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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 마재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정약용 4형제가 태어난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이자 성가정의 모범
지번주소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116 
도로주소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 698-44
전화번호 (031)576-5412
팩스번호 (031)577-5413
홈페이지
전자메일 majae@ujb.catholic.or.kr

 
 
정약전(丁若銓, 1758-1816)
 
약현(若鉉), 약종(若鍾), 약용(若鏞)의 4형제 중 둘째로 일찍이 권철신(權哲身)에게 사사(師事)하였고 1779년 주어사(走魚寺) 강학회에 회원으로 참석하여 천주교를 연구하였다. 이어 1785년에는 역관(譯官) 김범우(金範禹) 집에서의 공동집회에 참석하는 등 초기 조선 교회 창설에 큰 역할을 하였다.
 
1790년 33세로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승정원(承政院) 부정자(副正字)를 거쳐 규장각(奎章閣) 검서관(檢書官) 등 관계에 등용되었으나 점차 반대파로부터 천주교인이라는 모략을 받아 한때 관직을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801년 신유박해 때 배교, 전라도 신지도(薪智島)로 유배되었는데, 황사영 백서(黃嗣永 帛書) 사건으로 다시 서울에 잡혀왔다가, 간신히 사형만을 면하고 우이도(牛耳島)로 유배되어 1816년 59세로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우이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자산어보≫(玆山魚譜)라는 수산학서(水産學書)를 써서 학계에 공헌한 바도 있다.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1760-1801년)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초상화.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는 1760년 경기도 광주의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839년에 순교한 유조이 체칠리아 성녀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이고, 1801년에 순교한 정철상 가롤로와 1839년에 순교한 정하상 바오로 성인, 정정혜 엘리사벳 성녀는 그의 아들과 딸이다.

정 아우구스티노가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2년 뒤인 1786년에 형에게서 교리를 배우면서였다. 이후 천주교 교리를 깊이 이해하게 된 정 아우구스티노는 세례를 받고 교리 연구와 가족들을 가르치는 데 전심하였다. 그러다가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경기도 광주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의 형제들은 이 무렵부터 조금씩 교회를 멀리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교리를 실천하는 데에 정성을 다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 아우구스티노의 열심은 더욱 빛을 발하였다. 인근 지역의 신자들과 자주 교류하였으며, 몇몇 교우들을 자신의 집에 받아들여 교리를 가르치기도 하였고, 직접 교회 일에도 참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의 교리 지식은 교우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나게 되었다.

1794년 말 중국인 주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정 아우구스티노는 자주 한양으로 올라가 성사를 받았고, 신부와 교우들을 도와 교회 일을 처리하기도 하였다. 또 오랫동안의 교리 연구를 바탕으로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 2권을 완성하였는데, 이 책은 주 신부의 승인을 받아 교우들에게 널리 보급되었다. 한편, 주 신부는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를 조직하고 정 아우구스티노를 초대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정 아우구스티노는 1800년에 고향 인근에서 박해가 시작되자, 가족을 데리고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교회 전체가 위험에 빠졌다.

정 아우구스티노는 박해가 시작되자마자, 체포자 명단에 그 이름이 오르게 되었다. 특히 박해 초기에 그의 책 상자가 관청에 압수되자, 조정에서는 곧바로 그를 체포해 오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그는 음력 2월 11일에 체포되어 상급 재판소인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체포 이튿날부터 정 아우구스티노는 엄한 형벌과 문초를 받았다. 그러나 이미 순교할 원의를 갖고 있던 그에게는 어떠한 유혹과 형벌도 소용없었다. 그는 교회나 교우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으며, 오로지 천주교 교리가 올바르다는 것만을 설명하는 데 노력하였다.

“천주를 높이 받들고 섬기는 일은 옳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 천주는 천지의 큰 임금이시요 큰 아버지이십니다. 천주를 섬기는 도리를 알지 못한다면, 이는 천지의 죄인이며,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같습니다.”

