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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도(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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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베르나르도 (Bernard)
축일 8월 2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도원장, 교회학자, 신학자
활동지역 클레르보(Clairvaux)
활동연도 1090-1153년
같은이름 버나드, 베르나르두스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수도원 이야기: 12세기 유럽, 축성생활의 전성기 - 베르나르도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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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11-24 조회수552 추천수0

[수도원 이야기 - 12세기 유럽, 축성생활의 전성기] 베르나르도 성인

 

 

이탈리아 모데나 두오모의 천장화.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가지임을 상징한다. 12세기 축성생활의 전성기의 가지는 성 베르나르도로부터 뻗어 나왔다.

 

 

중세와 축성생활의 만개

 

누가 중세를 암흑의 시기라 했던가. 중세 수도자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교회도 없었다. 우리가 현재 누리는 신앙생활 또한 중세 축성생활에 크게 빚진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러한 전통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씨앗을 뿌린 사람이 있다면 가꾼 사람이 있고 열매를 수확하는 기쁨을 누린 이도 있다.

 

시토회와 카말돌리회, 카르투시오회 등을 설립한 1000년대 선각자들이 씨앗을 뿌린 이들이라면, 1100년대에는 그 씨앗을 싹틔우고 줄기를 뻗어 나가게 한 인물이 나타난다.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Bernardus Claravallensis, 1090-1153년)이 그 주인공이다.

 

 

베르나르도 성인, 시토회와 그 유산

 

‘가장 이상적인 가톨릭 수도자의 모습’이라 하면 머릿속에 어떤 이미지가 떠 오르는가? 혹시 김수환 추기경이 생각나는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사제의 얼굴을 떠올릴 수도 있고, 봉쇄 수도원 수도자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본 위대한 성인의 모습을 상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가장 이상적인 축성생활(수도자)을 꼽으라 하면, 내가 속한 수도회의 사부 루이지 마리아 몬티와 함께 베르나르도 성인을 떠올린다. 20세기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영성 신학자인 데이비드 놀즈는 성인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한다.

 

‘시토회 수도승이자 끌레르보의 아빠스 베르나르도는 거의 30년 동안 서방 교회 안에서 교황의 명칭을 지니지 않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오히려 여러 위대한 교황이 끼친 영향력보다도 더 컸다. 그의 인격은 참으로 그 시대의 정상에 있었다. 사람들에 대한 친화력과 환대의 능력, 윤리적이고 영성적인 위대한 가치, 문학적이고 웅변가다운 재능, 현세적 야심과 물질적인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로움, 자신에 대한 큰 신뢰, 강철 같은 의지, 전술적 능력과 결합된 진실성, 형제들에 대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사랑을 지녔던 것이다’(성 베네딕도회 홈페이지 http://osb.or.kr/board/bbs/board.php?bo_table=menu_05_02&wr_id=157&page=9 참조).

 

오늘날 영화 ‘어벤져스’의 등장인물에 비유하자면 베르나르도는 캡틴 아메리카 같은 인물이다. 그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당시 대세는 프랑스의 클뤼니 수도원이었다. 베네딕토회 소속의 자율적인 조직체로 10세기 무렵 부르고뉴의 아키텐 공작 기욤 1세의 승인을 받은 이 수도원이 한 개혁은 유럽 곳곳 약 이천 곳으로 확산했다. 그 흐름은 베르나르도 이후 시토회로 재편된다.

 

1118년에 이미 첫 시토회 계열 트루아 퐁텐 수도원(Abbaye de Trois-Fontaines)을 설립했으며, 곧이어 예순여섯 곳에 대수도원(abbatia)이 설립되었다. 1153년 그가 선종할 즈음에는 이미 이탈리아와 덴마크 등 전 유럽에 343개의 시토회 수도원이 생겨난 뒤였다. 시토회가 유럽 그리스도교의 영적 중심지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후에도 시토회 수도원은 독일, 영국, 오스트리아. 스위스, 스페인, 아일랜드, 헝가리, 포르투갈, 스웨덴, 노르웨이, 폴란드로 뻗어나갔다. 거기에서 위대한 인물도 속속 나타났다. 모두 베르나르도의 영향이다.

