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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 한티 순교성지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순교자들이 살고 죽고 묻힌 성지
지번주소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 5 
도로주소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한티로1길 69
전화번호 (054)975-5151
팩스번호 (054)975-5150
홈페이지 http://www.hanti.or.kr
전자메일 dghanti@hanmail.net
관련기관 한티 피정의 집    

대구에서 북쪽으로 24km, 행정구역으로는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에 자리한 한티 순교성지는 서쪽 가산(901m)과 남동쪽 주봉인 팔공산(1,192m) 사이에 위치하며 가산에서 동쪽으로 7km 떨어진 깊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해발 600m를 넘는 이 심심산골은 천혜의 은둔지로서 박해를 피해 나온 신자들이 교우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한티에 언제부터 신자가 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을해박해와 정해박해 때 대구 감옥에 갇힌 신자 가족들이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이곳에 살았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하지만 매우 일찍부터 한티에는 신자들이 자리를 잡아 대구와 영남지방 교회의 터전이 돼 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1837년 서울에서 낙향하여 신나무골에 얼마간 살았던 김현상 요아킴 가정이 기해박해 때 신나무골보다 더 깊은 산골인 한티에 와서 살았다. 이렇게 처음에는 한두 집 모여들어 움막을 짓고 사기와 숯을 굽고 화전을 일구어 생계를 유지하던 적은 수의 신자들이었으나 한티를 중심으로 인근의 서촌, 한밤, 원당 사람들이 입교하게 되면서 점차 커지기 시작하여 1850년대 큰 교우촌이 되었다.

 

1860, 경신박해가 시작되자 신나무골 · 어골 뿐 아니라 한티도 안전한 곳이 못 되었다. 신나무골에서 한티 사기굴로 피신을 왔던 배손이(배정모) 가족이 잡혀, 배손이는 배교하고, 아내 이선이 엘리사벳과 장남 배 스테파노는 신앙을 증거한 후 작두날에 목이 잘려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그리하여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는데, 한티에 살던 김현상 가족들도 대구로 가고, 어골의 이재영 고스마(이장언 회장의 부친) 가정도 대구 부근의 송골(중리동)로 피신했다. 그러나 몇 달 후 경신박해가 잠잠해지자 흩어졌던 신자들이 다시 모여들어 오히려 더 큰 규모로 성장하였다.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뒤 경상도 지역에 대하여 베르뇌 주교는 1862칠곡 고을의 굉장히 큰 산 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가 있는데 이곳에는 40여 명이 성사를 받았습니다.”라고 성무집행 보고서에 기록하고 있다.


고작 2년 전에 박해의 칼날이 미쳤고, 깊은 산속에서 가난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이 더욱 모여든 이유는 그들이 한티에서 하느님을 통해 맛볼 수 있었던 평화와 위로 덕분일 것이다. 경신박해 때에 김현상 가정이 대구로 나감에 따라 상주 구두실이 고향인 조 가롤로 가정이 한티의 중심이 되었다. 신자들은 조 가롤로 집에 모여 주일을 지냈다. 경신박해 때 대구로 간 김현상 후손들은 대구 읍내 첫 신자 가정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초창기 대구 교회 창설에 큰 공로를 세웠다


순교자 묘역의 조 가롤로 가족 묘.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있는 교우촌들이 유린당하였고, 8천여 명 이상이 순교했다. 이러한 병인박해가 일어날 때 리텔 신부는 부활 판공을 주기 위해 대구에 와 있었다. 신부를 통해 박해 소식을 알게 된 대구 읍내와 신나무골 등에 있던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문경 한실과 한티로 피난을 갔다. 대구의 서상돈 집안이 이 시기에 한티로 이사를 했다. 대구의 김응진 가롤로 가정(김현상의 후손), 대구 부근 노곡동에 살던 송씨 가정을 비롯하여 신나무골의 많은 신자 가정이 한티로 피난했다.