박해자들은 정 아우구스티노를 굴복시키려고 갖은 수단을 다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으며, 그의 입에서 나오는 교리는 오히려 박해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결국 조정에서는 의금부의 사형 선고를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정 아우구스티노는 체포된 지 15일 만에 형장으로 정해진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게 되었다. 이때 그는 사형수가 타는 수레에 올라 주변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우리를 비웃지 마시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천주를 위해 죽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오. 마지막 심판 때에 우리의 울음은 진정한 즐거움으로 변할 것이고, 당신들의 즐거운 웃음은 진정한 고통으로 변할 것이오.”

형장에 이르자 곧 참수형이 시작되었다. 이때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보다, 하늘을 쳐다보며 죽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하늘을 바라보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성녀 유소사(유조이) 체칠리아(柳~, 1761-1839년)

 
왼쪽부터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 정녀 유 체칠리아, 성 정하상 바오로(정창섭 작).성녀 유 체칠리아(Caecilia)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스무 살 되던 해인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 순교한 유명한 정약종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후처로 들어가면서 남편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깊은 신심을 보여주었다. 신유년 서울에서 큰 박해가 일어나서 남편이 옥에 갇혔을 때 그녀 역시 세 아이와 함께 붙잡혀 들어갔다가 다행히 풀려 나왔다.
 
그러나 가산은 모두 몰수되어 의지할 곳이 없었다. 어려운 처지에 살 길이 막연했던 체칠리아는 마재에 있는 시동생 정약용 요한의 집에 가서 도움을 청했지만 친척들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여 무수한 고생을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큰 딸과 순교한 전실 아들인 정 카롤루스(Carolus)의 아내와 아들이 죽고 다만 자신이 낳은 아들 정하상 바오로(Paulus)와 딸 정정혜 엘리사벳(Elisabeth)만이 남았다.
 
어느 날 밤 체칠리아는 꿈속에서 남편을 만났는데, “나는 천국에 방 여덟이 있는 집을 하나 지었는데 다섯은 치고 셋만 남았소. 그러니 생활이 어렵더라도 참아 받으시오. 그리고 꼭 우리를 만나러 오도록 하시오” 하고 말했다. 과연 가족 여덟 식구 중에서 이미 다섯이 순교하였으니 이 꿈은 나중에 꼭 들어맞았다. 그 꿈은 그녀의 가슴에 깊은 인상을 박아주어 큰 힘과 용기를 주었다.
 
한편 그녀의 아들 정하상 바오로는 신심이 깊은 생활을 하며 선교사들을 조선에 영입하기 위하여 여러 해 동안 어머니와 떨어져 살았다. 어머니 체칠리아에게는 이것이 큰 시련이었고, 아들이 북경으로 떠날 때마다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아픔을 기도로써 참아 이겨냈다. 그러면서도 가난한 사람을 도왔으니 어떤 때는 그녀가 먹을 것도 먹지 않고 내어주었다고 한다. 또 나이가 너무 많아서 가사를 돌볼 수 없었기에 거의 모든 시간을 기도와 신앙생활에만 전념하며 지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한창일 때 그녀의 조카 한 사람이 시골에 집까지 장만하여 주며 피신하기를 권했으나, “나는 늘 순교하기를 원하였는데 이제 그 기회가 왔으니 아들 바오로와 함께 순교할 생각이다” 하며 거절하였다. 그러던 중 그해 7월 11일에 아들이 체포되고, 이어서 7월 19일에는 그녀 또한 79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큰 죄나 지은 국사범과 같이 오라로 꽁꽁 묶여 끌려갔다. 그것은 그녀의 집안이 순교자 집안이요, 그녀의 아들이 외국인과 자주 만났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며칠 동안 옥에 갇혀 있던 체칠리아는 포장 앞에 나가 신문(訊問)을 당하였다. 처음 다섯 번 문초를 당하는 동안에 태형을 2백 30대나 맞았다. 기운이 쇠약한 체칠리아였으나 끝까지 참아내며 자세하나 흐트러트리지 않고 태연자약한 태도를 보여 주어 형리들을 놀라게 했다. 체칠리아는 참수당하기를 바랐으나 나라 법률에 노인에 대한 참수를 금하였기 때문에 재판관들은 때려서 죽이기로 하고 두 번이나 그녀를 불러내어 문초를 거듭하고 위협하며 형벌을 가하였다. 체칠리아는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맡기고 모든 고통을 참아냈다. 마침내 기운이 다하여 옥 바닥에 누워 마지막으로 “예수 마리아!” 하고 소리 내어 부르고 숨을 거두었다. 이때가 1839년 11월 23일이요, 그녀의 나이는 79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성인사전]
 
