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사적지 목록

교구 성지명     지역명     내용 검색

대전교구 > 홍주 순교성지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읍성 곳곳에 순교의 피가 흐른 충청도의 첫 순교터
지번주소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110-6 
도로주소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아문길 37-1
전화번호 (041)633-2402
팩스번호 (041)634-3217
홈페이지 http://www.hongjushrine.com/
문화정보 사적 제231호(홍성 홍주읍성)

복자 원시장 베드로(1732-1793년)

원(元)시장 베드로는 1732년 충청도 홍주 응정리(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의 양인(良人)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몇 해가 지난 1788-1789년 무렵, 곧 56-57세가 되었을 때, 사촌 형인 원시보 야고보와 함께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시장’은 그의 관명(冠名)이다.

어느 날 원 베드로는 집을 떠나 1년 이상 다른 지방에 가서 생활하면서 교리를 공부하였다. 그동안 그는 ‘천주교 신앙이 수천 년 동안 목숨을 보전해 주는 약’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이후에는 집으로 돌아와 친척과 친구들에게 천주교의 주요 교리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하느님의 은총이 그의 설명에 힘을 보태 주었고, 친척과 친구들은 마음이 움직여 하느님을 믿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때까지도 그는 세례를 받지 못하였었다.

본디 원 베드로의 성격은 사납고 야성적이어서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그러나 신앙을 실천해 나가는 동안 성격이 변하여 어떠한 일에서나 온화함을 보여 주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거나 이웃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는 데 열중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이름은 관장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관장은 포졸들을 보내 원 베드로와 원 야고보를 체포해 오도록 하였다. 이때 사촌인 원 야고보는 친구들의 권고에 따라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으나, 원 베드로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홍주 관아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내 원 베드로는 홍주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관장의 어떠한 강요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천주를 배반하거나 동료들을 밀고할 수 없으며, 교회 서적이 있는 곳도 말할 수 없다.”고 답변하였다. 관장은 화가 나서 형리들에게 주리를 틀고, 치도곤 70대를 치게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하느님과 부모님께 대한 본분과 천주교의 참된 도리를 설명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여러 달을 옥에 갇혀 있으면서 원 베드로는 자주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고 형벌을 받았는데,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포졸과 형리들에게 전교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교우가 그를 만나러 옥으로 찾아왔고, 이때 원 베드로는 그에게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동안 홍주 관장은 감사에게 모든 사실을 보고하였으며, 감사에게서 ‘원시장을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관장은 다시 원 베드로를 옥에서 끌어내 갖은 형벌을 가하였지만, 한결같은 그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관장은 마지막으로 혈육의 정에 호소해 보기로 하였다. 원 베드로를 기다리고 찾는 자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식들 이야기를 듣고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는 제 마음을 크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천주께서 친히 저를 부르시니, 어찌 그 목소리에 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홍주 관장은 이 사건을 빨리 마무리 짓고자 하였다. 그래서 관례에 따라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음식을 가져다주도록 하고는, 죽을 때까지 매질을 하도록 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관장은 다른 방법을 생각한 끝에, 그의 몸에 물을 붓고 밖에 내다 놓아 얼어 죽게 하라고 명하였다.

원시장 베드로가 덮어쓴 물은 이내 얼음으로 변하였다. 그런데도 그는 오로지 주님의 수난만을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에게 바쳤으니, 그때가 1793년 1월 28일(음력 1792년 12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1세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원시장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방 프란치스코(?-1799년)

방(方)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면천의 ‘여’ 고을 태생으로 감사의 비장(裨將)을 지낸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교우들 사이에는 ‘방 비장’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우연히 고향 인근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는 누구보다도 빨리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 다음 정산필 베드로 회장과 박취득 라우렌시오, 원시보 야고보 등과 자주 만나 교리를 연구하고 실천하였다.

