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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하비에르(12.3)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2.3)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인쇄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Francis Xavier)
축일 12월 3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선교사
활동지역
활동연도 1506-1552년
같은이름 방지거, 사베리오, 사베리우스, 사비에르,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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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16세기 - 다시 꽃 핀 선교 영성(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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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5-21 조회수2954 추천수0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75) 16세기 ④ 다시 꽃 핀 선교 영성


성령의 바람 타고 뱃길 따라 뿌려진 복음의 씨앗

 

 

16세기 선교 보호권을 앞세운 식민지 정복 사업은 비복음적 측면도 있었지만 열정적 선교를 통한 영성생활을 실천하는 계기가 됐다. 그림은 선교의 수호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선교 경로.

 

 

이탈리아 제노바(Genova) 출신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가 1492년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자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정치, 경제적인 이유를 앞세우며 식민지 건설에 혈안이 됐습니다. 그러면서 유럽 서방 교회는 다시 한 번 전 세계를 복음화하려는 선교 사명을 재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에게 주어진 선교 보호권

 

콜럼버스는 포르투갈의 왕 주앙 2세(Joo II, 재위 1481~1495)에게 동양으로 가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는 서쪽 항로를 개척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동양으로 가는 동쪽 항로를 개척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포르투갈 왕은 콜럼버스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콜럼버스는 스페인의 공동 왕 아라곤의 페르난도(Fernando II de Aragn, 1452~1516)와 카스티야의 이사벨(Isabel I de Castilla, 1451~1504)에게 자신의 계획을 제안했고, 스페인 공동 왕은 콜럼버스에게 탐험을 지원하기로 약속했습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자, 스페인의 공동 왕은 교황 알렉산데르 6세(Alexander PP. VI, 재임 1492~1503)에게 새로 발견한 신대륙을 스페인 왕국의 영토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고, 교황은 1493년 칙서 「다른 것들 사이에(Inter Caetera)」를 반포해 신대륙에 대한 스페인의 소유권을 부여했습니다.

 

하지만 신대륙 발견 이후 뒤늦게 개척에 나선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유럽 이외의 지역에 대한 영토 분쟁을 벌였고,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중재에 나서서 스페인 토르데시야스(Tordesillas)에서 두 왕국 사이에 조약을 맺어 주었습니다. 이 조약에 따르면 교황은 포르투갈에게 브라질 및 대서양 동쪽에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식민지로 개척해 보호할 권리를, 스페인에게 대서양 서쪽에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개척해 보호할 권리인 ‘보호권’(保護權, padroado)을 부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앞으로 정복할 지역에서 교구를 설립하고 주교 임명을 요청할 수 있는 교회 업무에 대한 권한을 갖게 되었습니다.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Iulius PP. II, 재임 1503~1513)는 칙서 「평화를 위해 말한 것(Ea Qquae pro Bono Pacis)」을 통해 이 조약을 승인했습니다.

 

포르투갈 남서부 시네스(Sines) 출신인 탐험가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 1460/69~1524)는 1497년 리스본(Lisbon)을 출발해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서 1498년 인도 서남부 캘리컷(Calicut)에 도달하며 인도 항로를 개척했습니다. 1510년 포르투갈은 인도 서부 연안에 고아(Goa)를 점령하고 식민지화했습니다. 한편 포르투갈 사브로자(Sabrosa) 출신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 1480~1521)은 스페인 왕의 후원으로 1519년 서쪽 항로로 말루쿠 제도를 향해 출항했습니다. 1521년 마젤란은 괌(Guam)을 경유해 필리핀에 도착했으며, 반대 방향에서 말루쿠 제도를 방문함으로써 사실상 세계 일주를 완성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에 마젤란이 필리핀 섬에서 전사하자, 일행이었던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Juan Sebastin Elcano, 1486~1526)는 남은 일행과 함께 계속 서쪽으로 항해해 1522년 스페인으로 돌아옴으로써 단일한 항해로 세계 일주를 완성했습니다.

