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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 남한산성 순교성지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걸어온 길, 시신 되어 나간 곳
지번주소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446 
도로주소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남한산성로 763-58
전화번호 (031)749-8522
팩스번호 (031)749-8524
홈페이지 http://www.남한산성순교성지.org
전자메일 master@nhss.or.kr
문화정보 사적 제57호
복자 한덕운 토마스(1752-1802년)

충청도 홍주 출신인 한덕운(韓德運) 토마스는 1790년 10월에 윤지충 바오로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바로 그 이듬해 윤 바오로는 신해박해로 체포되어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그럼에도 한 토마스는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나갔다.

그러던 가운데 한 토마스는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그는 성사의 은총을 받으려는 생각에서 주 야고보 신부를 만나려고 하였지만, 끝내 뜻을 이룰 수 없었다.

1800년 10월 한 토마스는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경기도 광주 땅에 속한 의일리(현, 경기도 의왕시 학의동)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성실하게 생활하면서 기도와 독서를 부지런히 하였으며,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에만 열중하였다. 그는 신자들을 모아 놓고 가르치고 권면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이럴 때면 그의 말은 언제나 그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굳건하고 날카로웠다고 한다.

이듬해 초에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한 토마스는 옹기 장사꾼으로 변장을 한 뒤 한양으로 올라가 보기로 작정하였다. 교회와 교우들의 소식이 궁금하여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양으로 올라가는 도중 청파동에 이르렀을 때, 한 토마스는 거적으로 덮여 있는 홍낙민 루카의 시신을 보게 되었다. 이때 그는 놀라고 비통한 마음으로 그 시신에 애도를 표하였다. 그런 다음, 그의 아들인 홍재영 프로타시오를 보고는 부친을 따라 함께 순교하지 못한 것을 엄하게 질책하였다. 홍 프로타시오는 그 뒤 다시 신앙을 되찾아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다가 1839년에 순교하였다.

한 토마스는 서소문 밖에서 최필제 베드로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러 주기도 하였다. 사실 박해 상황에서 신자들의 시신을 돌보아 준다는 것은 자신이 신자임을 드러내는 위험한 일이었다. 결국, 한 토마스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갔고, 여러 차례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결코 다른 사람을 밀고하지 않았으며,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아니하였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남한산성으로 옮겨져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한덕운 토마스가 사형 선고를 받기 전에 한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다.

“저는 천주교의 교리를 깊이 믿으면서 이를 가장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 비록 사형을 받게 되었지만, 어찌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바꿀 생각이 있겠습니까? 오직 빨리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한덕운 토마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정은(鄭溵) 바오로(1804-1866년)

정은 바오로 순교자는 단내에서 1804년에 출생하셨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신자들의 지도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으며, 남한산성에서 백지사(白紙死)형으로 순교하셨다. 순교하신 후 두 아들인 일동과 수동 형제가 시신을 단내 성지로 모셔와 안장하였다.
 
 
정 베드로(?-1866년)
 
정 베드로 순교자는 정은 바오로 순교자의 종손자로서 단내에서 출생하셨다. 1866년 정은 바오로 순교자가 체포되시자, 감옥에서 병약한 할아버지를 도와 드리고 함께 순교할 것을 결심한다. 그래서 스스로 관청을 찾아가 천주교 신자임을 밝히고 체포되어, 정은 바오로 순교자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식으로 순교하셨다. 시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순교 터의 흙을 채취해서 정은 바오로 순교자의 묘 옆에 의묘(儀墓)를 조성해 놓았다. [출처 : 이상 수원교구 홈페이지]
 
 
김만집(金萬集) 아우구스티노(1798-1841년)
 
김만집은 김성우 성인의 첫째 동생으로, 자는 덕심(德深) 또는 치영(致英)이고, '만집'은 그의 보명인데, 교회사의 기록에는 '덕심'이라는 자로 나온다. 비록 형제들보다는 늦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지만, 이후로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 되어 구산 교우촌에 포졸들이 들이닥쳤을 때, 그는 아우인 김문집(베드로)과 사촌 김주집(金胄集, 스테파노)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때가 3월 21일(양력)이었다. 그들 형제는 처음에 포졸들의 호의로 석방될 수 있었으나, 박해가 끝날 즈음에 다시 체포되어 광주 유수(留守)의 처소가 있던 남한산성 옥에 갇히고 말았다.
 
김만집 · 문집 형제와 사촌 김주집은 함께 재판관 앞에 나아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김만집은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큰소리로 대답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천주교는 임금도 없고 아비도 없는[無君無父] 이적(夷狄) · 금수(禽獸)의 교가 아니라 천주님의 참다운 진리다. 그래서 그는 여러 차례 형벌을 당하게 되었지만 이를 용감하게 참아 받았다. 사령들은 그에게 '배교한다는 것과 비슷한 말만 하면 석방될 수 있다'고 회유하였지만, 어떤 말로도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광주 유수는 그를 감옥에 가두도록 하고 한 겨울 내내 그대로 방치하였다.
 
