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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 청양 다락골 성지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이름도 없이 줄지어 신앙을 증거하는
지번주소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676-1 
도로주소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다락골길 78-6
전화번호 (041)943-8123
팩스번호 (041)943-8124
홈페이지 http://www.daracgol.or.kr
전자메일 swy9643@hanmail.net
성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성인(1805-1839년)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Franciscus)는 두 번째 방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부친으로 충청도 홍주군 다래골의 어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주교의 계명을 지켰다. 그는 원래 성질이 괄괄해서 불같이 일어나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신앙의 힘으로 많은 노력을 한 결과 사람들은 그가 본래 성질이 온순한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한다. 점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는 우상숭배에 빠진 주위 사람들 속에서는 참 신앙생활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서울 벙거지골이라는 동네로 이사를 하였다. 그러나 이사를 하자마자 외교인과의 송사 문제로 가산을 탕진하게 되어 가족을 이끌고 산골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생활하다가 마지막으로 자리 잡은 곳이 과천 고을 수리산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자기의 본분을 지키며 종교서적을 자주 읽고 가난 중에도 애긍시사를 하니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여 그의 권고를 즐겨 듣고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멀리서도 찾아오곤 하였다. 최 토마스 신부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 하였다. “저의 부친은 자주 묵상하고 신심서적을 대하셨으며, 언제나 종교와 신심외의 것은 말하지 아니하셨으며, 아버지의 말씀은 힘 있고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모든 이에게 천주의 사랑을 심어 주셨다.”
 
기해박해가 엄습하고 또 서울과 인근 지방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을 때, 회장으로 임명된 그는 많은 의연금을 모아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아 주었고, 순교자의 시체를 매장하였다. 그리고 집안사람들에게 순교토록 준비시킬 때가 된 것을 알고 성패와 성물을 감추었으나 서적은 감추지 아니하였다. 이것을 보고 조카 최 요한이 놀라서 “다른 교우들은 혐의를 받을만한 것을 모두 감추는데 이 책을 그렇게 내어 두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성물은 불경한 무리들이 더럽히지 못하게 감추는 것이지만, 서적이야 어디 강복한 물건이냐? 군사가 전쟁 때에 병서를 참고하지 않고 언제 하겠느냐?” 하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1839년 7월 31일 밤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이 수리산에 이르러 고함을 치며 최 프란치스코의 집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마치 가장 친한 친구를 대하듯 포졸들을 친절한 태도로 맞이하였고, 그의 이러한 태도에 포졸들은 안심하고 누워 잠을 잤다. 해뜰 무렵에 포졸들을 깨워 음식을 대접하고는 프란치스코와 남자들과 큰 아이들이 앞장서고, 그 뒤로는 부인들과 젖먹이들이 따라가고, 맨 뒤에는 포졸들이 따라왔다. 때는 7월이라 찌는 듯한 더위로 빨리 걷지를 못하였고 어린 아이들은 피곤하여 울부짖었다. 행인들은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사람도 있고 불쌍하게 보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그는 “형제들아 용기를 분발하라. 너희 앞을 서서 갈바리아로 올라가시는 오 주 예수를 보라!”고 하며 격려하였다. 일행은 날이 저물어서야 옥에 당도하여 밤을 지냈다.
 
포장은 프란치스코를 두 차례나 주리를 틀게 하고, 뾰족한 몽둥이로 살을 찌르게 하여 배교한다고 할 때까지 고문을 하게 하였다. 프란치스코의 아들 하나가 나라 밖으로 나갔다는 것을 안 포장은 더욱 분이 치밀어서 무지하게 매질을 하여 그의 팔과 다리의 뼈가 어그러졌다. 그는 태형 3백 40도와 곤장 1백 10도를 맞았다. 다른 많은 교우들은 석방되었으나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이는 프란치스코와 그의 아내와 일가 부인 3명뿐이었다. 그 후 프란치스코는 포장대리 앞에 끌려 나가 치도곤 50대를 맞으니 그것이 최후의 출두요 형벌이요 신앙고백이었다. 옥으로 돌아온 그는 “예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날에 목을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한 후 몇 시간 뒤에 숨을 거두었다. 때는 1839년 9월 12일이요,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성인사전]
 
 
복자 이성례 마리아(1801-1840년)

 

1801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이성례(李聖禮) 마리아는, 내포 지역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의 집안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남성처럼 씩씩한 정신을 지녔던 그녀는 17세 때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혼인하여 홍주 다락골의 새터(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살면서 1821년에 장남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낳았다.

