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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 언양 성당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순교 선열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성소의 온상지
지번주소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 422 
도로주소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구교동1길 11
전화번호 (052)262-5312
팩스번호 (052)262-5316
홈페이지 http://eonyang.pbcbs.co.kr
문화정보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03호(성당과 구 사제관)
성모동굴과 십자가의 길

언양 성당의 뒷산에 위치한 성모동굴과 십자가의 길에 대한 구상은 1927년경에 시작되었다. 1926년 11월 언양 성당 부지를 매입하고, 그 다음해인 1927년 현 위치에 성당을 짓기 시작한 보드뱅(Beaudevin) 초대 주임신부는 바로 뒷산에 성모동굴을 만들어 성모님을 모시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1927년 이후 여러 주임신부가 부임하고 역대회장이 사목을 도왔으나 성모동굴 조성사업은 실현되지 못했다.
 
십자가의 길.2000년 대희년을 맞아 언양 성당이 순례성당으로 지정되어 많은 순례객들이 이곳을 방문하게 되자, 언양 성당은 그때까지 관리해 오던 죽림굴과 각 공소에 대한 보수 관리와 홍보 계획을 세웠다. 순례책자와 안내 포스터를 제작하여 부산 · 대구 · 마산교구의 각 성당에 송부하여 순례객을 맞이하였고, 각 공소와 성지 보수 사업도 시작하였다. 2001년 언양 성당이 순례성당으로 다시 지정되면서 각 공소 보수사업, 죽림굴 환경미화 사업, 성모동굴 조성사업 등에 전 교우들이 참가하여 과감하게 실천에 옮겨 그 결실을 보게 되었다.
 
성모동굴의 조성사업에 울주군과 관계자들의 도움으로 식수가 이루어졌고, 서정웅 주임신부를 비롯하여 많은 교우들이 기꺼이 노동봉사를 하며 길을 내고 나무로 만든 십자가의 길 14처를 세웠다. 특히 신영세자인 백 안드레아 씨가 성모동굴 조성사업에 적극적이고 희생적인 봉사를 하여 모두를 놀라게 했다. 2010-11년에는 기존의 나무 14처를 대신하여 대형 석재를 이용한 14처를 새로 설치하고 조경 사업을 진행하였다. [출처 : 언양 성당 홈페이지,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
 
 
순교자 오상선 묘
 
언양 성당 뒷산으로 10분쯤 걸어서 올라가면 순교자 오상선(1840-1867년, 세례명 미상)의 묘가 있다. 오상선은 이 지방에서 처음으로 신앙을 받아들인 오한우(1760-1801년, 베드로)의 증손자이다. 오한우는 서울을 왕래하며 같은 오씨 문중의 오몽상과 권일신, 정약용과 교분을 두텁게 하고, “천주실의”와 교리 서적 몇 권을 얻어서 집으로 돌아와 열심히 신앙공부를 하여 천주교에 입교하였다고 한다.
 
순교자 오상선의 묘.오한우는 육촌 매제인 김교희(1775-1834년, 프란치스코)를 권면하여 함께 세례를 받았고, 그들 두 집안은 언양 지역의 첫 신자 집안이 된다. 이들은 상북면에서 세도가 있는 향리 집안이었고 마을에서 덕망이 높아 전교를 많이 하였다.
 
이후 박해시기에 오치문(오한우의 손자)과 오상선은 집안의 힘을 빌려 읍 주변의 신자들을 보호하여 준 듯하다. 오상선의 증조부 오한우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충청도와 경상도 경계 지점에서 피안살수형(백지사형)으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오상선의 아버지 오치문도 박해의 여파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나 정확한 자료가 없다. 오상선은 병인박해(1866년)의 여파로 언양 감옥에 잡혀 있다가 백지사형으로 순교하였다.
 
고무재에 있던 오상선 묘(부인 문화 류씨와의 합장묘)를 부산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의 주관으로 1995년 5월 15일 언양 성당 뒷산으로 옮겨 단장하였다.
 
