

120) 〈여덟 번째 서한〉, p.169. 이것은 조신철에게도 해당된다.

 

[학술지 교회사학 vol 6, 2009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수태(충남대 국사학과 교수)]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115669&Page=17&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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