이 마리아는 언제나 집안일을 지혜롭게 꾸려 나갔고, 일가친척들이 불화 없이 지내도록 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 나이가 어린 남편을 공경하고 그의 말에 순종하면서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 나갔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는 가족과 함께 한양으로 이주하였으며, 박해의 위험이 있자 다시 강원도를 거쳐 경기도 부평,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안양 3동)로 이주하였다. 그동안 장남 최양업 토마스는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떠났다.

이처럼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자주 이주하는 가운데서도 이 마리아는 모든 어려움과 궁핍을 기쁘게 참아 내었다.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지쳐서 칭얼거릴 때면, 요셉과 성모 마리아가 이집트로 피난 가시던 이야기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인내심을 갖도록 하였다. 또 수리산에 정착한 뒤로는, 남편을 도와 이 마을을 교우촌으로 일구는 데 노력하였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 남편 최 프란치스코가 한양을 오가면서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 묻어 주고 교우들을 돌보자, 이 마리아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자식들을 보살폈다. 그러던 가운데 포졸들이 마침내 수리산 교우촌으로 들이닥쳤다. 이때 그녀는 음식을 준비해서 포졸들을 대접한 다음, 남편 일행의 뒤를 따라 어린 자식들과 함께 한양으로 향하였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이 마리아는 남편이나 다른 자식들과 격리되어, 젖먹이 최 스테파노와 함께 여인들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문초와 형벌을 받아 팔이 부러지고 살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졌으나, 용감하게 신앙을 증언하였다.

이 마리아는 이러한 육체적인 고통보다 갓난아기에 대한 모성애 때문에 더 큰 고통을 느껴야만 하였다. 젖은 나오지 않았고, 먹일 것이 없어서 한 살밖에 안 되는 최 스테파노가 굶어 죽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남편이 매를 맞다가 순교하고, 최 스테파노가 더러운 감옥 바닥에서 죽어 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던 그녀는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이 마리아는 자신의 본디 마음과는 달리 현세적인 구원을 도모하려는 그릇된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장남 최양업 토마스가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이내 그녀는 다시 체포되어 형조로 압송되었다.

이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인자하심으로 당신 여종의 나약함을 구원해 주시는 은혜를 베푸셨다. 형조에 이르자, 이 마리아는 용감한 신자들의 권면으로 큰 용기를 얻게 되었다. 이제 그녀는 이전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쳤고, 재판관 앞으로 나가 전에 한 말을 용감하게 취소하였다. 또 모성애를 비롯하여 모든 유혹을 용감히 이겨 냈으며, 막내아들을 하느님께 바친 것을 기뻐하였다. 이 무렵 그녀의 둘째 아들인 최의정 야고보가 한 달 이상 감옥을 오가면서 모친과 신자들의 시중을 들었다.

 

이 마리아는 관례대로 마지막 문초와 형벌 끝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감옥으로 찾아온 자식들에게 “형장에는 오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자신의 마음이 약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녀는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이제는 다들 가거라. 절대로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마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1840년 1월 31일(음력 1839년 12월 27일), 이성례 마리아는 동료 신자 6명과 함께 형장으로 정해진 당고개(현, 서울 용산구 원효로2가)로 끌려 나갔다. 그런 다음 영광스럽게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녀의 나이는 39세였다. 순교 당시까지 그녀는 안온하고 평화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이성례 마리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1821-1861년)

 

탄생과 성장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는 1821년 3월, 충청남도 청양의 다락골 인근에 있는 새터 교우촌에서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순교자 이성례 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던 부친을 따라다니다가 경기도 부평을 거쳐 안양에 있는 수리산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이 수리산 마을은 그 뒤 신자들이 하 둘 모여들면서 비밀 신앙 공동체로 변모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 대목구의 전교를 위임받은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는 선교사들을 조선으로 파견하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경 감시가 심한 데다가 박해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으므로, 서양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난관을 극복하고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는 프랑스 출신의 성 모방 베드로 신부였다.

1835년 말, 조선 천주교회에서 파견한 밀사들의 안내로 입국한 모방 신부는 곧바로 전국의 신앙 공동체들을 순회하기 시작하였고, 이듬해 초에는 부평에 있는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최양업 토마스를 한국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15세였다.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양업 토마스는 1836년 2월 6일 서울의 모방 신부 댁에 도착하여 라틴어 수업을 받았다. 이어서 모방 신부가 신학생으로 간택한 최방제 프란치스코가 3월 14일에, 김대건 안드레아가 7월 11일에 각각 도착하여 함께 생활하였다.