 
동정녀 김 아가타 묘(간월 공소)
 
간월골에서 살던 동정녀 김 아가타(1836-1860년)는 언양의 첫 신자 김교희의 손녀로 경신박해 때 아버지(김상은 야고보)와 오빠(김영제 베드로)가 잡혀가자 뒤를 따르고자 자진하여 체포되었다. 그러나 포졸들이 다른 데로 팔아넘기려 하자 도망쳐 나와 최양업 신부가 있는 죽림굴에서 은신하며 지냈다. 여기서 3개월 동안 머물면서 바깥소식을 전하고 식사 준비와 빨래 등으로 최 신부를 정성껏 공경하였다고 전한다. 최 신부는 짚신을 삼고 교우들은 이것을 팔아 어렵게 생계를 꾸려 나갔다.
 
잡혀 갔던 후유증으로 여러 날을 앓다가 모든 성사를 신심 깊게 받은 아가타는 최 신부의 임종경을 들으며 24세에 선종하였으며, 둘러 있던 교우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고 한다. 최 신부는 시신에다 솔가지를 덮고 묘비인 패장을 세워 주었으며, 며칠 후 교우들이 간월골로 옮겨와 매장하였다.
 
김 아가타의 아름다운 생애는 구전으로만 이곳 신자들에게 전해오고 있었는데, 최양업 신부가 1860년 리브와(Libois) 신부와 르그레즈와(Legregeois) 신부에게 보냈던 편지에 그녀가 소개되어 있음이 후에 확인되었다.
 
“24세 된 동정녀가 있는데 교리에 밝고 열심히 비상하여 모든 교우들 중에 출중하므로 일반의 존경과 흠모를 받아 왔습니다. 항상 마음으로 위주치명하기를 원하더니…”
 
2008년 3월 유해 일부는 살티 순교자묘역으로 이장했으나, 아직 간월 무덤은 보존되어 있으며, 1991년 4월 17일 부산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 정리하고 비석을 세워 축성하였다. 순례자들은 여인의 몸으로 천주를 고백하고 자진해 붙들려 가려 했던 용감하고도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을 것이다. 비문에 이해인 수녀가 쓴 시가 홀로 그녀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소재지 :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산 209
 

 
 
죽림굴(대재 공소)
 
간월 공소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대재 공소(1840-1868년)는 간월산 정상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천연 석굴로 된 박해시대의 공소이다. 이 석굴공소는 대나무로 덮여있어서 ‘죽림굴’이라고 불렸다. 폭 7m, 높이 1.2m인데, 낮은 입구 덕분에 눈에 잘 띄지 않아 은신하기에 유리하여 교우들의 은신처로 이용되었다.
 
기해박해(1839년)로 충청도 일원과 영남 각처에서 피난 온 교우들과 간월의 교우들이 보다 안전한 곳을 찾다가 발견하여 공소를 이룬 곳이다. 이들은 토기와 목기를 만들거나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하였다. 재 너머에 관헌들이 나타나면 한꺼번에 모든 교우가 굴 안에 숨었고, 연기를 내지 않기 위해 곡식을 구유에 넣어 물에 불려 생식을 하면서 은신하였다고 전해진다.
 
1840년부터 1860년 사이에는 다블뤼(1818-1866년, 안토니오) 신부와 최양업(1821-1861년, 토마스) 신부가 사목을 담당하였다. 특히 경신박해(1859-1860년) 때에는 최양업 신부가 이곳에서 약 3개월간 은신하면서 교우들과 함께 생쌀을 먹으며 박해를 피하였고, 스승에게 마지막 서한(1860년 9월 3일)을 작성하면서 자신의 위태로운 처지를 다음과 같이 썼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양든 베드로가 대제 공소의 회장이었고, 김종륜, 허인백도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동정녀인 김 아가타도 최양업 신부의 일을 도우며 지내다가 여기서 선종하였다.
 