병인박해 때 한티에 살던 이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오히려 대구 읍내로 피신했다. 1868년 그는 대구 외곽 동쪽 하양 방면으로 피신하였다가 대구로 돌아오던 중 고발하는 사람이 있어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감옥에서 자신을 고발한 이를 만났으며, 며칠 동안 문초를 받았지만 오히려 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이때 감옥에서 서태순의 형인 서인순 시몬을 만났으며,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좌포도청에 감금되었다가 교살형으로 순교했다. 그때 이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31세였다.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파헤친 사건이 발생한 이후 박해는 선참후계(先斬後啓) 명령이 시행될 정도로 전국적으로 격화되었다. 1868년경 봄 한티에 서울 포졸과 가산산성을 지키던 군사들이 들이닥쳐 신자들을 체포했다. 배교하는 자는 놓아주었고, 공소회장 조 가롤로와 아내 최 바르바라와 동생 조아기 등 신앙을 지킨 자들은 그 자리에서 죽였으며, 도망가는 자들은 쫓아가서 죽였다. 이때 순교자는 40여 명이었다. 포졸들과 병사들이 물러가고 난 뒤 살아남은 신자들이 한티에 돌아와 보니 동네는 불타 없어졌고 온 산 곳곳에 시신이 썩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너무 많이 썩어서 옮길 수조차 없었으므로 그 자리에 매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돌 더미에 묻힌 이도 있고, 밭에 묻힌 이도 있고, 산등성이에 묻힌 이도 있다. 후에 발굴 작업을 통해 총 37기의 무덤이 있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한 무덤에 여러 명이 합장된 경우도 있다.


순교자 묘역의 서태순 베드로 묘. 총 37기의 묘 중에서 이름이 알려진 4명 순교자 중 한 명이다.

병인박해 후에 한티에 신자들이 다시 모여 살았다. 조 가롤로 회장의 아들 조영학 토마, 살아남은 박만수 요셉, 군위에서 한티로 이사 온 김재윤 플로리아노, 김윤하 안드레아, 박기인 루도비코, 한돌철, 신나무골의 배순규 가정, 조규성 프란치스코 가정이 들어왔다. 이들을 중심으로 순교자들이 죽은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마을을 재건했다. 먼저 순교자들이 살던 마을(순교자묘역 대형 십자가 뒤편)하느님을 증거하다 돌아가신 분들의 피가 서린 거룩한 곳이므로 우리 같은 죄인이 밟을 수 없다.” 하여 바람맞이 땅(현재의 초가집이 있는 곳)에 새로이 마을을 이루었다. 또한 당시 공소회장이던 조 가롤로의 아들 조영학에게 집을 지어주고 공소 회장으로 추대했으며 이후 그들은 순교자의 묘를 벌초하는 등 돌보고 관리했다.


1882-1883년 로베르 신부가 경상도 지방을 순회 전교하면서 한티에서 성사를 집행했다이때 신자 39고해성사자 20영성체자 19세례자 3명, 혼배자 1쌍이 있었다. 1885년 대구 본당이 설정되어 로베르 신부가 신나무골에 정착하게 되면서 한티에 자주 왔고한티 신자들은 대축일이면 신나무골로 미사 참례하러 갔다이후 한티 공소는 새로이 번창하여 1900년 초에는 신자가 80여 명으로 늘어났으나 종교의 자유와 더불어 선교를 위해또한 생활이 불편한 이곳을 떠나 살기 좋은 곳으로 이주하면서 공소는 쇠퇴하게 되었다.

 

1991년 완공하여 봉헌식을 가진 한티 피정의 집.

1831년 조선대목구가 설정되기 전인 을해박해(1815년)를 즈음하여 형성된 것으로 보는 한티 교우촌의 역사는 오늘까지 200년의 세월이 지났다. 숱한 박해의 격랑 속에서도 조선대목구는 성장하여 80주년이 된 1911,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로 분리되었다. 대구대목구의 초대 안세화 드망즈 주교 때부터 현재 제10대 조환길 타대오 대주교에 이르기까지 대구대교구의 역사를 돌아볼 때 한티와 신나무골은 그 초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해박해가 발생하기 전 순회전교를 하였던 샤스탕 신부를 시작으로 최양업 신부, 다블뤼 주교, 리델 신부 등이 경상도 지역을 맡았다. 로베르(김보록) 신부는 1885년 대구지역 첫 본당으로 신나무골에 정착하기 이전부터 한티를 방문하였고, 1895년 가실 본당이 설정이 된 후부터 가실 성당의 신부가 한티를 찾아왔다. 대구대목구 설정 후 1927년부터는 비산 본당의 관할이었다가 한국전쟁이 끝난 1957년부터는 칠곡 본당의 관할이 되었다.