 

베르나르도는 지신의 제자들이 아빠스와 주교, 추기경이 되는 모습을 보았으며, 직속 제자인 베르나르도 파가넬리가 에우제니오 3세 교황으로 탄생하는 모습도 지켜보았다. 그는 교황이 된 제자에게 “교황의 진정한 권위는 지배와 혼동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의 봉사로서, 봉사를 위한 대리로서 실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한 시대를 움직인 교황의 영성에 그가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을지를 감안하면 그는 단순히 신비 사상가를 넘어서는, 교회의 큰 스승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영향력은 다른 수도회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의 모범은 앞서 살펴본 바 있는 노르베르토 성인의 프레몽트레회 규칙서와 성전 기사회의 규칙서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후 시토회는 12세기 후반까지 계속 성장했다. 베르나르도의 초창기 협력자였던 셈프링햄의 길버트가 1131년, 일곱 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봉쇄 관상 공동체를 설립하고서부터 여자 수도원 또한 수없이 늘어났다. 베르나르도의 정신을 따르는 여성들의 재속수도회와 은수생활 수녀회가 동시에 늘었다.

 

그중 대표적 인물은 최초의 작곡가이자 오페라의 시조로 알려진 빙엔의 힐데가르트 성녀이다. 이밖에도 쇼나우의 성녀 엘리사벳, 스페인 라스 우엘가스의 수녀원장 등이 있다.

 

 

궁극의 빛인 영성과 봉헌

 

이처럼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데는 그의 영성이 자리한다. 베르나르도는 시대의 개혁가, 조언가, 카리스마적 지도자, 설교가이자 위대한 신학자였지만, 그를 가장 빛나게 하는 것은 영성에 바탕을 둔 봉헌의 삶 자체였다.

 

그는 극단적 한계까지 밀고 나가는 청빈을 강조하였고, 동시에 수도원 내부에 화려한 장식을 일절 금했다. 또 독지가들의 기부와 십일조, 사유재산의 소유와 수도원 재산의 임대를 포기하였고, 모든 성당을 수도회의 수호자인 성모님께 봉헌하도록 하였다.

 

나아가 그는 축성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직무 사제직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베르나르도는 예로니모의 말을 인용했다. “수도자의 직무는 가르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이나 세상에 대해 울며 탄식하는 데 있다.”(Monachus non doctoris, sed plangentis officium, qui vel se vel mundum lugeat)는 것이었다.

 

성인은 축성생활을 완성하려면 이집트 사막의 고대 교부들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확신했다. 이와 관련해 베르나르도가 택한 축성생활 방법론은 다음의 3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 1단계: 하느님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겸손과 무아.

▶ 2단계: 그럼에도 우리는 하느님의 피조물이며, 그분께서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자각. 구원에 대한 강한 열망.

▶ 3단계: 하느님께 헌신하는 사랑. 그리고 나와 하느님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 하느님 안에서의 완전한 합일.

 

베르나르도는 하느님과 합일을 이루려면 가장 밑바탕에 겸손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그의 가르침은 지금까지도 생명력을 잃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유명한 트라피스트회, 곧 ‘엄률 시토회’(Ordo Cisterciensis Strictioris Observantiae)가 17세기에 나타났다. 이는 시토회의 본디 정신으로 돌아가 엄격한 수련에 임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시토회에 뿌리를 둔 이들이 전 세계적으로 발휘하는 큰 영향력을 볼 때 베르나르도 성인과 시토회가 가톨릭 교회에 얼마나 보석 같은 존재인지 알 수 있다.

 

* 최의영 안드레아 ? 교황청립 마리아의 아들 수도회(CFIC) 동아시아 준관구장. 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교 수도자 신학대학원(클라렛티아눔)을 졸업했다.

 

[경향잡지, 2020년 11월호, 글 · 사진 최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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