 
정약용(丁若鏞) 요한(1762-1836년)
 
다산 정약용(안보선 작).실학자(實學者). 세례명 요한. 자는 미용(美鏞), 송보(頌輔), 귀농(歸農), 호는 다산(茶山), 삼미(三眉), 여유당(與猶堂), 사암(俟庵)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다산으로 널리 알려졌다. 정재원(丁載遠)의 사남(四男)이며, 이승훈(李承薰)의 처남이다. 양근(楊根)의 마재[馬峴]에서 출생.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학풍을 이어받아 실학(實學)을 집대성하였다. 1789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나 공서파(攻西派)의 탄핵으로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가 10일 만에 풀려 나왔다. 이어서 경기도 암행어사, 동부승지(同副承旨), 병조참의(兵曹參議) 등을 역임하다가 천주교인으로 지목 받아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보외(補外)되기도 하였다. 그 뒤 곡산부사(谷山府使), 병조참지(兵曹參知),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내고 규장각(奎章閣)의 편찬사업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하여 유배를 당하였고, 유배지에서 학문연구에 전력하여 실학사상을 집대성하게 되었다.
 
그와 천주교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즉 그는 1770년 후반부터 천주교 서적을 읽기 시작하였고, 1783년에는 그의 형 정약전(丁若銓)과 함께 양근에서 서울로 향하는 배 안에서 이벽(李檗)과 천주교에 관해 토론하였다. 1784년에는 수표교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은 직후인 1785년에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나자 그는 척사(斥邪)의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곧 다시 교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 결과 1787년에는 이승훈 등과 함께 서학서(西學書)을 읽었다. 이 일이 정미반회사(丁未伴會事)를 통하여 문제시되고 있음을 보면, 그는 이때에도 신앙을 계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에 있어서 1791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해이다. 이때 진산사건(珍山事件)이 발생하여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죽음을 당하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거세게 일어나자 그는 분명히 배교하는 자세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그의 주변에는 중형(仲兄) 정약종(丁若鍾)을 비롯해서 많은 천주교인이 있었으므로 다른 척사론자와는 달리 교회에 대하여 온건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런데 1797년 그가 다시 서학도(西學徒)를 지목 받자 그는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이와 같은 비난을 반박하였다. 그리고 1799년에는 ≪척사방략≫(斥邪方略)을 저술하여 천주교에 대한 배격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고 한다. 한편 1801년에 이르러 신유박해가 발생하자 그는 체포되어 국문을 당했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철저히 부인하고, 자신이 알고 있던 천주교 지도자인 권철신(權哲身), 조동섬(趙東暹), 황사영(黃嗣永) 등을 고발하였고, 천주교신도를 색출하려면, 믿음이 약한 노비(奴婢)나 학동(學童)을 신문하여 정보를 밝히도록 제안해서 이것이 채택되기도 하였다.
 
