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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 오륜대 순교자 성지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순교자의 신앙을 기리고 배우기 위해
지번주소 부산시 금정구 부곡 3동 1-4 
도로주소 부산시 금정구 오륜대로 106-1
전화번호 (051)515-0030
팩스번호 (051)515-0036
홈페이지 http://www.oryundae.com
관련기관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    (051)583-2923

수영장대 순교자들

 
1868년 수영장대에서 순교한 이들은 동래 전교회장 이정식 요한과 그의 아들 이월주(프란치스코)와 아내 박조이(마리아) 그리고 조카 이삼근(베드로) 등 일가족 4명과 이관복(야고보), 차장득(프란치스코), 옥조이(바르바라), 이정식의 대자 양재현(梁在鉉, 마르티노, 1827-1868년) 등 8명이다. 이 중에서 이정식과 양재현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이들 중에서 이삼근과 이관복은 가족관계와 이름과 세례명 연결이 주교회의 편찬 약전과 수영장대 및 오륜대 순교자 성지의 안내문이 다르다. 여기서는 약전의 설명을 따른다.]

이들이 순교한 후 이정식 회장의 가족 4명의 시신은 친척들에 의해 거두어져 부산 가르멜 수녀원 뒷산(동래구 명장동 산 96)에 묻혔다가 1977년 9월 19일 오륜대 순교복자기념관(현 오륜대 순교자 성지) 뒷동산으로 옮겨 안장되었다. 이때 나머지 4명의 순교자들은 그 시신을 찾을 수 없어 기념비만 건립하였다.
 
 
복자 이정식 요한(1795-1868년)

이정식(李廷植) 요한은 경상도 동래 북문 밖에 살던 사람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 무과에 급제한 뒤 동래의 장교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활 쏘는 법을 가르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나이 59세 때에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한 뒤로는 첩을 내보내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 요한은 이후 가족을 열심히 권면하여 입교시켰으며, 누구보다 계명을 지키는 일에 열심이었다. 화려한 의복을 피하고, 항상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애긍에 힘쓰면서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한 작은 방을 만들어 십자고상과 상본을 걸어 놓고 묵상과 교리 공부에 열중하였다.

이러한 열심 때문에 이 요한은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그는 언제나 자신의 본분을 다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기장과 경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울산 수박골로 피신하여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1868년 동래 교우들의 문초 과정에서 이 요한 회장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동래 포졸들은 그가 사는 곳을 수소문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는 그의 거주지를 찾아내 그곳에 있던 교우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그때 이 요한의 아들 이월주 프란치스코와 조카인 이삼근 베드로는 이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스스로 포졸들 앞으로 나와 자수하였다.

이내 동래로 압송된 이 요한 회장은 그곳에서 대자 양재현 마르티노를 만나 서로 위로하며 신앙을 굳게 지키자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문초를 받게 되자, 이 요한은 천주교 신자임을 분명히 하고는 많은 교우들을 가르쳤다는 것도 시인하였다. 그러나 교우들이 사는 곳만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또한 형벌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하였지만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이 요한과 동료들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며 47일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고통을 당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신앙을 버림으로써 석방된 사람은 없었다.

동래 관장은 마침내 사형을 결정하였다. 그런 다음 옥에 있는 신자들을 끌어내어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로 압송하였다. 이때 사형을 맡은 군사들이 부자(父子)를 한날에 죽이는 것을 꺼려했지만, 동래 관장은 동시에 사형을 집행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요한은 1868년 9월 참수형을 당하기에 앞서 삼종 기도를 바치고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에 칼을 받았다. 당시 이정식 요한의 나이는 73세였다. 그의 시신은 가족에 의해 거두어져 사형장 인근에 안장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이정식 요한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양재현 마르티노(1827-1868년)

1827년에 태어난 양재현(梁在鉉) 마르티노는 언제부터인가 경상도 동래의 북문 밖에서 살았다. 그는 동래에서 좌수(坐首)라는 직책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정식 요한 회장을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후 그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68년의 박해 때에 양 마르티노는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알려져 동래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그는 포졸들이 집으로 들이닥치자 태연하게 그들을 맞이하며 관아로 끌려갔다.

이윽고 관장 앞으로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양 마르티노는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는 형벌을 달게 받았다. 또한 관장이 배교를 강요하자, “절대로 천주교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하면서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다시 문초를 받고 수군의 병영으로 이송되었다.

양 마르티노는 수군의 병영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배교를 거부하였기에 옥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옥에 들어가서는 옥졸의 꾀임에 빠져 ‘돈을 주겠다.’고 약속한 뒤 몰래 그곳을 빠져 나와 집으로 되돌아갔다.

양 마르티노가 집으로 돌아가자 옥졸은 관장에게 가서 ‘죄수가 몰래 도망쳤다.’며 거짓으로 보고하였다. 이내 포졸들이 다시 양 마르티노의 집으로 몰려왔고, 그는 곧장 다시 체포되어 동래 관아로 압송되었다. 양 마르티노의 신앙심은 이때부터 다시 굳건해지게 되었다. 그는 혹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천지의 큰 부모이신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신앙을 증언하였다.

이후에도, 양 마르티노는 통영에 있는 수군의 병영으로 이송되어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동래 관아로 끌려와 옥중에서 이정식 요한 회장과 동료 교우들을 만나, 서로를 위로하면서 신앙을 굳게 지키기로 약속하였다.

동래 관장은 마침내 사형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옥에 있는 신자들을 끌어내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로 압송하였다. 이때 양재현 마르티노는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고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에 칼을 받았다. 그의 나이는 41세로 1868년 9월이었다. 당시 그의 시신은 가족에 의해 거두어져 사형장 인근에 안장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양재현 마르티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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