교리를 실천하는 데 비상한 열심을 가졌던 방 프란치스코는 교우들 중에서도 단연 뛰어나게 되었다. 그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들으면서 자주 눈물을 흘렸으며, 그들과 같이 순교하기를 간절히 열망하였다.

그러던 중에 1797년의 정사박해로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방 프란치스코도 다음 해에, 홍주에서 체포되어 6개월 동안 많은 형벌을 당하고 사형 선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때 그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은 교우 두 명은 관례에 따라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음식을 받고는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방 프란치스코는 오히려 기쁨에 가득 찬 얼굴로 천주와 동정 마리아께 감사드리고 나서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것도 천주의 은혜이지만, 관장이 이렇게 후한 대우를 해 주는 것도 섭리의 은혜인데, 어째서 당신들은 슬퍼하고 풀이 죽어 있소. 그것은 마귀의 유혹이오. 만일 우리가 천당을 얻을 이렇게도 좋은 기회를 놓친다면, 나중에 또 어떤 기회를 기대할 수 있겠소.”

이때 천주께서 방 프란치스코의 권고와 격려에 효력을 부여해 주셨다. 그 결과 그의 두 동료들은 자신들의 나약함을 스스로 뉘우쳤고, 오래지 않아 거룩한 기쁨을 같이하였다. 그들 셋은 함께 홍주 읍내에서 순교하였는데, 순교일은 1799년 1월 21일(음력 1798년 12월 16일)이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방 프란치스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박취득 라우렌시오(1769?-1799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박취득(朴取得) 라우렌시오는 고향 인근에 전파된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이후 그는 한양으로 올라가 지황 사바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족과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에 노력하였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박 라우렌시오는 고향의 여러 교우들이 체포되어 옥에 갇히자, 자주 그들을 찾아가 위로하였다. 그러던 중에 하루는 관장 앞으로 가서 “무죄한 사람들을 사납게 매질하고 여러 달 동안 옥에 가둔다는 것은 무서운 죄가 아닙니까?” 하고 항의하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해미와 홍주 관아로 이송되어 잔인한 형벌을 당하였지만, 조금도 용기가 꺾이지 않았다. 그러나 옥에 갇힌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 조정에서 석방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으므로 순교의 영광을 얻지는 못하였다.

박 라우렌시오는 이때부터 원 야고보, 방 프란치스코 등과 교류하면서 교리를 실천하고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에 열중하였다. 그러던 중, 1797년의 정사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그에게 체포령이 내려지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지만, 아버지가 대신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면천 관아에 자수하였다.

이윽고 문초가 시작되었고, 박 라우렌시오는 그때마다 천주교 교리를 하나하나 설명해 나갔다. 화가 난 관장이 그에게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후 그는 다시 몇 차례의 문초와 형벌을 받고는 옥에서 여러 달을 지냈다. 그러다가 새 관장이 부임한 뒤 다시 문초를 받았으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신앙을 증거하고 홍주로 압송되었다.

홍주에서도 박 라우렌시오는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답변을 하였고, 갖가지 형벌을 인내로 참아 내었다. 그러자 홍주 영장은 화가 나서 ‘다리를 부러뜨리고, 죽도록 매를 치라.’고 한 뒤 옥에 가두었다. 이어 영장은 감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는데, 그때 감사는 ‘그놈의 다리를 치되, 열네 번을 때려도 항복하지 않거든 아주 죽여 버리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려보냈다.