그는 1801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帛書)사건으로 다시 신문을 받았고, 그 후 강진으로 유배되어 1818년까지 그곳에서 지내게 되었다. 1818년 유배지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자신의 배교를 크게 반성하고 자주 대재를 지켰으며 고신극기(古身克己)의 생활을 하면서 외부와의 연락을 묵상과 기도로 살아갔다고 달레(Dallet)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는 전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이 시기에 ≪조선복음전래사≫(朝鮮福音傳來史)를 저술하였고, 이 글은 다블뤼(Daveluy) 신부가 ≪한국천주교회사≫를 저술하기 위한 자료를 수집할 때 입수되어 초기 교회사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 이용된 바 있으나, 그 원본은 1863년 주교댁 화재 때에 소실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가 저술했던 ≪조선복음전래사≫는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초기 부분에 상당 분량이 인용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진 바 있다.
 
그는 1836년 유방제(劉方濟) 신부에게 종부성사를 받고 선종하였다. 그 자신은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심서≫(欽欽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를 비롯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의 저서들은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대부분이 수록되어 있다. ≪여유당전서≫에 수록된 여러 기록을 통해서 그와 천주교와의 관계를 확실히 밝히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이 저서에 나타난 기본사상을 분석하여 천주교신앙과 대비해 보는 방법을 통하여, 그와 천주교 신앙과의 관계가 좀 더 확연히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1775-1801년)
 
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황사영 백서 원본이 신유박해 순교 200 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의 절두산 순교박물관에 전시되었다. 그 동안 로마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던 황사영 백서는 1801년 황사영이 신유박해의 참상을 기록하고 신교의 자유를 얻고 교회를 재건하려는 자신의 개인적인 방안을 건의한 편지글로 한국교회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이다. 조선 조정의 잔인한 박해로 겨우 움튼 한국교회가 참혹하게 찢겨져 가는 현실을 바라보며 토굴 속에 숨어서 피눈물로 써 내려간 편지글, 가로 62㎝ 세로 38㎝의 흰 명주 천에 붓으로 쓰여진 깨알 같이 작은 해서체의 먹글씨, 122줄 1만 3384자 앞에서 200년 세월을 넘어 전해지는 황사영의 신앙적 열정을 느끼며 전율했다. 세월의 흔적이 어린 비단 위에 조금씩 번지기도 한 작은 글자들은 이제 우리들을 감격의 눈물로 역사 속에 젖어들게 하고 있다.
 
황사영은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났으며 남인 시파에 속하는 양반가문 출신이다. 정5품 정랑직을 역임했던 아버지 황석범이 일찍 돌아가시어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 이소사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본관은 창원이요 자를 덕소(德紹)라 한 그는 명문가의 자손답게 영특하고 학문에 뛰어났다. 그의 11대 할아버지인 황침이 한성판윤을 지낸 이래 10대에 걸쳐 벼슬이 떨어진 적이 없는 명문가 출신인 그는 수염이 아름다운 귀공자로도 주변의 환심과 기대를 받고 있었다.
 
1790년(정조 14년) 황사영은 열여섯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에 급제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정조 임금은 특별히 그의 학문적 재능을 칭찬하며 격려하여 스무 살이 되면 탁용하겠다는 중용을 약속하여 그의 장래를 보장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더욱 학문에 전념하도록 급양비를 하사하였는데 이 때, 임금님이 그의 손을 잡아 주어 어무가 내린 영광을 입었다. 황사영은 이 영광을 표시하기 위하여 당시의 관례에 따라 비단으로 그 손을 감고 다녔다. 이로서 절대군주제도 아래 신분계급 사회였던 당시의 황사영은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을 온전히 다 갖추었다.
 
황사영은 진사시에 급제했던 그 해에 혼인을 하여 정란주(보명은 명련)를 아내로 맞아 들였다. 이 결혼은 그의 인생에 있어 귀중한 전환점이 되게 하였다. 부인인 정란주는 진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그 명성이 자자한 정재원의 네 아들 중 맏이인 정약현의 맏딸이었다. 정약현은 한국 초기교회의 뛰어난 지도자 정약종과 다산 정약용의 맏서형이 되니 황사영은 정약종과 정약용의 조카사위가 된 것이다.
 