1840년에 김만집의 아들들은 부친과 연락을 취할 수 있게 되면서 한때 석방될 지도 모른다는 희망까지도 가졌으나 그 자신은 조금도 석방되고 싶어 하지 않았으며, 유수도 끝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경주김씨족보"에 의하면, 김만집은 장남 원희(元熙)와 차남 차희(次熙)를 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때 장남의 나이가 14세였으니, 차남은 10세 전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또 구산 마을에 전해 오는 전승에 따르면, 그가 남한산성에서 옥고를 치를 때 집안사람들이 교대로 밥을 갖다 주었는데, 돌아올 때면 눈물이 밥그릇에 가득 괴었다고 한다. 구산에서 남한산성까지는 40리가 넘는 고개 길인데 날마다 걸어서 밥을 날라다 주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김만집은 다시 오랫동안 험난한 옥고를 겪어야만 했으나, 신앙의 가르침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기 위해 이를 참아 받았다. 결국 옥중에서 병을 얻게 된 그는 몇 주일 동안 고통을 받다가 순교하고 말았으니, 이때가 1841년 1월 28일(양력 2월 19일)로, 그의 나이 44세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끝까지 "진실한 통회와 애덕의 정을 지닌 채" 숨을 거둠으로써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김만집이 순교한 뒤에도 아우인 김문집과 김주집은 약 18년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1858년에 석방되었다. 한편 김만집의 장남 원희는 부친이 순교한 뒤 버려진 시신을 가까스로 찾아다 구산에 안장하였다.
 
 
김문집(金文集) 베드로(1801-1868년)
 
김문집은 김성우 성인의 둘째 동생으로, 자는 윤심(允深)이며, '문집'은 그의 보명이다. 맏형과 함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그는 1839년 기해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 되어 구산 교우촌에 포졸들이 들이닥쳤을 때, 둘째형인 김만집(아우구스티노)과 사촌 김주집(스테파노)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때가 3월 21일(양력)이었다. 그들 형제는 처음에 포졸들의 호의로 석방될 수 있었으나 박해가 끝날 즈음에 다시 체포되어 광주 유수의 처소가 있던 남한산성 옥에 갇히고 말았다.
 
김문집은 형 김만집과 함께 배교를 강요당하며 여러 차례의 심문과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내 굽히지 않았고, 오히려 천주가 진리임을 역설하였다. 그러자 재판관은 끝내 그들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는 그대로 옥에 가두어 둔 채 한 겨울을 나도록 하였다. 그 중에서 형 김만집이 이듬해 초에 옥사로 순교하였다. 그러나 김문집과 사촌 김주집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석방되지 않은 채 약 18년 동안을 갇혀 있다가 1858년 왕세자의 탄생을 계기로 베풀어진 특사 때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김문집은 비밀리에 신부를 모셔다 성사를 보았으며, 언제나 교회를 도울 방도를 궁리하였다. 그러다가 1866년(고종 3)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자 김문집은 형들과 같이 순교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순교의 열망을 키워 나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2년 뒤인 1868년(戊辰年)에 박해가 점점 심해지자 후손들을 모두 불러 모은 뒤, "만일 기회가 온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영광스럽게 순교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라"고 가르쳤다.
 
실제로 얼마 되지 않아 광주 포졸들이 구산으로 몰려왔고, 이내 그들은 김씨 집안의 성인 남자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이때 남한산성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김문집을 비롯하여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 성희(암브로시오), 순교자 김만집의 차남 차희, 김문집의 외아들 경희, 성희의 양자인 교익(敎翼, 토마스), 김주집의 장남 윤희 등 모두 6명이었다. 그러니까 5촌 이내의 3대가 같은 날 같은 옥에 갇히게 된 셈이었다.
 
이후 김씨 집안사람들은 여러 차례 유수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하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꿋꿋하게 고통을 이겨냈다. 특히 68세의 김문집은 조카와 손자를 다독거리면서 함께 순교의 영광을 얻자고 권면하였다. 그 결과 이들 6명 모두는 유수 앞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형장으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이때 김씨 집안의 은혜를 입은 적이 있는 포교가 '3대가 함께 죽도록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도중에 가장 어린 김교익을 언덕 아래로 밀쳐내 살려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되어 김문집과 아들 · 조카 4명은 1868년 2월 15일(양력 3월 8일) 함께 순교하였다. 이들이 순교한 뒤 김교익이 몰래 남한산성의 형장으로 가서 김문집, 김성희, 김경희 등 3명의 시신을 가까스로 찾아다 구산에 안장하였다.
 