결국 경신박해로 이 지방에서 20여 명이 체포되었고, 뒤이은 병인박해 여파로 1868년에 교우들이 대거 체포되는 등 100여 명이 넘었던 신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대재 공소는 폐쇄되고 말았다.
 
1986년 10월 29일 당시, 언양 성당의 김영곤 신부와 평신도 11명이 죽림굴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 해 11월 9일 평신도 4명이 재시도하여 대나무와 풀로 뒤덮인 굴을 발견하였다. 당시 굴 안에서 구유조각과 나무지팡이 등이 발견되었고, 지금은 언양 성당 신앙유물 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1996년 2월에 죽림굴 주변 정리를 하면서 안내석을 새로 세웠고 입구에 계단을 만들었다.
 
소재지 :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산 2
 

탑곡 공소
 
탑곡에 신자가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초기 박해시기(1801년)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숨어든 신자들에 의해서이나 공소가 형성된 것은 한참 이후였다. 탑곡 교우촌(1839-1983년 3월)은 경주, 밀양, 의성에서 피난 온 고령 박씨, 밀양 박씨, 반남 박씨 집안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였다. 이들을 중심으로 해서 외교인을 영세시키고, 또 혼인을 통해 광주 이씨, 안동 권씨 집안 등이 이주해 옴으로써 전성기에는 100명이 넘는 신자들로 발전해 나갔다. 탑곡 공소의 예씨네 집안이 상선필로 옮겨가 상선필 공소의 발판을 놓았고, 이후 내와 공소도 이곳에서 분리되어 나갔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면서 깊은 산중의 신자들이 점점 도회지로 나가고, 이농현상이 심화되면서 이곳에는 신자들이 살지 않게 되었다.
 
언양 성당 신앙유물 전시관 전시실에 탑곡 공소에서 사용하던 공의회 이전 제대, 라틴어 미사경문, 전례 도구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다. 어느 해 여름 태풍 때 피해를 입어 공소가 내려앉게 되었는데, 이 물건들은 그 전에 가져온 것이라고 하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현재 이곳은 개인 소유의 땅이며, 공소터를 알려 주는 아무런 표지판도 없다. 산 너머 내와리에는 세 가구 3명의 신자가 살고 있다.
 
소재지 : 울산시 울주군 두서면 내와리 탑곡 524
 

상선필 공소
 
상선필 공소는 경북 외남면과 경계를 이루며 고헌산 뒤편에 자리 잡고 있는 신자촌에 위치하고 있다. 공소 설립 이전에는 탑곡 공소 소속이었다.
 
이만채의 “벽위편”에 의하면 “1801년 주문모 신부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강이문(세례명 미상)이 언양으로 귀양감”이라고 나오는데, 그 귀양지가 탑곡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영세시킨 사람이 예씨 성을 가진 사람으로, 탑곡에서 가까운 이곳에 정착해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기에 과거에는 예씨네골이라고 불렀다.
 
상선필 공소는 기해박해 등을 피해 신자들이 피신해 오면서 공소가 형성되었다. 1839년 샤스탕 신부가 1차와 2차로 전교를 하였고, 그 후 1845-1849년 다블뤼 주교가 이곳 상선필에 들러 성사를 주었다. 1850년경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경상도 지방으로 전교를 시작하면서 신자들이 모여들었고 실질적인 공소가 되었다.
 
한국전쟁 때 북한군의 방화로 인해 건물이 무너지자 1957년에 재건하였다. 건평은 8평, 신자 수는 7명이다. 월 1회 하선필 공소 신자들과 함께 인보 성당 주임신부를 모시고 반모임을 하고 있다.
 
그런데 공소 건물이 너무 오래되어 와해 직전 상태에 이르자 2001년 증거자의 모후 쁘레시디움에서 3개월 동안 수리를 하여 성모상을 세우고, 2001년 11월 10일 공소 축복식을 가졌다.
 