황사영은 이 무렵인 1791년 이승훈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았으며 정약종, 홍낙민과 함께 천주교 교리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하고, 특히 처숙인 정약종 형제들로부터 교리를 익히게 되어 알렉시오란 세례명으로 영세 입교하였다.
 
천주교 신자가 된 황사영은 관직의 길을 포기하고 교리연구에 몰두했다.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춘 그는 현세의 행복을 버리고 구원의 학문이 아닌 다른 학문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1795년에는 주문모 신부를 최인길의 집에서 만난 뒤 주신부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양반인 그는 평민신분의 양인들과 어울려 남송로, 최태산, 손인원, 조신행, 이재신 등 다섯 사람과 함께 명도회 단위 조직을 구성하여 이끌었다. 그리고 1796년에는 이승훈, 홍낙민, 유관검, 권일신, 최창현 등 당시 교회의 주요 인물들과 함께 서양선교사 파견 요청을 위한 일에 동참하였다. 그는 1798년부터 자신의 고향을 떠나 서울 애오개(아현동)와 북촌에 머물며 신자들의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천주교 서적을 필사하여 생계를 유지하며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로 부상해 갔다.
 
마침내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에 대한 체포령도 내려졌다. 그는 체포를 피해 신앙생활을 바로 할 곳을 찾아 방황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금령이 강화되니 친척과 친구들 가운데 천주교를 버리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 결과 이것이 세상을 구하는 양약이라고 판단하였기에 온갖 성의를 다하여 신봉하게 되었다"고 증언한 바와 같이 그의 신앙을 지켰다. 그는 신앙생활 그 하나를 바로 하기 위하여 스스로 이씨 성을 가진 상주로 변장하고, 김한민과 함께 서울을 벗어나 충청도 제천 땅 배론으로 숨어들어 김귀동의 집 옹기가마 토굴에 은신하였다.
 
일찍이 진사시에 급제하여 정조 임금으로부터 특별한 칭찬과 격려를 받았던 그는 이제 이름 석 자도 밝히지 못한 채 토굴 속에 몸을 숨겼다. 진정 세상을 구하는 양약이 이것뿐이기에 그 구원을 위한 학문 밖에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그의 학문과 신앙이 조선조정의 일방적인 박해로 모욕을 당하고, 신앙의 동지들은 형장의 죄수처럼 처형되고 있음을 보는 그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그는 눈물과 기도로 신앙 동지들의 장한 순교의 모습을 정리해 두었으리라. 마침내 주문모 신부마저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박해과정을 증언하고 조선교회를 재건해야 할 사명을 통감했으리라! 그는 이 역사적 소명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유명한 백서를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출처 : 김길수, 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가톨릭신문, 2001년 12월 9일]
 
 
복자 정철상 가롤로(?-1801년)

복자 정철상 가롤로 초상화.정철상(丁哲祥) 카롤로는 경기도 광주의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에 순교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그의 부친이고, 1839년에 순교한 유조이 체칠리아 성녀는 그의 계모이며, 같은 해에 순교한 정하상 바오로 성인과 정정혜 엘리사벳 성녀는 그의 동생들이다.

정 가롤로는 어려서부터 부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또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이로 말미암아 집안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온 힘을 다하여 천주를 공경하고, 온 마음을 다하여 천주를 사랑하는 데에만 힘썼다.