이후 박 라우렌시오는 여러 달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자주 영장 앞으로 끌려 나가 형벌을 받았다. 또 옷이 벗겨진 채로 진흙 구덩이에 갇혀 밤새껏 추위와 비바람으로 고통을 받은 적도 있었다. 바로 이 무렵에 그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옥에 갇힌 지 두 달쯤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천주의 은총을 얻을 수 있는지 궁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잠결에 ‘십자가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였습니다. 이 발현은 약간 희미하기는 하였지만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박 라우렌시오는 모두 일천사백 대 넘게 맞았고, 8일 동안 물 한 방울을 마시지 못한 적도 있었다. 옥졸들은 이제 그가 죽은 줄로 알고 옷을 벗긴 다음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박 라우렌시오는 다시 옥으로 끌려 들어가자, “나는 굶겨도 죽지 않고 맞아도 죽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목을 매면 죽을 것이오.”라고 옥졸에게 말하였다. 실제로 이튿날 밤에 교우들이 그에게 다가가서 보니 모든 상처가 기적적으로 나아서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제서야 이를 요술이라고 생각한 옥졸이 새끼줄로 그의 목을 졸라 죽였으니, 이때가 1799년 4월 3일(음력 2월 2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약 30세가량이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박취득 라우렌시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황일광 시몬(1757-1802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황일광(黃日光) 시몬은 천한 신분 출신으로 어린 시절을 아주 어렵게 생활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그에게 이러한 생활을 보상해 주시고자 놀랄 만한 지능과 열렬한 마음과 매우 명랑하고 솔직한 성격을 주셨다.

황 시몬은 1792년 무렵 홍산 땅으로 이주하여 살던 중에 우연히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가 교리를 배우게 되었다. 그는 천주교 신앙을 접하자마자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고,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동생 황차돌과 함께 고향을 떠나 멀리 경상도 땅으로 가서 살았다.

교우들은 황 시몬의 사회적 신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를 애덕으로 감싸 주었다. 양반집에서도 다른 교우들과 똑같이 받아들여졌다. 그러자 그는 농담조로 이렇게 이야기하곤 하였다.

“나의 이러한 신분에도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

1800년 2월 황 시몬은 경기도 광주에 살고 있는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회장의 이웃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황사영 알렉시오, 김한빈 베드로 등 여러 교우들과 자주 교류하였다. 이제 그의 열심은 날로 더해져 모든 이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이르렀다.

그 뒤, 정 아우구스티노 회장이 한양으로 이주하자, 황 시몬도 아우와 함께 한양 정동으로 이주하여 땔나무를 해다 팔면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교회 일을 도왔다. 또한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교우들과 함께 미사에 참여하는 기쁨도 얻게 되었다.

1801년에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황 시몬은 땔나무를 하러 나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옥으로 끌려갔다. 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아무도 밀고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굳건하게 참아 냈을 뿐만 아니라, 재판관의 추상같은 호령에도 굴하지 않고 천주교를 ‘성스러운 종교’라고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저는 천주교 신앙을 올바른 길로 생각하여 깊이 빠졌습니다. 이제 비록 죽을 지경에 이르렀지만, 어찌 배교하여 천주교 신앙을 저버리겠습니까? 빨리 죽기만을 원할 따름입니다.”

그 결과, 황 시몬은 다리 하나가 부러지고 으스러질 정도로 잔인하게 매질을 당해야만 하였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았는데, 조정에서는 이와 함께 ‘황일광을 고향으로 보내 참수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따라 황일광 시몬은 고향인 홍주로 이송되었다. 이때 그는 걸을 수조차 없어 들것에 실려 가면서도 본래의 명랑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냈다. 또 아내와 아들이 최후의 순간까지 그를 도우려고 따라오자, 그들 때문에 어떤 유혹을 당할까 두려워 절대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다. 황일광 시몬은 홍주에 도착하는 곧바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는데, 이때가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황일광 시몬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이여삼(李~) 바오로(?-1812년)

순교자. 세례명 바오로. 1839년 순교한 이태권(李太權)의 숙부. 충청도 홍주(洪州)의 양반 가정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1791년 박해를 피해 가족과 함께 전라도로 이사해 살았고 1801년 신유(辛酉)박해가 일어나자 공주(公州)로 피신해 있다가 1802년 2월(음) 셋째 형과 둘째 형 이무명의 아들인 태권과 함께 체포되어 조카 태권은 풀려나고 형과 함께 유배되었다. 1812년 유배형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왔으나 다시 체포되어 홍주 관아에서 장하치명(杖下致命)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는 약 43세였다.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