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사적지 목록

교구 성지명     지역명     내용 검색

대구대교구 > 신나무골 성지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이선이 엘리사벳의 묘를 품은 영남지방 선교의 요람지
지번주소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 20 
도로주소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칠곡대로 2189-20
전화번호 (054)974-3217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sinnamugol
신나무골 성지 입구.

4번 국도에 있는 신동 초등학교에서 왜관 방향으로 약 3.3km 정도 가면 영남지방 선교의 요람지인 신나무골 성지 입구가 나온다. 예로부터 단풍나무의 한 종류인 ‘신나무’가 많아 ‘신나무골’로 불린 이곳은 대구 외곽에 자리하고 있으나 교통의 요지였다. 대구에서 서북 방향으로 20km가량 떨어진 유서 깊은 교우촌인 이곳은 좁게는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를 중심으로 한 ‘신나무골’을 의미하지만, 넓게는 도암 · 완정 · 왜관의 가실 · 동명의 어골 등 인근의 교우촌을 모두 포함하기도 한다. 신나무골은 박해 시대 교우촌의 필수 조건인 외지고 깊숙한 산골이라는 점 외에도 대구 읍내에서 하루거리라는 점에서 교통의 편리성 또한 매우 큰 장점이었다.


신자들이 처음 신나무골에 살기 시작한 것은 1815년 을해박해 당시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청송의 노래산, 진보의 머루산, 일월산 산중의 우련전과 곧은정 등의 교우촌에 살던 신자들이 박해를 만나 200여 명이 체포되었다. 그들 중 많은 신자가 배교를 하고 석방되거나 옥사했지만 33명은 끝까지 신앙을 지켜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때 체포된 신자들의 가족이나 다른 신자들이 임진왜란 때의 피난지이기도 했던 신나무골로 숨어들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대구 교회 첫 본당터 앞마당에 세워진 대구 천주교 요람지 기념비.

대구를 지척에 둠으로써 많은 선교사가 대구 진출의 전초 기지로 삼았던 신나무골은 최양업(崔良業) · 다블뤼(Daveluy) · 리델(Ridel) 신부 등이 사목 활동을 했던 곳이다. 1831년 조선 교구 창설 후 1837년부터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샤스탕(Chastan) 신부가 신나무골과 언양 등지에 머물면서 한반도 남쪽 지역을 맡아서 순회 전교를 하기 시작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샤스탕 신부가 순교한 후에는 다블뤼 신부가, 1849년부터 1861년 6월까지 12년간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신나무골을 방문하여 성사를 주곤 했다.


최양업 신부가 과로로 쓰러진 후에는 다시 다블뤼 신부와 리델 신부가 이 지역을 맡아 오다가 1866년 병인박해 일어나면서 신나무골의 신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박해가 잦아들면서 신자들은 다시 신나무골로 모여들었고, 1882년부터는 삼남 지방 선교에 지대한 역할을 한 아쉴 로베르(Achille Paul Robert, 金保祿) 신부가 순회 선교를 시작했다. 특별히 경상 지역 선교를 위해 1885년 후반 신나무골에 사제관을 지어 정착한 로베르 신부는 이듬해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되자 이곳 신나무골을 거점 삼아 활발한 전교 활동을 펼쳤다.


로베르 신부가 1898년 대구에 세운 십자형의 대구 성당과 교리학교인 해성재 건물(우).