1794년 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정 가롤로는 부친과 함께 한양으로 올라가서 성사를 받았다. 주 야고보 신부는 이후 경기도 광주에 있는 정 가롤로의 집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 무렵 정 가롤로는 포천의 유명한 신자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정 가롤로가 20세가량 되었을 무렵인 1801년에 신유박해가 발생하였다. 이때 부친과 숙부들이 체포되어 의금부로 끌려가자, 그는 그들을 따라가 의금부 인근에 머물면서 옥바라지를 하였다. 이를 본 관리들이 그에게 ‘주 신부의 거처를 밀고하여 부친의 목숨을 구하라.’고 하였지만, 그는 결코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부친이 순교하던 4월 8일에, 정 가롤로는 의금부의 명에 따라 체포되어 형조에서 문초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있는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대면서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보호하려고 하였다. 그의 마음에는 천주를 위하여 죽겠다는 생각과 부친의 뒤를 따라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형조의 관리들은 문초를 하는 동안 정 가롤로의 생각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이에 그들은 그를 옥으로 데려가도록 하였고, 그는 한 달 이상을 옥에 갇혀 있어야만 하였다. 그런 다음 최필제 베드로, 윤운혜 루치아 등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이었다.

형조에서 정철상 가롤로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 내용은 이러하였다.

“너는 천주교에 깊이 빠져, 집안 제사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요사한 스승(곧 주문모 야고보 신부)을 보호하려고 송곳으로 찔러도 말하지 않았다. …… 주문모를 맞이하여 거처하도록 하고, 흉악한 무리들을 불러서 모임을 가졌으며, 개나 돼지처럼 행동하면서 인간의 윤리를 무너뜨린 죄는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정철상 가롤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성 정하상(丁夏祥) 바오로(1795-1839년)

 
성 정하상 바오로(박덕순 작).성 정하상 바오로(Paulus)는 남인 양반의 후예로 경기도 양근 지방 마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씨 가문에서 최초로 신앙을 받아들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이며, 1801년에 그의 맏아들 정철상 카롤루스와 함께 순교하였고, 어머니 유 체칠리아는 1839년 11월 순교하였다. 아버지가 순교할 때에 그는 겨우 일곱 살로 그의 모친과 누이 정 엘리사벳(Elisabeth)과 함께 풀려났다.
 
그러나 가산이 모두 몰수당하자 살길이 막연하여 경기도 양근 지방 마재에 있던 그의 숙부인 정약용 요한에게 의지하고 살았다. 그러나 숙부가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 가 있던 때였으므로 외교인 친척들로부터 천대와 냉대를 받았지만, 바오로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기도와 교리를 배웠다. 하지만 외교인들 틈바구니 속에서는 신자의 본분을 지키기가 어려워 20세 때에 서울로 올라와 조증이 바르바라(Barbara)의 집에 머물면서 목자 없는 조선교회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교회 재건을 모색하였다.
 
그는 함경도에 귀양 가 있던 한학자 조동섬 유스티아누스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양반 신분을 감추고 어떤 역관의 집에 하인으로 들어가 살다가 북경에 가서 성세와 견진과 성체 성사를 받고 주교에게 성직자 한 분을 요청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북경까지 9회, 변문까지는 11회나 왕래하였다.
 
그는 유진길, 조신철 그리고 강진에 유배 가 있는 삼촌 정약용의 자문과 후원으로 끊임없이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로마 교황에게 탄원서를 보내는 한편, 북경 주교에게도 서신 등을 보냄으로써 마침내 조선교회가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되고, 동시에 조선 독립교구가 설정되었다. 마침내 그는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를 모셔 들이고, 모방,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범 주교까지 모셔 들여 자신의 집에 모셨다.
 