소재지 : 울산시 울주군 두서면 상선필 1049
 

하선필 공소
 
하선필 공소는 지리적 위치로 보아 최양업 신부가 경상도에서 전교했던 무렵에 교우촌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병인박해 후 한 베드로 집안과 박영숙(시몬) 집안, 김문옥 신부의 부친 등이 주축이 되어 하선필 공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876년 로베르 신부가 경상도 지방을 순회 전교하며 판공성사를 주었다.
 
그 후 김문익 공소회장을 비롯한 초기 역대 공소회장들의 노력으로 뮈텔(Mutel) 주교를 비롯하여 드망즈(Demange) 주교 등 많은 성직자들이 거쳐 갔으며, 한때는 서양인 신부가 3개월간 이곳에 머물기도 하였다. 초기 공소의 주요 교우로는 최 시몬, 이 루도비코 등이 있었다.
 
현재 공소는 1923년에 경당으로 건축되었고, 베르나르도 성인을 주보로 모시고 드망즈 주교가 축성하여 성체를 모셨다. 신자는 15명이며, 상선필 공소 신자들과 함께 매월 1회 인보 성당 주임신부를 모시고 반모임을 하고 있다.
 
소재지 : 울산시 울주군 두서면 하선필 725-1
 

살티 공소
 
살티 공소(1868년~)는 간월 공소, 대재 공소가 파괴되면서 설립된 공소로서 원래 이곳은 첩첩산중의 신자촌이었다. 이곳은 옛날부터 전쟁을 위해 화살을 만들던 곳으로, 호랑이 등의 맹수들이 많아서 사람들이 살기 어려웠던 곳이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간월과 언양 지역에 살던 신자들이 숨어 지내기에 좋다는 이유로 이곳 안살티(현재 청수골 주변인데, 아무런 흔적도 없다)로 피난 와서 살기 시작하였다.
 
김영제 베드로, 남의선 안드레아, 이루수, 최일문 베드로, 김경두 가정 등이 이곳으로 이주해 왔으며, 그 외에 이종창 신부 선대 및 정씨, 곽씨 가정도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 살았다.
 
‘살티’라는 말의 유래는 “당시 관헌들이 교우들을 찾아 석남사까지 왔다가 경주로 빠져 나감으로써 이곳의 교우들이 죽음을 면하고 무사히 살아남아 ‘살 수 있는 터’라고 하여 살티 혹은 살틔라 부른다.”고 전해진다. 박해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이후 안살티에 살던 신자들이 현재의 공소가 있는 곳으로 이주하여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왔다.
 
이곳은 증거자 김영제가 고문의 후유증으로 치명한 곳이며, 현재의 공소 건물은 1982년에 교구 은인들의 도움을 받아 건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박해시절에는 전세대가 신자였던 이곳도 세월이 흘러 많은 신자들이 농촌을 떠나 이주하였지만, 대대로 내려오는 신앙의 후손들은 아직도 이곳을 지키고 있다.
 
살티는 최재선(요한) 주교를 비롯하여 많은 성직자를 배출한 성소의 고장이기도 하다. 살티 마을 입구 길 건너편에 초대 부산교구장 최재선 주교의 가족묘지가 있다.
 
소재지 :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1144-4
 

순정 공소
 
단단한 붉은 벽돌과 하늘색 지붕의 순정 공소는 이름만큼이나 따뜻함이 묻어나는 아름다운 공소이다. 순정 교우촌도 간월과 선필 교우촌과 마찬가지로 박해 때 생긴 교우촌이다. 언제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살았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아마 순교자 김 베드로 때인 듯하다.
 
후손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순교자 김 베드로는 조부 때에 순정으로 이사 왔고, 그의 가정은 천주교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김 베드로는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1860년 경신박해 때 대구 약령시에 한약 재료를 구입하려고 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순교하였다고 한다.
 
