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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 우련전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김종한 안드레아가 살던 교우촌
지번주소 경상북도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 87-1 부근 
도로주소 경상북도 봉화군 재산면 일월산길 14-97 부근
전화번호 (054)672-1784
홈페이지 http://cafe.daum.net/john1004
관련기관 춘양 성당    (054)672-1782
관련주소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현마1길 35

복자 김종한 안드레아(?-1816년)

신자들 사이에서 ‘계원’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는 충청도 면천의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태어났다. 족보에는 그의 이름이 ‘한현’(漢鉉)으로 나온다. 1814년에 순교한 김진후 비오의 아들로, 김 데레사 성녀의 아버지이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작은할아버지이다.

김 안드레아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몇 년 뒤, 맏형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에 앞서 그의 맏형은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던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의 도움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이를 가족에게 전해 주었다. 한편 김 안드레아의 부친인 김진후 비오는 처음에 입교를 거부하였으나, 계속되는 자식들의 권유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에는 아주 열심인 신자가 되었다.

부친 김 비오가 박해를 받고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였으므로, 그의 자녀들은 안전한 신앙생활을 위해 뿔뿔이 흩어져 살 수밖에 없었다. 김종한 안드레아도 가족과 함께 홍주를 거쳐 경상도 영양의 우련밭(현, 경북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으로 가서 오랫동안 숨어 살았다.

김 안드레아는 교리를 실천하는 데 아주 열심이었다. 끊임없는 기도 생활과 이웃을 위한 애긍, 신심을 함양하기 위한 극기 행위는 거의 일상이 되었다. 낮에는 천주교 서적을 필사하여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밤에는 신자들을 자신의 집에 모아 놓고 가르쳤다. 또한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에도 노력하여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난 뒤, 김 안드레아는 영양에서 체포되어 안동으로 끌려갔으며,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대구로 이송되었다. 그가 대구 감영 앞에 이르렀을 때, 마침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가 잠시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어 감영 문을 나가고 있었다. 이것을 본 그는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그녀를 열성적으로 권면하였고, 이에 감화되어 그녀는 다시 관장 앞으로 나아가 신앙을 증언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김 안드레아가 신앙을 증언할 차례였다. 관장은 그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권하였으나, 그의 신앙은 여러 차례의 형벌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김 안드레아는 조용하면서도 꿋꿋하게 천주교가 진리임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감사는 그의 결심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김종한은 마음 깊이 천주교를 좋아하여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도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다니면서 익혀 왔습니다.”라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조정에서 사형 판결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김 안드레아는 옥중에서 두 통의 편지를 형에게 보내고, 교우들에게도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형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저는 순교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며, 감히 이 마지막 은혜를 바라기까지 합니다. 제가 만일 이 훌륭한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이후에는 어떻게 삼구(三仇 : 영혼 구원의 세 가지 원수. 곧 육신, 세속, 마귀를 이른다)에 대적해 나가겠습니까? …… 만약에 제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그것을 영영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천주님의 은총을 바라고, 다음으로는 여러 교우들의 기도를 믿습니다.”

김종한 안드레아가 옥에 갇혀 있은 지 1년 6개월 정도가 되어서야 임금은 사형을 윤허하였다. 그러자 대구 감사는 즉시 천주교 신자들을 옥에서 끌어내 처형하도록 하였다. 이때 김 안드레아가 지도층 신자로 지목되어 제일 먼저 칼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그때는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이었다. 김 안드레아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김종한 안드레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성녀 김 데레사(金~, 1797-1840년)

성녀 김 테레사(Teresia, 또는 데레사)는 충청도 면천 고을에 살던 김대건 신부의 당고모이다. 그녀의 조부 김진후 비오(Pius)는 1814년에 해미에서 순교했고, 부친인 김종한 안드레아(Andreas, 또는 김한현 안드레아)는 1816년에 대구에서 순교했던 순교자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박해를 피하여 이리저리 피해 다녔기에 그녀가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어쨌든 그녀는 단아하고 자선심이 많은 처녀였다. 열일곱 살이 되어서 손연욱 요셉에게 출가하였는데, 단란한 생활 가운데서 여러 자녀를 낳아 모두 하느님을 경외하도록 교육을 시켰다.

그러던 중 1824년에 남편이 체포되어 해미 감옥에서 순교하자, 계속해서 정절을 지킴으로 모범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난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으로 만족하지 않고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을 할 정도로 고행에 전심하였다. 당시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게 되자 신부의 처소를 보살필 사람을 구하였는데 김 테레사가 적임자로 뽑혀 정정혜 엘리사벳과 함께 이를 기쁘게 받아들여 열심히 일하였다.

유 신부가 조선을 떠난 후 김 테레사는 앵베르 주교의 처소를 보살피는 사람으로 일하던 중 박해가 일어났다. 그녀는 위험이 닥쳐왔을 때에도 피신하지 않고 있다가, 여러 신자들과 함께 7월 19일에 붙잡혀 오라로 결박을 당한 채 옥에 갇혔다. 김 테레사는 옥에서 고문과 갖가지 괴로움을 당하였지만, 배교하거나 신자들을 고발하거나 선교사들의 피난처를 말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태형 300대의 고통을 꿋꿋한 자세로 참아 받았다. 김 테레사는 여섯 달 동안이나 옥중에서 고초를 겪은 후, 마침내 교수형의 선고를 받았다. 형리들은 그녀의 목에 끈을 감고 양쪽에서 오랫동안 잡아 당겨 끈의 양쪽 끝을 말뚝에 단단히 감아놓았다. 이리하여 김 테레사는 44세를 일기로 순교의 영광을 차지하였으니, 때는 1840년 1월 9일이었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성인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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