마카오 유학과 부제 서품

최 토마스는 1836년 12월 2일,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성경에 손을 얹고 순명을 서약하고, 다음 날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하여 중국 대륙을 남하하여 다음 해 6월 7일 마카오에 있던 파리 외방 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도착하였으며, 이때부터 그곳에 임시로 설립된 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마카오에서의 유학 생활은 1842년까지 계속되었는데, 1837년 11월에는 동료인 최방제 프란치스코가 열병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고, 1839년에는 마카오의 소요 때문에 필리핀의 마닐라로 장소를 옮겨 수업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다가 같은 해 말에 마카오로 돌아왔다.

그러나 신학생 최 토마스는 아직 공부가 끝나기도 전인 1842년 4월에 마카오를 떠나게 되었다. 한국과 통상 조약을 원하는 프랑스 함대에서 통역자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이때 극동 대표부의 장상인 리브와(Libois) 나폴레옹 신부는 박해로 끊어진 조선 천주교회와 연락을 기대하고 최 토마스와 김 안드레아를 각각 다른 프랑스 함대에 승선토록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가 남경에 도착한 다음에 더 이상의 북진을 원하지 않게 되자, 최 토마스와 김 안드레아는 프랑스 함대에서 내려 요동으로 가게 되었다. 조선으로 들어가고자 입국로를 탐색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최양업 토마스는 만주의 소팔가자로 거처를 옮겨 조선 대목구의 부주교인 페레올(Ferreol) 요한 주교에게 계속 수업을 받았고, 1843년에는 리브와 신부를 통해 프랑스 파리의 무염 성모 성심회에 가입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조국에서 일어난 박해와 순교자들의 소식을 들었다. 이때 그는 프랑스로 귀국해 있던 스승 르그레즈와(Legregeois) 베드로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하였다.

“저는 우리 부모님과 형제들을 따라서 공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저의 신세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 용사들의 그처럼 장열한 전쟁에 저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 정말 저는 부끄럽습니다! 이렇듯이 훌륭한 내 동포들이며, 이렇듯이 용감한 내 겨레인데, 저는 아직도 너무나 연약하고 미숙함 속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 당신 종들의 피가 호소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당신의 넘치는 자비와 당신 팔의 전능을 보이소서. 언제쯤이나 저도, 신부님들의 그다지도 엄청난 노고와 저의 형제들의 고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수난에 부족한 것을 채워, 구원 사업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

신학 수업을 계속하던 최양업 토마스는 1844년 12월 10일경에, 동료 김대건 안드레아와 함께 페레올 주교에게 부제품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김대건 안드레아 부제가, 사제품을 받고서 페레올 주교, 성 다블뤼(Daveluy) 안토니오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한 뒤에도, 소팔가자에 남아 있으면서 매스트르(Maistre) 요셉 신부와 함께 귀국로를 찾고자 지속적으로 노력하였다.

사제 수품과 귀국

귀국로를 탐색하는 동안 최 토마스 부제는 조선 천주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1846년의 박해와 동료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조국의 애통한 소식을 알렸다.

“마침내 지루했던 기나긴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고, 저의 동포들한테 영접을 받으리라 희망하면서 크게 기쁜 마음으로 용약하여 변문(한중 국경의 성문)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변문에 도착하여 보니, 이 희망이 산산이 무너졌습니다. 너무나 비참한 소식에 경악하였고, 저와 조국 전체의 가련한 처지가 위로받을 수 없을 만큼 애통하였습니다. …… 특히 저의 가장 친애하는 동료 안드레아 신부의 죽음은 신부님께도 비통한 소식일 것입니다.”

조선 천주교회 밀사들의 만류로 귀국을 포기한 최 토마스 부제는 극동 대표부가 이전해 있던 홍콩에 도착한 뒤에 ‘한국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귀국로 탐색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1847년 8월에는 프랑스 군함을 타고 조선의 해안에 도달하였지만 밀사들을 만나지 못하여 귀국에 실패하고 말았다.

다시 상해로 거처를 옮긴 최양업 토마스 부제는 1849년 4월 15일, 마침내 서가회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이때 그에게 사제품을 준 사람은 예수회원으로 강남 대목구장으로 있던 마레스카(Maresca) 주교였다.

사제품을 받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그해 5월에 상해를 출발하여 중국 요동 지방으로 가서 성 베르뇌(Berneux) 시메온 신부 아래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1월에 매스트르 신부를 다시 만나 귀국을 시도한 끝에, 12월 3일 조선 천주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귀국하게 되었다. 이때 매스트르 신부는 발각될 위험이 있었으므로 조선에 입국하지 못하였다.

사목 활동과 선종

귀국하자마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난 뒤, 각처에 숨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기 시작하였는데, 1850년 초부터 6개월 동안 5개 도와 5천여 리를 걸어다니며 3,815명의 신자를 방문하였다. 이후, 진천 배티를 사목 중심지로 삼게 되었다.

