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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 머루산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태백산맥 줄기 포도산 꼭대기에 세워진 교우촌
지번주소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포산리 131 부근 
전화번호 (054)683-2105
팩스번호 (054)683-2106
홈페이지 http://cafe.daum.net/yuongyangcatholic
관련기관 영양 성당    (054)682-1758
관련주소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영양창수로 35-1

복자 김시우 알렉시오(1783-1816년)

일명 ‘시회’ 혹은 ‘시우재’라고 하는 김시우(金時佑) 알렉시오는 1783년 충청도 청양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디 그는 성품이 착하고 어질었으며, 어느 정도 학식도 있었다. 그러나 오른쪽 몸이 반신불수인 탓에 혼인을 할 수가 없었고, 일하기가 어려워 가난하게 생활해야만 하였다.

일찍이 고향 인근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김 알렉시오는 열심히 신자의 본분을 지키면서 누이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교우들에게 교리를 설명해 주거나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가난하였으므로 이곳저곳으로 교우들을 찾아다니며 애긍을 받아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때때로 왼손으로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고 약간의 돈을 얻기도 하였다.

김 알렉시오는, 고향을 떠나 교우들이 살고 있는 진보 머루산 교우촌(현,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리)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다가 1815년 초에 일어난 을해박해 때에 포졸들이 쳐들어와 교우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자, 자원하여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밝히고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이때 그는 포졸들에게 “나도 천주교 신자인데 병신이라서 잡아가지 않는군요?”라고 울면서 말하였고, 함께 체포해 가기를 원하였다고 한다.

안동으로 끌려간 김 알렉시오는,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지만, 신앙의 힘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그가 보여준 굳건한 신심은 형리들조차 칭찬할 정도였다. 형벌을 받으면서도 그는 천주교의 주요 교리를 박해자들에게 이해시켜 주려는 노력까지 하였다.

이렇게 신앙을 증언한 김 알렉시오는 동료들과 함께 대구로 압송되어 다시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다시 한 번 천주교의 진리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모든 영혼들을 구하시려고 수난을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감사께서도 예수님에게 감사를 드리고, 그분을 흠숭하고, 천주교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이 말을 들은 감사는 김 알렉시오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여 그의 턱을 부수고, 말을 하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사형 선고문을 작성하여, 서명을 받은 다음 옥으로 돌려보냈다.

“김시우는 스스로 천주교의 소굴이 되어 늘 교리를 전하고 익혔으며, 십계는 물론 남들이 외우지 못하는 『칠극』이나 묵주 기도 등도 외우고 있다. 그가 천주교에 깊이 빠져 있다는 사실은 다시 설명할 필요도 없다. 교회 서적을 감추어 둔 곳에 대해서는 단지 그 지명만을 이야기할 뿐이고, 누구에게 서적을 나누어 주었는지는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도 진술하지 않았다.”

옥에 갇힌 김 알렉시오는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고, 구할 수도 없었다. 다른 죄수들처럼 음식과 바꿀 짚신을 삼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대구로 이송되어 온 지 약 2개월 만에 굶주림과 형벌의 상처 때문에 옥사하고 말았으니, 이때가 1816년 음력 10월 21일 이전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는데, 아직 혼인을 하지 못한 때였다.

이후 오랫동안, 조선 신자들 사이에서는 김시우 알렉시오의 열심과 재능, 변론과 용기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졌다. 또 이를 듣는 모든 신자가 그를 교회의 영광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김시우 알렉시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이시임 안나(1782-1816년)

1782년 충청도 덕산의 높은뫼(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에 있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이시임(李時壬) 안나는 나이가 들어서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녀의 집안은 본디 무관으로 이름이 있었는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에는 고향을 떠나 가난한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1827년의 정해박해 때 체포되어, 8년 뒤 전주 옥에서 사망한 이성지 요한이 그녀의 오빠이다.

이 안나의 부친은 처음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사를 다닐 때면 천주교 신앙을 문제 삼아 자식들에게 악담을 퍼붓곤 하였다. 그러다가 죽기 2년 전에야 비로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 안나는 재색을 겸비한 처녀로 교리 실천에 뛰어난 열성을 보였다. 또 일찍부터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였는데, 이 때문에 가족이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괴로움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그녀는 가족의 괴로움을 덜어 주고자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한 동정녀 공동체로 가서 그들과 함께 살기로 작정하였다.

이때, 성이 박씨(朴氏)인 한 교우 뱃사공이 이 안나를 그 공동체까지 데려다 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 뱃사공은 그녀와 함께 있게 되자 마음이 달라져 강제로 그녀와 혼인을 하였고, 둘 사이에서 종악이가 태어나기에 이르렀다. 이후 그녀의 남편은 몇 해 안 되어 사망하였고, 그녀는 어린 종악이를 혼자 길러야만 하였다.

과부가 된 다음에도 이 안나는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또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신자들이 모여 사는 진보 머루산(현, 경북 영양군 석포면 포산리) 교우촌으로 가서 살았다. 바로 이곳에서 그녀는 1815년 을해박해를 겪게 되었다.

포졸들에게 체포된 이 안나는 먼저 안동으로 끌려가 신앙을 굳게 증언하였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대구로 이송되어 형벌을 받고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어야만 하였다. 그녀는 아들 종악이가 자신의 품에서 죽는 괴로움 속에서도, 또한 여러 차례의 문초와 형벌 속에서도 결코 신앙심을 잃지 않았다.

당시 조정에서는 대구 감사의 사형 선고문을 받고서도 오랫동안 판결을 내리지 않다가 1년 6개월 정도가 지난 뒤에야 임금의 재가를 얻었다. 이때 대구 감사는 끝까지 신앙을 증언한 신자들을 형장으로 끌어내 마지막으로 배교를 종용하였는데, 이에 대한 이 안나의 답변은 이러하였다.

“예수님과 마리아께서 저희를 부르시면서 같이 천국으로 올라가자 하시는데, 어떻게 배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잠시 지나가는 목숨을 보존하려고 참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잃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다음 이 안나는,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34세였다. 이시임 안나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이시임 안나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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