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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 남한산성 순교성지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걸어온 길, 시신 되어 나간 곳
지번주소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446 
도로주소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남한산성로 763-58
전화번호 (031)749-8522
팩스번호 (031)749-8524
홈페이지 http://www.남한산성순교성지.org
전자메일 master@nhss.or.kr
문화정보 사적 제57호
남한산성은 어떤 곳인가?
 
남한산성은 문자 그대로 남한산에 소재한 성곽이다. 남한산은 북한산에 대칭되는 이름으로서, 한수(漢水) 남쪽의 큰 뫼를 지칭한다. 남한산은 삼국시대 이래로 중요한 지리적 요충지로서 인근에 도읍을 정하였던 백제 사람들은 큰 뫼라는 뜻에서 한산(漢山)이라고 불렀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온조왕 13년 7월 한산 아래에 성책을 쌓고 위례성(慰禮城)의 민호를 옮겨 이를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라고 불렀으며, 근초고왕 26년에는 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고려사"에서는 백제 시조 온종왕이 위례성에 도읍했다가 그 13년에 한산 아래에 성책을 쌓고 위례성의 민호를 옮겨 살게 하고, 마침내 궁궐을 짓고 이듬해 도읍을 옮겨 남한산성이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한산을 요충지로 주목하고 이곳에 주장산성(晝長山城)이란 성곽을 쌓으면서 사람들은 주장산(晝長山)이라고 불렀고, 조선 초기 세종실록에서는 일장산(日長山)이라고 불렀다. 주장산이나 일장산이라고 부른 이유는 산성 안의 분지가 평탄하여 여느 산속과는 달리 해가 일찍 뜨고 늦게 짐으로 인해 낮이 길다 또는 해가 길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여겨진다.
 
공간적 측면에서 볼 때, 남한산은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반도를 동과 서로 갈라놓은 백두대간이 남으로 내달리면서 서편으로 여러 가지를 뻗쳤는데, 그 하나가 금강산에서 갈라진 한남정맥이다. 한국지리에서 이야기하는 광주산맥의 산줄기가 그것이다. 산줄기는 곳곳에 크고 작은 산악들을 형성하였는데, 대성산, 현등산, 예봉산, 검단산, 문형산, 남한산 등이 그러한 산악들이다. 그중에 한남정맥 중심에 남한산이 위치하고 있다.
 
경위도로는 동경 127˚ 10' 15", 북위 37˚ 29' 10"에 소재한다. 높이는 460미터로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세와 지형 그리고 주변과의 관계에서 예로부터 전략적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았던 요충지이다.
 
남한산은 일반적인 삶의 주거공간으로 꾸미기 보다는 관방의 기지로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남한산이 관방기지로 중요시되기 시작한 것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지만, 당시 북방에서 말갈족의 내습이 잦아 이에 대한 방어체제가 시급하였고, 그런 상황 속에서 한강, 임진강, 연변에 방어시설을 추진하면서 그 일환으로 672년(문무와 12년) 남한산 동쪽 봉우리에 주장성을 수축하였다. 돌로 성곽을 쌓았는데, 성곽의 둘레는 4360보였고, 영조척으로 둘레는 86,800척이고, 높이는 24척이었다. 그러나 고려왕조와 조선왕조에 이르러서는 국경선이 압록강 선으로 북상하면서 남한산의 역할이 감소되어 관방기지에서 소외되었다.
 
그러다 남한산이 다시금 관방기지로 주목받게 된 것은 여진족의 족장 누르하치가 부족을 통일하고 후금이라는 나를 세운 후, 남침을 시도하면서이다. 이러한 국제정세를 파악한 광해군은 그 대비를 위하여 관방기지를 정비토록 하였는데, 광해군 13년(1621년)에 남한산을 처음으로 보장처로 정하고 산성도 보수하였다. 그 후 후금의 남침 형세가 날로 심해지자 1624년 인조는 총융사 이서(李曙)로 하여금 산성을 본격적으로 보수케 했는데, 이때의 작업은 보수가 아니라 신축이나 다를 바 없었고, 이때에 현재와 같은 성을 축조하였다.
 
성곽이 완성되자 1626년(인조4년)에 현재의 하남시 춘궁동에 있었던 광주부의 치소를 산성 안으로 옮기고, 수어청을 두고 광주목사로 하여금 방어사를 겸하게 하여 산성을 관리하고 관방을 통제하게 하였다. 이로써 남한산성은 명실상부한 관방기지로서 자연적 요충지 뿐 아니라 인위적 시설로서 그 위상이 드러나기에 이른다.
 
