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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 은이 성지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첫 사목지
지번주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 632-2 
도로주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은이로 182
전화번호 (031)338-1702
팩스번호 (031)338-1780
홈페이지 http://www.euni.kr
전자메일 yanggi-hl@casuwon.or.kr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1821-1846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는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 마을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대건의 아명은 재복(再福)이고 이름은 지식(芝植)이라고 하는데, 그의 집안은 열심한 구교 집안이다. 김대건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Pius)와 아버지는 순교로써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다. 신앙 깊은 순교자의 집안에서 성장한 김대건은 굳센 기질과 열심한 신덕으로 충실히 생활하던 중, 16세 때인 1836년에 모방 신부에 의해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가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 프란치스코는 병사하였으므로, 남은 두 신학생만이 훌륭히 학업과 성덕을 닦았으나 나이가 25세에 이르지 못하여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 무렵 파리 외방 선교회가 조선 교구를 담당하여 주교와 신부를 조선에 입국시켜 전교하고 있는 중이었으나, 조선이 외국과 수호조약을 맺지 않아 종교자유가 없었음으로 프랑스 루이 필립 왕이 파견한 함대의 세실 제독이 그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나섰다. 김대건은 세실 제독의 통역관이 되어 조선이 들어갈 메스트르 이 신부와 함께 에리곤 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세실 제독이 갑자기 조선 항해를 중지하게 되어 김대건은 혼자 육로로 본국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변문에 이르러 조선 사절단의 일원인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본국 소식을 자세히 듣게 되었는데, 성직자를 비롯하여 아버지와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국을 서둘러 그해 12월 29일 혼자 의주 변문을 거쳐 입국하였으나 중도에서 본색이 탄로날 위험이 생겨 다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김대건은 백가점(白家店)과 소팔가자(小八家子)에 머물며 메스트르 신부로부터 신학을 배우고,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고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다시 입국을 시도하여 고 주교와 함께 변문으로 왔으나 김 부제 혼자만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1845년 4월 주교와 신부를 맞이하기 위하여 상해에 갔다가 그 해 8월 17일 그곳의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 고 주교 집전으로 사제품을 받아 조선교회의 첫 사제가 되었다. 이어 8월 24일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횡당(橫堂) 신학교 성당에서 다블뤼 안 신부의 보좌를 받으며 첫 미사를 집전하였다.
 
같은 달 31일 고 주교와 다블뤼 안 신부를 모시고 라파엘호라 명명한 작은 목선을 타고 상해를 출발하여 1845년 10월 12일에 충청도 나바위라는 조그마한 교우촌에 상륙하였다. 김 신부는 선교활동에 힘쓰는 한편 만주에서 기다리는 메스트르 이 신부를 입국시키려고 애썼으나, 의주 방면의 경비가 엄해서 고 주교는 바닷길을 알아보라고 지시함으로, 백령도 부근으로 갔다가 순위도에서 1846년 6월 5일 밤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김 신부가 황해 감사 김정집의 심문에서 자신은 조선에서 출생하여 마카오에서 공부했음을 토로하자 황해도 감사는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이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하여 중신회의를 열고 서울 포청으로 압송케 하였다. 일부 대신들은 김 신부의 박학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에 탄복하여 배교시켜 나라의 일꾼으로 쓰자고 하는 의견도 있고 해서 배교를 강요했으나, 김 신부는 도리어 관리들을 교화시키려고 하자 사학의 괴수라는 죄목을 붙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는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인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 김 신부의 나이는 26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모방 베드로 신부(1803-1839년)
 
성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 신부의 한국 성은 나(羅)씨이고, 이름은 세례명인 베드로(Petrus)를 한문으로 음차하여 백다록(伯多祿)이라 하였다. 1803년 9월 20일 프랑스 칼바도스(Calvados) 지방의 바시(Vassy)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세계의 끝까지 가서 우상 숭배자들에게 포교를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1829년 5월 13일 사제로 서품된 그는 선교사의 꿈을 꽃피우기 위하여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중국 사천(四川) 교구로 파견되었다. 포교지로 가던 도중에 그는 조선의 초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주교와 동행하기를 희망하였다. 주교는 그의 경건함과 열성적인 면을 생각하여 기꺼이 조선의 선교사로 받아들였다.
 
주교가 조선 입국을 목전에 두고 만주에서 선종하자, 그는 당시 주교를 영접하기 위하여 그곳에 와 있던 조선의 교우 5명을 만나 조선에 입국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천신만고 끝에 의주 변문을 통과하여 입국에 성공하였다. 이때가 1836년 1월 12일로 그는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서양 선교사가 되었다.
 