이로써 대구 본당이 설립되었고, 곧이어 1888년 새방골(新坊谷, 현 대구시 서구 죽전동 · 상리동)로 본당을 옮겨 본격적인 대구 읍성 전교에 나선 로베르 신부는 임시 요셉 성당을 거점으로 사목하며 계산동에 십자형 한옥 성당을 지었다. 그러나 1898년 6월 말에 완공된 한옥 성당은 불행히도 1901년 발생한 지진으로 인해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이듬해 로베르 신부는 그 자리에 두 개의 종탑을 갖춘 라틴 십자형의 고딕 양식으로 새 성당을 완공해 1903년 11월 1일 축성식을 올렸다. 이 성당은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현 계산 주교좌성당의 원형이 되었다. 이렇게 30여 년에 걸친 로베르 신부의 사목 활동은 대구 지역에 복음이 확고히 자리 잡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영남지방 복음화에 헌신했던 로베르 신부는 교육 사업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이른바 ‘연화 서당’이라 불리는 ‘신나무골 학당’을 설립했다. 1883년 세워진 이 학당은 1920년 신동에 초등학교가 설립될 때까지 신학문과 구학문 그리고 천주교 교리도 함께 가르쳤다. 신나무골 학당은 1855년에 설립된 배론 신학교를 제외하고, 1884년 서울에서 설립된 계성 학교의 전신인 한한 학교와 함께 천주교 내에서는 가장 일찍 신학문을 가르쳤던 신식 학교였다.


대구 교회 첫 본당터 마당에 세워진 로베르(김보록) 신부 흉상.

신나무골은 1894년 왜관 가실 본당 소속 공소였다가 1926년 왜관 본당에 소속되었고, 1968년 신동 본당이 설립된 후에는 다시 신동 본당에 속하게 되었다. 신나무골 성지는 그동안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 관할하며 1, 2차에 걸쳐 개발한 바 있고, 2015년에 대구대교구로 이관되었다.


1973년 성지 개발 기금을 모금하면서 시작된 신나무골 성역화는 1977년 제1차 사업을 완수하며 이곳에 ‘대구 천주교 요람지 기념비’를 세웠다. 이어 2차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아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주선으로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했다. 원래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의 유해는 1860년 경신박해 때 포졸들에게 쫓기다 체포되어 한티에서 순교한 뒤 대구시 북구 읍내동(안양동) 산 21번지에 있는 선산에 모셔져 있었다. 그리고 대구 지역 첫 본당 터를 복원하여 2차 개발을 완료했는데, 이때 로베르 신부의 사제관과 신나무골 학당(명상의 집) 등을 복원하고, 마당 한쪽에 로베르 신부의 흉상도 건립했다.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의 남편은 성산 배씨(星山裵氏) 가문의 배정모로, 원래는 성주가 고향이었으나 칠곡으로 옮겨 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리 넉넉한 살림은 아니지만 착실한 신앙생활을 해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던 중 1860년 경신박해의 여파로 경상도 지방에도 박해가 일어났다. 특히 칠곡 읍에는 칠곡 고을을 중심으로 관아(官衙)가 있었기 때문에 신자들에 대한 감시가 꽤 심했다. 배정모의 가족은 박해를 피해 칠곡 읍에서 20여 리 떨어진 신나무골로 피신했지만, 이곳에도 포졸들이 들이닥쳐 신자들은 경황없이 뿔뿔이 흩어졌다.


이선이 순교 150주년을 기념해 김도율 신부가 그린 이선이 엘리사벳과 배도령 스테파노 모자 초상화.

배정모와 부인 이선이 엘리사벳 그리고 세 아이는 한티 쪽으로 총총히 쫓기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2월 말의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서 이들은 갖은 고생 끝에 한티의 사기굴이라는 곳에 도착해 잠시 숨을 돌렸으나 결국은 뒤따라온 포졸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굴 밖으로 끌려 나온 이들을 향해 포졸들이 “성교(聖敎)를 버리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라고 엄포를 놓자 겁에 질린 배정모는 이내 배교하고 풀려났다. 하지만 부인 이선이 엘리사벳과 맏아들 스테파노(속칭 배도령)는 “죽어도 성교를 믿겠소.”라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그 대가는 너무도 가혹했다. 포졸들은 그 자리에서 시퍼런 작두날로 이들의 목을 잘라 모자(母子)가 한자리에서 순교하게 되었다. 남편은 가슴을 후벼 파는 뼈저린 아픔 속에 부인과 맏아들의 시체를 그 자리에 묻었다가 얼마 후 선산이 있는 칠곡의 안양동으로 부인의 시체만 이장했다.



