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자료실

구분 성인명     축일 신분 지역명 검색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2.3)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2.3)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인쇄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Francis Xavier)
축일 12월 3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선교사
활동지역
활동연도 1506-1552년
같은이름 방지거, 사베리오, 사베리우스, 사비에르,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주보성인과 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전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신앙의 수호자 사도 산티아고의 무덤과 까미노(카미노)의 탄생
다음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무로부터의 창조와 세계의 영원성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12-13 조회수1091 추천수0

[주보성인과 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저는 방지거 사베리오입니다

 

저는 유아영세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릴 적에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저의 주보성인은 ‘방지거 사베리오’라고 소개하곤 하였습니다. 방지거 사베리오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이라는 것은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습니다.

 

피정이나 교육을 갈 때마다 내 세례명이 너무 길어서 명찰 만들기 어려우니 줄여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그래서 나는 앞의 방지거만 따서 내 세례명을 방지거로 소개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로 오해를 받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 축일인 10월 4일에 축하인사를 받기도 합니다.

 

주변에서 제 세례명을 방지거라고 하면 방씨냐고 하는 질문을 반드시 합니다. 성당에 방씨인 신자들과 같은 방씨라고 친근감을 표현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방지거’라는 말은 중국에서 ‘프란치스코’라는 말에서 음차된 것 같습니다. 중국을 통해서 천주교를 받아들이다 보니 그때의 한자식 세례명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Franciscus, Francisco를 중국 사람들은 방지거(方濟角)라고 쓰고 “fran”은 [方], “sis”는 [濟], “cus/so”가 [角]의 중국식 발음을 사용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냥 한자음 방지거로 읽은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생애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06년 스페인 나바라 주의 하비에르 성에서 성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파리 생트 바르브 대학에서 공부하고 거기서 이냐시오 성인을 만나 예수회 창립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1540년에 예수회원으로서는 첫 번째 선교사로 임명되어 인도와 극동지역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특히 그는 일본에 온 최초의 신부이기도 합니다. ‘인도의 사도’, ‘일본의 사도’라고 하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49년 9월 29일 다이묘 시마즈 다카히사의 초대로 그의 성에 갔는데,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일행이 이곳에서 다카히사에게 화승총을 선물했더니 다이묘가 전도를 허용하는 것은 물론 종교의 자유도 인정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복음을 전할 때 열심히 기도하고 참회하는 모범을 보였으며 뛰어난 설교로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고 변화시켰습니다. 중국 선교를 결심하고 중국 내지로 진출하려던 그는 병을 얻어 1552년 중국 광동 근처에서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고 그의 유해는 인도의 고아에 안장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교사’라고 불리는 그가, 개종시킨 사람이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합니다. ‘인도와 일본의 사도’로 162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5세가 그를 시성하였으며,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선교활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습니다. 교회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소화 데레사 성녀와 함께 ‘포교의 선교자’로 선포하고 12월 3일을 대축일로 지냅니다.

 

말라카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상.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과의 만남

 

살아오면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과 가까이 만나는 세 번의 인연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1994년 말레이시아 파견 근무 시절에 휴가를 내어 말라카로 휴가를 간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 포르투갈 유적지인 성당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구경 중에 성당 뒷마당에 하얀 조각상이 있었는데 가까이 가보니 바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이었습니다. 전율했던 것은 그 성인의 오른손 팔목이 잘려져 있는 겁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이 인도에서 돌아가셨을 때 시신이 썩지 않아 신자들이 이를 로마 교황청이 보고하였으나 로마 교황청이 이를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증거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의 팔목을 잘라서 로마 교황청에 보냈고 그로 인해 성인으로 시성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그래서 성인의 유해는 오른손 손목이 없는데 마침 그 동상에도 손목이 없는 겁니다. 기적이라고 보면 그렇게 믿을 수도 있지만 자연현상으로도 볼 수 있지요. 옛날 바다 조가비로 만들어진 성인의 조각상이 공교롭게도 오른쪽 손목이 부식되어 없어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참 이상한 자연현상이지요?

 

두 번째 만남은 일본 나가사키 성지순례 갔을 때의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은 인도의 고아를 거쳐 1549~1551년 일본에서 선교를 했고 히라도에 세 번이나 방문한 것을 기념하여 하비에르 상을 세우고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기념성당’이라고 칭했다고 합니다. 당시 우리 성지순례 일행 중 세례명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인 이홍기 형제님이 있어 함께 성인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기억이 납니다.

 

세 번째 만남은 최근이었는데, 2019년 9월 7일(토) 오후 한국교회사연구소 제201회 연구발표회에 참석한 일입니다. 제1 주제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프로젝트 ‘동아시아 선교’와 적응주의의 탄생”이었고 최영균 신부님(수원교구 호계동성당)과 신주현 신부님(한국교회사연구소)의 주제 발표를 들으면서 참으로 의미 있는 연구들을 하시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제 수호 성인이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과의 깊은 인연을 되새겼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을 닮아가는 나

 

제가 퇴직을 앞두고 크게 아픈 적이 있었는데 집사람을 비롯한 친지들의 기도와 “아들과 함께 한 아이슬란드로의 힐링 여행”으로 극적으로 회복된 이후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지하며 매일미사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매일미사를 드리면서 미사가 끝난 후 묵상을 하는데 오늘의 복음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서 복음묵상 자료를 요약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를 주변 신자들에게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많은 묵상자료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완곡히 거절하시던 분들도 있었으나, 요약이 잘되고 짧은 시간에 묵상이 가능한 것을 보고는 많은 분들이 받기를 원하셔서 300여 명에게 카카오톡이나 문자로 매일 복음묵상 자료를 배포하고 있습니다.

 

저도 모르게 선교를 하게 된 것이지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이 사도 바오로 이후 최고의 동방 선교 성인임을 비추어 볼 때, 나의 이런 모습은 은연중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을 본받아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소박한 생각이 듭니다.

 

[평신도, 2019년 겨울(계간 66호), 김대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우리엘 여행사 이사)]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Total 0 ]
등록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