조선에 입국한 후 모방 신부는 조선어를 배우는 한편 우선 한문으로 성사를 주기 시작하였고, 서울에서 시작하여 다음에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열여섯 곳 내지 열일곱 곳의 교우촌을 돌며 포교를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 해 12월까지는 어른 2백 13명에게 세례를 주고, 6백 명 이상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 또 가는 곳마다 회장들을 뽑아 주일과 축일에 교우들을 모으고, 그 모임에서 공동으로 기도를 드리고 교리문답과 복음 성경과 성인전기들을 읽고 배우도록 지도하기도 하였다.
 
모방 신부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큰 관심을 두어 최양업 토마스(Thomas), 최방제 프란치스코(Franciscus),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 등 세 소년을 택하여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에게 필요한 덕행을 가르치는 한편, 당시의 상황 하에서 조선 내에서의 교육이 불가능했기에 1836년 12월 2일에는 이들을 ‘마카오’로 보내어 정식으로 신학을 배우도록 하였다.
 
이듬해 1월 15일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모방 신부는 곧 양평 지방으로 내려가 전교하는 동시에 조선어를 다시 배워 조선어로 성사를 주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몸이 쇠약해져 있었고, 그래서 결국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 포교를 하던 중 열병에 걸려 서울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상태가 절망적이었기 때문에 샤스탕 신부로부터 병자성사까지 받았으나 3개월 후에 겨우 회복되었다. 1837년 말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자, 1839년까지의 선교사들의 활동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기해년에 이르러 조정에서는 다시 천주교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선교사들도 그 대상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앵베르 주교의 권유로 자수하여 홍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를 당하여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한이형(韓履亨) 라우렌시오(1799-1846년)
 
성 한이형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또는 라우렌시오)는 충청도 덕산에 살던 양반의 자제로 태어났다. 그는 성격이 강직하고 헌신적이며 열성이 지극하여, 14세 때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운 지 몇 주일 후 참으로 비상한 열심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는 여러 시간 동안 십자가 앞에서 묵상하였고, 전에 범한 죄를 진실한 마음으로 통회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주일과 축일에는 집에서 10여리 밖에 있는 신자 마을에 가서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는데,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거르는 일이 없었다.
 
그는 21세 때에 신자 처녀와 혼인하고 고향을 떠나 경기도 양지고을 은이 마을로 들어가 숨어 살았는데 신심만 두터운 것이 아니었다. 이들 부부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옷이 남루한 사람을 만나면 자기 옷을 주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집에는 늘 사람들이 몰려와 주막집 같을 정도였다. 사람들이 그에게 지나치게 애긍시사를 한다고 하면 그는 “헐벗은 이웃을 입히고 굶주린 이를 먹이는 것은 거저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때가 오면 천주께서 이자를 듬뿍 붙여 다 갚아 주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 당시 라우렌티우스는 약간의 밭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무리 일이 바빠도 주일 파공을 철저히 지켰으며, 밤에는 날마다 한 시간 동안 묵상하였고, 사순절에는 매일 단식을 하였다.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조선에 들어와 그의 이러한 신덕을 보고는 전교회장으로 임명하였다.
 
1846년의 병오박해가 시작되자 그는 얼마동안 숨어서 지내기로 하였다. 그러던 중 김대건 신부가 잡힌 후 포졸들은 집주인이 이신규 토마스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잡기 위해 먼저 그의 삼촌을 잡아 조카가 있는 곳을 물으니, 이 토마스의 삼촌이 포졸들을 은이 마을로 안내하였다. 포졸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그 동네 신자들은 도망한 뒤였으므로 그들은 라우렌티우스의 집을 둘러싸고 온 가족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내 놓아주고 라우렌티우스만을 포승으로 묶고 조롱하며 닥치는 대로 때렸다. 특히 그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대들보에 매어단 후 물매질을 하면서 배교하고 동교인들을 대라고 협박하였다. 라우렌티우스가 이를 거절하자 포졸들은 그의 두 다리를 결박하고 그 사이에 깨어진 접시며 질그릇 조각을 끼우고 굵은 밧줄을 발목에 걸쳐서 앞뒤로 잡아당겨 살을 톱질하듯 하였다. 그러나 라우렌티우스가 이러한 잔학한 고문을 잘 참아내며 신음소리 조차 내지 않았으므로 포졸들도 이에 감동하여 다른 신자들에게 “당신들이 정말 천주교 신자가 되려면 한이형과 같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그 후 포졸들은 그를 서울로 압송하였는데, 포졸들이 말을 태워 주겠다고 하여도 이를 거절하였고 또 상처 때문에 신발을 신을 수가 없어서 백 여리나 되는 산길을 맨발로 걸어 서울까지 갔다. 그는 서울에서도 전과 같은 고문을 받았으나 조금도 굽히지 않다가 순교하였는데, 그의 죽음은 교수형 혹은 장살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때는 1846년 6월 20일이요,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이상 가톨릭 성인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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