 

엘카노가 세계 일주를 마치고 귀국하자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이미 발효된 선교 보호권을 근거로 태평양에서 주도권 경쟁을 벌였습니다. 두 왕국은 스페인 사라고사(Zaragoza)에서 조약을 맺고 스페인은 필리핀과 호주에 대한 보호권을 갖는 대신에 포르투갈은 나머지 아시아 국가에 보호권을 갖기로 했습니다. 결국 이 조약을 근거로 해서 포르투갈은 1542년 일본을 방문하고 1557년 마카오를 식민지화했으며, 스페인은 1571년 마닐라를 식민지화했습니다.

 

 

선교의 수호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6세기 선교 보호권 시절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선교사는 1927년 교황 비오 11세(Pius PP. XI, 재임 1922~1939)가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 1506~1552)입니다. 오늘날 스페인 바스크 지역인 나바라(Navarra) 왕국 하비에르 성에서 태어난 프란치스코는 1528년 파리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1534년 파리 북쪽 몽마르트에 위치한 성당에서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cio de Loyola, 1491~1556)와 함께 예수회원으로 첫 서원을 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1537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사제품을 받고, 1540년 첫 번째 예수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향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교황 바오로 3세(Paulus PP. III, 재임 1534~1549)에게 인도의 교황대사 자격을 받고 1541년 리스본을 떠나, 1542년 인도 고아에 도착해 선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1545년부터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뉴기니 및 필리핀 인접 지역에서도 선교 활동을 했으며, 1549년부터 1551년까지 일본을 왕래하면서 선교 활동을 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두 동료 예수회원과 함께 1549년 가을 규슈 지역 가고시마에 도착해 3년 가까이 선교했습니다. 유럽 선교사들은 프란치스코가 전한 새로운 선교지에 대한 정보와 새로운 선교 방식에 고무돼 순교를 마다치 않고 일본 선교에 나섰습니다.

 

한편 프란치스코는 1552년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할 계획을 세우고 광둥성 지역이 보이는 상천섬에서 명나라 황제의 입국 허가를 기다리다가 풍토병에 걸려 결국 중국 대륙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사망한 이듬해인 1553년 포르투갈 선박이 풍랑에 젖은 화물을 말리겠다고 마카오에 정박하면서 중국이 문호를 개방할 때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결국 1557년 포르투갈은 명나라로부터 마카오 지역을 빌려 정착촌을 설립했고, 마카오에 정착한 유럽 사람들을 위한 성당도 설립했습니다. 따라서 마카오를 전초기지 삼아 중국 본토 선교 계획을 세웠습니다.

 

1582년 마카오에 도착한 예수회원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는 중국 본토 선교 계획을 세웠습니다. 1583년 명나라의 허가를 받고 광둥성 지역 조경(Zhaoqing)에 정착하면서, 근세 들어 중국 본토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한 첫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마테오 리치는 1601년 베이징으로 거주지를 옮겨 선교 활동을 하다가 1610년 베이징에서 사망해 그곳에 묻혔습니다. 오늘날 광둥성 지역 해안가에 위치한 홍콩에 프란치스코의 유해 일부를 모신 기념 성당이 세워졌고, 인접한 마카오에도 그를 기억하는 기념 성당이 세워졌습니다. 물론 프란치스코의 유해는 그가 아시아 지역에 처음 도착한 인도 고아에 세워진 기념 성당에 안치되었습니다.

 

16세기 선교 보호권을 앞세워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실시한 식민지 정복 사업은 비(非)복음적인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부정적인 기회를 통해서도 복음의 씨앗이 퍼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영성생활의 한 방법으로 선교 열정을 실천했듯이, 근세 그리스도인들도 다시 한 번 죽음도 마다치 않으면서 험난한 상황을 극복하며 열정적인 선교를 통해 영성생활을 실천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5월 20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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