2019년 5월 봉헌식을 올린 새 한옥 성당.

대구대교구는 2018년 2월 28일 기존의 복원 사업을 통해 성지 내에 복원했던 로베르 신부 사제관과 대구 본당 초가를 철거하고 3차 신나무골 성지 개발에 들어가 2019년 5월 2일 한옥 성당 봉헌식을 올렸다. 새로 단장한 성지에는 로베르 신부가 현 계산 주교좌성당 자리에 지었던 옛 한옥 성당(1901년 화재로 소실)을 재현한 것이 특징이다. 교구의 첫 성당이었지만 지진에 의한 화재로 소실된 역사를 본당이 처음 시작되었던 곳에 다시 세우고 그 의미를 순례자에게 전하려는 의미이다. 성당 바로 옆에는 로베르 신부와 세 명의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머물던 초가를 올려 사제관을 복원하고, 순례자들이 쉴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다. 성당 외벽에는 로베르 신부의 일대기와 대구 교회 관련 역사를 담은 김옥수 신부(부산교구)의 타일 성화를 설치해 순례자들의 성지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20년 4월 18일)]


이선이 엘리사벳 순교자 묘역. 묘소 뒤에 반원형으로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고, 앞에 야외제대가 마련되어 있다.

 


한티와 신나무골에 남은 신앙

 

한티 성지 순교자 묘역 입구의 대형 십자가와 야외제대.

을해박해와 정해박해로 흩어지게 된 경상도 북부의 교우촌 신자들은 저마다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나서야만 했다. 북부의 상주와 문경은 물론 남부의 양산, 울산, 밀양 등에 있는 산간 지대가 바로 그들이 찾은 새로운 은거지였다. 칠곡의 한티와 신나무골 교우촌도 이 무렵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혜의 은거지로 손꼽히는 ‘한티’(칠곡군 동명면 득명동)는 대구에서 5번 국도를 따라 군위로 향하다가 시군 경계를 벗어나자마자 우회전하여 동명 저수지를 안고 돈 다음 11km 정도를 올라가면 나온다. 북서쪽으로는 가산(해발 901m)을, 남동쪽으로는 팔공산(해발 1193m) 자락을 안고 있는 이곳은 그야말로 내지의 요새로, 박해자와 밀고자들의 추적을 따돌리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척박한 땅에서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교우들은 1850년대 이후 한국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순방을 받게 되면서 다시 신앙의 활기를 찾을 수 있었다.

신나무골에 안장된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의 묘비.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티의 교우들은 1860년에 불어 닥친 경신박해로 다시 한 번 혼쭐이 난 뒤에야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뒤 경상도 지역의 사목을 맡게 된 성 다블뤼 주교는 1862년 교구장인 성 베르뇌 주교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칠곡 고을의 굉장히 큰 산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 있는데, 이곳에서는 40명가량이 성사를 받습니다.”(“한국 천주 교회사” 하, 340면)라고 적고 있다. 바로 한티 교우촌을 지칭한 것이다.

같은 칠곡군에 있으면서도 ‘신나무골’(지천면 연화리)은 한티에 비해 찾기 쉬운 곳에 있다. 왜관에서 4번 국도를 따라 5km 남짓 대구 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기 때문이다. 이곳에 새 터전을 잡은 교우들은 박해가 있을 때마다 한티 쪽으로 피신을 갔는데, 경신박해 때는 칠곡에 거주하던 이선이(엘리사벳) 가족이 신나무골로 피신했다가 다시 한티로 피신하던 중에 체포되어 아들 배도령(스테파노)과 함께 포졸들이 가져온 농가의 작두날에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 때 배교하고 살아남은 엘리사벳의 남편은 뼈 저리는 아픔 속에서도 모자의 시신을 이곳에 묻었다가 훗날 부인의 시체만을 찾아내 선산이 있는 칠곡 안양동으로 이장하였다.