순정 공소는 언양 본당 설립 전까지는 부산공교협회(1917년) 및 공소 회장 피정(1918년) 등 많은 신자들과 성직자들이 순방한 곳이었고, 선교사들의 휴양지로 사용되었다. 송대에 본당이 생기면서 공소가 차츰 축소되어 갔다. 1951년 울산에 본당을 설립할 계획으로 공소 건물 2채 중 1채 25평을 뜯어 복산동(현 복산 성당)에 공소를 설립하였다. 온돌방인 별관사택과 주변의 텃밭을 포함하고 있어 공소로는 꽤 넓은 편이다. 현재 신자는 10명이다.
 
길천 공소는 1958년 8월 25일 김영제 신부에 의해 순정 공소에서 분리되었다. 그 후 이농 현상으로 교세가 약화되자 1980년에 다시 순정 공소와 통합되었다. 순정 공소와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다. 신자 수는 15명이며, 월 1회 공소에서 반모임을 하고 있다.
 
소재지 :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길천리 1092
 

궁근정 공소
 
궁근정은 삼국시대부터 오랫동안 군영지로 있다가 이후 조선조까지 활과 화살을 만들던 곳이다. 궁근정이란 이름은 이런 역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였고 아름다운 경관으로 알려졌던 궁근정에 공소가 필요하게 된 이유는 길천 공소에 살던 박성묵 가스발 초대 회장의 부친인 박정탁 가정이 궁근정으로 이사 오고 마을 사람들이 입교하면서부터였다.
 
공소 신축은 본당 보조 없이 공소 회장이 사유지를 기증하고, 석남사 산판일의 수익금과 목수로서 봉사하였던 문 야고보 등 신자들의 노력봉사로 이루어졌다. 공소 건물은 김영제 신부의 주례로 1957년 3월 19일에 축성되었다. 박성묵 회장은 1984년까지 공소를 이끌어 갔으며, 지금도 공소안에는 그의 사진이 걸려있어 온화하면서도 강건한 얼굴을 만날 수 있다.
 
2001년에는 서정웅 신부의 사목방침에 따라 공소 신축 이후 처음으로 보수작업을 시작하여 성모상을 세우고 지붕 등 실내를 수리 정비하였고, 그 해 6월 29일에 축성미사를 봉헌하였다. 신자 수는 10가구에 15명이며, 월 1회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반모임으로 친교를 나눈다.
 
소재지 :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궁근정리 775
 
 
직동 공소
 
직동 공소는 언양 첫 신자인 김교희(프란치스코)가 살던 곳이었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를 피해 직동(와곡)에서 간월 불당골로 피신하였으며, 1834년 선종할 때까지 언양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어 1839년 기해박해 때 충청도, 강원도, 경북 일부 지방(청송, 안동, 진보 등)의 신자들이 언양으로 피난 오면서 이곳 직동도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직동 공소는 1950년 최 아가타가 땅을, 김영제 신부가 목재를 기증하여 건립하였으며, 그 후 1967년에 현재의 공소를 새로 지었다. 현재 신자 수가 25세대 50여 명으로 본당 관할 내 가장 큰 규모를 가진 공소 중 하나이며, 학생들의 봉사활동이나 농촌체험 때 숙소로 이용되고 있다.
 
현재 직동 공소가 있는 신화리는 우렁새악씨 쌀 생산지로 알려져 있다. 우렁이 농법은 왕우렁이가 물에 있는 채소, 수초, 연한 풀을 먹는 먹이습성을 이용하여 우렁이를 논에 방사하여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잡초를 제거하는 친환경 농법을 말한다.
 
2002년부터 부산교구의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한 우렁이 농법은 현재는 비신자들까지 합세하고 있으며, 신화리의 청정한 넓은 논은 주일학교 유치부에서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농촌체험의 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소재지 :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직동리 1128
 
[출처 : 이상 부산교구 울산대리구, 들풀 바람 그리고 - 울산의 성지를 찾아서, 2010년,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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