앵베르 주교는 바오로가 사제가 되기에 적당하다고 여겨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던 중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주교를 피신시키고 순교의 때를 기다렸다. 이때 그는 체포될 경우를 대비하여 “상재상서”를 작성했는데, 이것은 조선교회 최초의 호교론이다. 그는 이 속에 박해의 부당성을 뛰어난 문장으로 논박했기 때문에 조정에서까지 이 글에 대하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1839년 7월 11일, 포졸들이 바오로의 집에 달려들어 그와 노모 그리고 누이를 잡아 포도청에 압송하여 바오로와 4대 조상까지의 이름을 명부에 올리고 옥에 가두었다. 이튿날 상재상서를 포장대리에게 주니 사흘 후 문초를 시작하였다. 바오로는 무서운 고통을 강인하게 참아나갔고 배교하라고 엄명하였으나 거절하자 옥에 가두었다. 며칠 뒤에 다시 끌려나와 톱질 형을 받아 살이 떨어져 나가고 골수와 피가 쏟아져 나왔다. 또한 그는 샤스탕과 모방 신부의 은신처를 대라고 했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그 후 두 신부가 자수한 다음 또 심문을 받고 세 차례의 고문을 받았다. 그리하여 1839년 9월 22일, 서양 신을 나라에 끌어들인 모반죄와 부도의 죄명으로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정정혜(丁情惠) 엘리사벳(1797-1839년)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이콘연구소 4기 회원 공동작).성녀 정정혜 엘리사벳(Elisabeth)은 학문으로도 유명하고 또 교회 설립자 중의 한 분이며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 순교한 정약종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딸이고, 어머니는 유 체칠리아이며 동생은 최초의 신학생인 정하상 바오로(Paulus)이다. 집안 전체가 열심한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일찍부터 성교회의 진리를 몸에 익히며 성장하였다. 1801년에 아버지 정 아우구스티누스와 오빠 정 카롤루스(Carolus)가 순교하였다. 엘리사벳도 어머니 유 체칠리아와 자기 오라버니 둘과 같이 붙잡혀 들어갔으나 조정에서 그들의 재산을 몰수한 후 젊은 부인과 어린 아이들은 놓아주었다.
 
그러나 살 길이 막연했던 그녀의 어머니는 마재의 시동생 정약용 요한의 집으로 갔으나 그곳에서 친척들의 냉대와 구박을 받으며 몹시 궁핍하게 지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어머니가 당하는 수많은 슬픔을 함께 나누며 살았다. 그녀는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 나갔고, 가난과 추위와 굶주림을 이겨나가는 데 익숙할 정도였다. 또한 바느질과 길쌈으로 어머니와 장차 신자들의 일꾼이 될 자기 동생 정하상 바오로의 뒷바라지를 하였다. 처음에는 천주교가 집안을 망쳐 놓았다 하여 적대시하던 몇몇 친척들도 그녀의 아름다운 모범을 보고 또 그녀의 덕에 감화되어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어려서부터 주님께 동정을 허원하였던 그녀는 언제나 단정하게 지냈지만, 30세쯤에 이르러서는 마음이 약하여져 5년 이상이나 강한 유혹을 당하였다. 그녀는 이 유혹을 이기기 위하여 기도와 단식과 편태를 사용하였는데, 마침내 그녀의 눈물은 완전한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선교신부들이 조선에 오기를 절실히 원하여 전심으로 그 뜻을 주님께 청하였다. 이리하여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와 두 분 신부가 입국하자 자기 집에 모시고 주밀하게 보살펴 드림으로써 감사의 뜻을 표시하였다. 앵베르 범 주교는 “엘리사벳은 참으로 여회장의 일을 불만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앙과 신심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박해가 일어남을 보고 무서움을 감추지 못하였으니, “내게는 과연 짐이 될까봐 무섭다”고 했던 것이다. 박해의 조짐을 알고 주교가 서울을 떠나 시골로 피신해 있는 동안 엘리사벳과 어머니 그리고 동생 정하상 바오로는 옥에 갇힌 이들을 보살펴 주다가 결국 그녀도 관헌에게 붙잡혔다.
 
그녀는 7회의 혹독한 고문과 곤장을 320대나 맞았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잠시도 평온을 잃지 않았고 관원은 그를 이길 희망을 버리고 10월 2일 형조로 보냈으며, 형조에서 다시 6회의 심문과 고문을 당한 후 사형선고를 받았다. 엘리사벳은 형장으로 떠나면서도 신자들에게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 많이 해 주세요”라는 말밖에는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그녀는 마침내 12월 29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43세를 일기로 참수되어 순교하여 동정 순교자의 월계관을 얻었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이상 가톨릭 성인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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