19679월 순교자성월부터는 대구대교구 액션단체 주관으로 공적 순례가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온다. 1980년대에 들어 본격적인 성지조성을 위한 부지 매입과 순교자 묘역 확인 작업을 거친 후 1991년 피정의 집이 개관되었고, 2000년에는 영성관, 2004년에는 순례자 성당이 축성되었다. 1995년부터 2015년까지 20년간 대구관구 신학생들이 한티로 입학하였고, 지금도 사제품을 앞둔 신학생들의 30일 피정이 이어지고 있다. 피정의 집 개관 이래 30여 년 동안 매년 사제 피정과 제 단체 피정 및 연수가 진행되고 있으며, 해마다 전국의 순례자들은 물론 해외의 순례자들도 찾아와 영적인 힘을 얻어가고 있다. 또한 박해시대 한티의 교우들이 신나무골을 오가며 걸었던 한티가는 길이 열림으로써 도보순례자들의 발길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최종수정 2020년 4월 23일]


2004년 축복식을 가진 순례자 성당. 2층에는 성체조배실이 마련되어 있다.
한티 성지의 순교자 묘역 입구. 위로 올라가면 대형십자가와 야외제대, 순교자들의 묘를 순례하며 바치는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모바일용 요약 설명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대구에서 북쪽으로 약 24km, 심심산골에 있는 한티는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몸을 숨긴 곳이자 그들이 처형을 당한 곳이며 또 그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순교성지입니다. 한티에 언제부터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인근 신나무골과 비슷한 1815년 을해박해와 1827년 정해박해 후에 대구 감옥에 갇힌 신자들의 가족들이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이곳에 와서 산 것으로 추정됩니다. 1860년 경신박해로 큰 아픔을 겪었지만,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 안에서 오히려 더 큰 규모로 성장했습니다.

여러 차례의 박해를 넘긴 한티 마을은 1866년 시작하여 3년 가까이 이어진 병인박해의 여파로 인해 최후를 맞게 됩니다. 1868년 한티에 들이닥친 포졸들은 배교하지 않는 교우들을 현장에서 처형하고 마을은 모두 불태워버렸습니다. 박해 소식을 들은 인근 교우들이 왔을 때는 이미 마을은 불타 없어지고,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이 산야 곳곳에서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시신의 훼손이 너무 심해 옮길 수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순교한 그 자리에 시신을 안장했고, 지금까지 확인된 순교자의 묘는 모두 37기로 그중에서 조 가롤로 가족 등 4기만 신원이 알려져 있습니다.

박해의 먹구름이 지나간 뒤 조영학 토마스(조 가롤로의 아들)와 몇몇 교우들은 무명 순교자들의 유해를 수습하고 순교자들의 영성을 이어가기 위해 공소 재건에 앞장섰습니다. 재건된 공소는 1900년 초 신자 수 80여 명 이상의 전성기를 거쳐 성지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1980년대 초기까지 공소의 명맥을 유지해 왔습니다. 1980년대 초부터 순교성지 개발을 위한 부지 매입과 조사를 시작한 대구대교구는 무명 순교자들의 묘를 확인하고, 1991년 피정의 집, 1995년 성지 관리 사무소, 1998년 옛 공소 복원, 2000년 대구 대신학교 영성관, 2004년 순례자 성당 축복식, 2016년 한티 가는 길 개통식을 가졌습니다. 현재 국내외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 성지에서 많은 영적인 힘을 받아 가고 있습니다. 또한 박해시대 한티의 교우들이 신나무골을 오가며 걸었던 한티가는 길을 찾는 도보순례자들의 발길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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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11:00  후원회 월례미사(매월 넷째주 토요일)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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