한티와 신나무골 교우촌에 은거해 살던 신자들은 병인박해로 다시 한 번 수난을 겪게 되었다. 그 후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면서 이곳은 대구 본당 설립의 전초 기지가 되었으며, 경상도의 첫 담임 신부로 임명된 로베르 신부에게 첫 본당 중심지로 설정되었다. 이러한 의미를 기리기 위해 왜관 지역에서는 1973년부터 이곳을 사적지로 개발하기 시작하여 1977년에 선교 기념비를 건립하였고, 1984년에는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주선으로 칠곡에 있던 이선이(엘리사벳)의 무덤을 옮겨 와 안장하였다. 한편 한티에는 그 후 유명 · 무명 순교자들의 묘역이 조성되고, 1983년에는 피정의 집이 세워지면서 새로운 신앙의 안식처가 되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000년 1월호]

신나무골 성지 입구.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의 묘가 있고, 왼쪽 길로 올라가면 대구 교회 첫 본당터가 나온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모바일용 요약 설명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영남지방 선교의 요람지인 신나무골은 박해 시대 교우촌으로 1815년 을해박해 때부터 신자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신나무골은 외지고 깊숙한 산골이면서도 대구를 지척에 둠으로써 많은 선교사가 대구 진출의 전초 기지로 삼았고, 샤스탕 · 다블뤼 · 최양업 · 리델 신부 등이 사목 활동을 했던 곳입니다. 1866년 병인박해로 신나무골의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박해가 잦아들면서 다시 모여들었고, 1882년부터는 영남지방 선교에 지대한 역할을 한 로베르(김보록) 신부가 순회 전교를 시작했습니다. 1885년 신나무골에 사제관을 짓고 정착한 로베르 신부는 이듬해 대구 본당을 설립하고 곧이어 대구 읍성 전교에 나섰고, 1898년 계산동에 십자형 한옥 성당을 건립했습니다. 그러나 이 성당이 화재로 소실되자 다시 그 자리에 현 계산동 주교좌성당의 원형이 되는 라틴 십자형의 고딕 성당을 지어 1903년 축성식을 올렸습니다.

대구 교회 첫 본당 터인 신나무골 성지는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아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이선이 엘리사벳의 묘를 성지 입구로 이장했습니다. 이선이 엘리사벳과 그의 남편 배정모 그리고 세 아이는 1860년 경신박해 때 칠곡을 떠나 잠시 신나무골로 피신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도 포졸들이 들이닥치자 한티로 다시 숨어들었지만 결국 포졸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남편 배정모는 배교했지만 이선이 엘리사벳과 장남 스테파노(배도령)는 “죽어도 성교를 믿겠다.”라며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그 자리에서 작두날에 목이 잘려 순교했습니다. 배교하고 풀려났던 남편은 뼈저린 아픔 속에 부인과 아들의 시신을 그 자리에 묻었다가, 다시 선산이 있는 칠곡의 안양동으로 부인의 시신만 이장했습니다.

1977년 제1차 신나무골 성역화 사업을 완수하고 이곳에 ‘대구 천주교 요람지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아 성지를 관할하던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주선으로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의 유해를 이장하고, 대구 본당의 첫 본당 터에 로베르 신부의 사제관과 신나무골 학당 등을 2차로 복원했습니다. 2015년 대구대교구로 성지 관리가 이관된 후 기존에 복원했던 건물을 철거하고 3차 성지 개발에 들어가 2019년 5월 새 한옥 성당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새 성당은 로베르 신부가 현 계산 주교좌성당 자리에 지었던 첫 한옥 성당을 재현한 것입니다. 이로써 화재로 소실된 대구대교구의 첫 성당을, 대구의 첫 본당이 시작된 터에 다시 세웠습니다.
미사시간 안내
미사시간 안내
미사구분 요일 시간 기타사항
주일미사 11:00  
평일미사 11:00  
11:00  
11:00  
11:00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