이러한 사목 활동은 11년 6개월여 동안 꾸준히 계속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휴식 기간을 이용하여 한문 교리서와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하였고,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을 도왔으며, 신학생들을 말레이 반도에 있는 페낭(Penang) 신학교로 보냈고,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였다.

물론 전국에 산재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기란 쉽지 않았다. 도중에 최 토마스 신부는 서양인으로 오인을 받아 마을에서 쫓겨나기도 했고, 포졸들의 습격으로 죽을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다. 특히 1859년에는 순방 도중에 발각되어 포졸과 외교인들로부터 흠씬 두들겨 맞고, 주막에서 쫓겨나 반쯤 나체가 된 몸으로 눈 쌓인 밤을 헤맨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의 신앙과 조국애, 그리고 신자들에 대한 애정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1860년 경신박해 때,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몇 명의 신자들과 함께 경상남도의 한 모퉁이에 갇혀서 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나 다른 선교사들과 연락이 끊긴 채 지내야만 하였다. 이때 그는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다시 서한을 보내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다음과 같이 조선 천주교회를 도와주십사고 부탁하였다.

“우리를 환난에서 구하소서. 엄청난 환난이 우리에게 너무도 모질게 덮쳐 왔습니다. 원수들이 우리에게 달려들고 있습니다. 당신의 보배로운 피로 속량하신 당신의 유산을 파멸시키려 덤벼들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높은 데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을 대항하여 설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경애하올 신부님들께서 열절한 기도로 저희를 위하여 전능하신 하느님과 성모님께 도움을 얻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

다행히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갇혀 있던 곳을 빠져나와 경상도 남부 지방의 사목 방문을 다 마친 다음, 베르뇌 주교에게 성무 집행 결과를 보고하고자 길을 나섰다. 그러나 과로에다 장티푸스까지 덮쳐 1861년 6월 15일에 문경읍 또는 진천 배티 교우촌에서 선종하고 말았으니, 이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이 소식을 들은 베르뇌 주교는,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 교장인 알브랑(Albrand)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신심과 열심, 그리고 평소에 보여 준 사제로서의 분별력을 칭송하고, 동시에 그를 잃은 아쉬움을 표시하였다.

“최 토마스 신부는 신심,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과 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귀중한 일에서는 훌륭한 분별력으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유일한 한국인 신부 최 토마스가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맺은 성사 집행 뒤에, 내게 자신의 업적을 보고하려고 서울에 오던 중, 지난 6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착한 신부가 처해 있는 위험에 대한 소식을 맨 처음 받은 푸르티에(Pourthie) 신부는 그에게 마지막 성사를 줄 수 있을 만큼 일찍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 신부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어 가는 그의 입술에서 아직 새어 나오는 말이 단지 두 마디 있었으니, 그것은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이었습니다. …… 최 토마스 신부는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저를 난처하게 합니다. 그가 성무를 집행하던 구역에는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서양 사람이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많은 마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이 서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배론 신학교에서 170-180리 지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그 당시 신학교에 있던 푸르티에 신부가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곧장 최 토마스 신부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그가 들을 수 있는 말은 아주 열성적으로 부르는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뿐이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선종 뒤, 5개월이 지난 다음, 베르뇌 주교의 주례로 최 신부의 장례가 성대하게 치러졌고, 그의 시신은 배론 신학교 뒷산에 안장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성 모방 베드로 신부(1803-1839년)
 
성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 신부의 한국 성은 나(羅)씨이고, 이름은 세례명인 베드로(Petrus)를 한문으로 음차하여 백다록(伯多祿)이라 하였다. 1803년 9월 20일 프랑스 칼바도스(Calvados) 지방의 바시(Vassy)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세계의 끝까지 가서 우상 숭배자들에게 포교를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1829년 5월 13일 사제로 서품된 그는 선교사의 꿈을 꽃피우기 위하여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중국 사천(四川) 교구로 파견되었다. 포교지로 가던 도중에 그는 조선의 초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주교와 동행하기를 희망하였다. 주교는 그의 경건함과 열성적인 면을 생각하여 기꺼이 조선의 선교사로 받아들였다.
 
주교가 조선 입국을 목전에 두고 만주에서 선종하자, 그는 당시 주교를 영접하기 위하여 그곳에 와 있던 조선의 교우 5명을 만나 조선에 입국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천신만고 끝에 의주 변문을 통과하여 입국에 성공하였다. 이때가 1836년 1월 12일로 그는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서양 선교사가 되었다.
 