 
김성희(金聖熙) 암브로시오(1815-1868년)
 
김성희는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로, 자는 희백(喜伯), 세례명은 암브로시오였다. 그의 세례명은 집안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다가 훗날 족보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그의 부인은 전주 이씨 범회의 딸이었는데, 후사가 없었으므로 김문집의 아들인 경희의 5남 교익(敎翼, 토마스)을 양자로 삼아 대를 잇게 하였다.
 
김성희는 부친 김성우가 1841년에 순교하자, 그 시신을 찾아다가 구산에 안장하였다. 이후 그는 약국을 경영하여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웠고, 1860년경에는 매부 홍희만(洪喜萬)에게 교리를 전하는 등 전교와 신앙생활에 열심하였다. 그러다가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난 지 2년 뒤인 1868년에 일가친척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의 문초와 형벌을 이겨낸 뒤 사형 판결을 받고 1868년 2월 15일에 5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시신은 그의 양자 김교익이 밤에 몰래 찾아다가 구산에 안장하였다.
 
 
김차희(金次熙, ?-1868)
 
김차희는 김만집(아우구스티노)의 둘째 아들로, 자는 희선(希善)이었으나 세례명은 알 수 없다. 부인은 광산 김씨였다. 그는 부친 김만집이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1841년 남한산성에서 옥사로 순교할 때 12세 전후의 어린 아이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신앙심을 갖고 있었으며, 이후로는 종형 김성희(암브로시오)를 따르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한편 침술을 배워 생활을 꾸려나갔다. 그의 침술은 인근에 잘 알려질 정도로 능통하였다고 한다.
 
김차희는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난 지 2년 뒤인 1868년에 일가친척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옥리들이 하는 말을 듣고 포교의 아들이 위급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침술로 그 아들을 소생시켜 주었다. 그 일이 있은 뒤 김차희가 하루는 심한 곤장을 맞고 신음하고 있을 때, 그 포교가 다시 찾아와 배교하고 살아나가라고 권유하였으나, 그는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다.
 
사형 판결을 받던 날 재판관이 모든 신자들을 끌어내 마지막으로 배교를 권유할 때, 김차희의 차례가 되자 그 포교는 그의 뒤에 서서 대신 "다시는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결과 김차희만은 형장으로 끌려가지 않고 그 자리에 남게 되었다.
 
이렇게 살아남은 김차희는 그 순간부터 가슴이 떨리고 매를 맞아 부어오른 상처가 더욱 쑤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에 그는 다시 재판관을 향해 "조금 전의 대답은 제가 한 것이 아니오. 저는 비록 매를 맞아 죽을지언정 천주교를 버릴 수가 없소"라고 말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1868년 2월 15일 인척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이후 그의 시신은 아들 김교문이 거두어 안양 수리산(현 안양시 안양 3동)에 안장하였으나 실전되고, 훗날 그의 의묘(擬墓)가 구산에 조성되었다.
 
 
김경희(金敬熙, 1823-1868년)
 
김경희는 순교자 김문집의 외아들로, 자는 치선(致善)이었으나 세례명은 알 수 없다. 1823년(순조 23년) 구산에서 태어난 그는 장성한 뒤 순흥 안씨 진환(鎭煥)의 딸과 혼인하였지만, 첫 부인이 일찍 사망하면서 전주 이씨 종태(從台)의 딸과 재혼하게 되었다.
 
일찍부터 부친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던 그는 비밀리에 자신의 집을 방문한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고 열심히 생활하다가 1868년에 부친과 친척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남한산성 안에 있는 광주 유수의 치소로 압송된 그는 친척들과 함께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굳게 신앙을 지키고 1868년 2월 15일 4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의 시신은 후손들에 의해 거두어져 구산에 안장되었다.
 
 
김윤희(金允熙, 1834-1868) 
 
김윤희는 김성우 성인의 사촌 김주집(스테파노)의 장남으로, 세례명은 알 수 없다. 김주집은 기해박해 때 김문집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으며, 이후 약 18년 동안 옥중에서 고통을 겪다가 1858년에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따라서 김윤희도 일찍부터 부친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김윤희는 성장하면서 인척들과 함께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고, 신부로부터 성사도 받았다. 그러다가 1868년에 5촌 당숙 김문집(베드로)을 비롯하여 6촌 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남한산성으로 끌려간 김윤희는 집안사람들과 함께 유수 앞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조금도 마음이 약해진 적이 없었으며, 끝까지 신앙을 지킨 뒤에 사형 판결을 받고, 1868년 2월 15일 35세의 나이로 순교의 영광을 안았다. 이후 순교자의 시신은 찾지 못하였으나, 훗날 구산 신자들이 그의 용덕을 기려 구산에 그의 의묘를 조성하였다. [출처 : 이상 구산 성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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