이처럼 남한산성이 중요한 관방기지가 되고 주요기관이 들어오게 된 것은 보장처(保障處)로 활용되면서이다. 보장처란 국왕이 전란을 맞아 그 화를 피하기에 용이한 곳으로 곧 피난처를 의미한다. 실제로 1636년(인조 14년) 병조호란 때에 국왕과 세자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바 있었다. 실로 남한산성은 평시에는 보잘 것 없는 산골짜기에 불과하였지만, 외침을 당하여 국도가 함락되었을 때 국왕이나 왕족, 대신들이 난을 피할 수 있는 천혜의 요충지로서 주목받게 되었다.
 
 
남한산성과 천주교와의 관계
 
앞서 살펴본 바대로 남한산성이 보장처로서의 가치가 높아지면서 광주부는 고을의 지위가 부윤제로 또 유수제를 오가다 1795년(정조 19년) 유수제를 확립하여 한 말까지 유수(정2품)가 임명되었다. 부윤제 하에서 부윤은 도(道)와 행정 실무를 주관하였으나 유수제로 상향조정 되면서 종5품 판관과 종9품 검률이 산성 안에 주둔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남한산성은 단순한 산성이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시되는 특정한 곳으로 위상이 높아지게 되었고, 광주유수는 행정권과 군사권을 갖고 지휘하게 되면서 광주 일대를 포함한 한강 이남을 통제하게 되었다.

광주가 부윤으로 승격되고 1695년(숙종 21년)부터 광주부윤은 토포사를 겸하게 되었는데, 토포사란 반역도당들을 토벌하고 떼강도와 같은 큰 도적을 잡는 일을 직임하는 관리이다. 그러나 1750년(영조 26년)에 광주부윤에서 광주유수로 승격하면서 토포영이 여주로 옮겨 갔고, 1760년(영조 36년)에 유수제가 혁파되면서 다시 광주부윤으로서 토포사를 겸하게 되다가 1795년(정조19년)다시 광주 유수로 확정되면서 토포영은 양주로 이전하게 된다. 그러나 토포영은 이전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수어영의 전영장을 맡고 있던 판관이 토포사를 맡아 치안을 담당하였다.
 
관방의 요지며, 보장처로서 주목되어 산성이 축조되고, 행정치소가 산성 안에 마련되고, 나아가 광주유수가 임명된 남한산성이 천주교와 관련을 맺고 순교성지로 바뀌게 된 이유는 광주부윤이 토포사를 겸하면서 이곳이 바로 형장의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의 토포사는 광주 고을의 치안을 맡으면서 동쪽으로는 양근의 용진, 서쪽으로는 안산의 성곶이, 북쪽으로는 한강, 남쪽으로는 이천, 여주, 양지, 용인에 이르는 고을 안에서 강도나 역도들을 섬멸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천주교 박해령이 내려지면 토포군관들은 위의 지역으로 나가 천주교 교우들을 잡았던 것이다.
 
광주 토포사가 관할 광주에는 1784년 공식적으로 교회가 이 땅에 출범하기에 앞서 천주 신앙에 관심 있는 학자들이 모였던 천진암을 비롯해 교회가 창설되면서 신앙 운동이 우선적으로 전개되었던 곳이다. 교회의 선구자 이벽(李檗)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신앙운동에 나선 권일신(權日身)은 광주, 양근 일대에 신앙공동체를 조성하였고, 정약종과 정약용은 마재에 공동체를 조성하였는데 이 같은 공동체는 박해에 따라 토포사의 표적이 되었다.
 
교인들을 사학죄인으로 치죄한 최초의 광주 토포사, 즉 광주부윤은 이가환(李家煥)이다. 이가환은 실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종손이며,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李承薰)의 숙부로서, 그 자신이 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로 지목되어 죽음을 당한 순교자이다. 그러나 한때는 박해에도 앞장섰는데 1791년(정조 5년) 광주부윤으로 임명되어 조정의 뜻을 지키고자 각 면리에 이단 배척의 뜻을 명령하고, 장시에 방을 붙여서 널리 사학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수배를 통해 천주교 신자 4~5명을 체포하였는데 이들에게 곤장을 쳐서 신문하고, 결국 마음을 바꾸겠다는 다짐을 받고 풀어 주었다고 스스로 밝혔다.
 
그 후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에 광주 의일리(현 의왕시)에 살던 한덕운(韓德運) 토마스가 체포되어 1801년 12월 28일(음력) 동문 밖에서 처형되면서 천주교 신앙의 잊을 수 없는 순교지가 되었다. 그리고 1839년 기해박해에는 새로운 교우촌으로 성장한 구산의 김만집(金萬集), 김문집(金文集), 김주집(金?集)과 그의 아들들이 체포되었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구산의 김성희(金聖熙), 김차의(金次熙), 김경희(金敬熙), 김윤희(金允熙), 최지현(崔址鉉), 심칠여(沁七汝)와 서문 밖의 홍희만(洪喜萬), 홍학주(洪鶴周), 이천 단대의 정은(鄭?) 등 40여 명의 교우들이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받으며 끝내 신앙을 증거 하다가 순교하였다. [출처 : 남한산성 순교성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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