조선에 입국한 후 모방 신부는 조선어를 배우는 한편 우선 한문으로 성사를 주기 시작하였고, 서울에서 시작하여 다음에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열여섯 곳 내지 열일곱 곳의 교우촌을 돌며 포교를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 해 12월까지는 어른 2백 13명에게 세례를 주고, 6백 명 이상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 또 가는 곳마다 회장들을 뽑아 주일과 축일에 교우들을 모으고, 그 모임에서 공동으로 기도를 드리고 교리문답과 복음 성경과 성인전기들을 읽고 배우도록 지도하기도 하였다.
 
모방 신부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큰 관심을 두어 최양업 토마스(Thomas), 최방제 프란치스코(Franciscus),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 등 세 소년을 택하여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에게 필요한 덕행을 가르치는 한편, 당시의 상황 하에서 조선 내에서의 교육이 불가능했기에 1836년 12월 2일에는 이들을 ‘마카오’로 보내어 정식으로 신학을 배우도록 하였다.
 
이듬해 1월 15일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모방 신부는 곧 양평 지방으로 내려가 전교하는 동시에 조선어를 다시 배워 조선어로 성사를 주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몸이 쇠약해져 있었고, 그래서 결국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 포교를 하던 중 열병에 걸려 서울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상태가 절망적이었기 때문에 샤스탕 신부로부터 병자성사까지 받았으나 3개월 후에 겨우 회복되었다. 1837년 말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자, 1839년까지의 선교사들의 활동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기해년에 이르러 조정에서는 다시 천주교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선교사들도 그 대상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앵베르 주교의 권유로 자수하여 홍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를 당하여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1803-1839년)
 
성 쟈크 오노레 샤스탕(Jacques Honore Chastan) 신부의 한국 성은 정(鄭)씨이고, 이름은 본명인 야고보를 한문으로 음차하여 아각백(牙各伯)이라 하였다. 그는 1803년 10월 7일 프랑스 디뉴(Digne) 인근에 있는 마르쿠(Marcoux)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양떼 지키는 일로 부친을 도왔다. 그는 1823년에 신학교에 들어가 3년 만에 성품성사를 받고, 이듬해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교육을 받고 프랑스를 출발하였으나, 얼마동안 중국에 입국하지 못하고 말레이 반도의 페낭 신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하던 중, 브뤼기에르(Bruguiere) 주교가 조선 대목구의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파견된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동행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마카오’를 거쳐 중국 본토를 여행하는 동안에 그는 조선에 입국하여 있던 모방(Manbant, 羅) 신부로부터 입국의 안내를 적은 편지를 받았다. 1836년 말 조선의 교우 정하상, 조신철, 이광렬 등의 안내를 받아 변문을 통과한 후, “나는 천주의 영광을 위하고 사람들의 구원과 특히 나의 구원을 위하여 일을 할 것이므로 어떤 일이라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나는 기회가 오면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통을 감수할 힘을 주님께 기대합니다.” 하며 자신의 기쁨을 토로했다. 상복 차림을 하고 15일 동안을 걸어서 서울에 도착한 샤스탕 신부는 모방 신부를 만나 자신들의 봉헌과 희생의 각오를 새롭게 하였다.
 
샤스탕 신부는 서울에 머물면서 조선어의 초보를 배우기 시작하고, 2개월가량 성찰규식을 외운 다음 조선말로 백 명가량의 신자들에게 첫 고해성사를 줄 수 있었다. 그 후 샤스탕 신부는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성무집행을 계속하였다. 그동안 샤스탕 신부는 모방 신부와 함께 열심히 노력한 결과 1837년 한 해에 영세자 1천 2백 37명, 고해자 2천 78명, 영성체한 사람이 1천 9백 50명이라는 숫자를 기록하였다.
 
이윽고 기해년에 이르러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었다. 샤스탕 신부는 되도록이면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면서 맡은 바 업무를 수행하던 중, 1839년 기해박해로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체포되고 이어 자수를 권고하는 주교의 편지를 은신처에서 받았다. 앵베르 주교의 권고를 따라 그는 모방 신부와 함께 9월 6일 관청에 자수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9월 21일 성 마태오(Matthaeus) 축일에 새남터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샤스탕 신부의 나이는 35세였다.
 
샤스탕 신부와 다른 두 선교사들의 시체는 20여 일 동안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다가, 신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노고산에 안장되었다. 그 후 그들의 유해는 1843년에 발굴되어 삼성산에 안장되었다가 시복 수속이 진행된 1901년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로 옮겨졌고, 같은 해에 다시 명동 성당 지하묘지로 옮겨졌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이상 가톨릭 성인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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