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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정보 보물 제308호
조상제사문제(祖上祭祀問題)
 
1. 문제의 성격
 
조상 제사문제는 인류 구원의 보편적 성사인 가톨릭 교회가 유교문화권의 동양인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어떻게 왜곡됨이 없이 전하며 또 그리스도교 신앙과 유교문화와의 조화를 이룰 것이냐 하는 문제에서 비롯하였다. 가톨릭 교회는 창립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함에 있어 한편으로는 복음의 순수성과 보편성을 유지하면서 다른 편으로는 각 민족의 고유 문화를 존중하고 수용하여 그리스도교를 그 민족 안에 토착화해야 하는 이중적인 어려움을 지니고 있다. 이 선교의 양면성은 시대나 환경에 따라 어느 일면이 강조되기도 하나 근본적으로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상호 조화를 통해서만 교회는 본연의 사명을 원만히 수행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천주교가 전래되던 당시 중국과 한국은 생활 전반에 걸쳐 유교사상과 문화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효(孝)의 종교라고 일컬어질 만큼 효를 중시하는 유고에서 부모 생시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제사를 통해 효도를 계속하며, 또한 공자에 대해서도 만세의 스승으로 받들어 존경의 의식과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 선교에 임한 서양 선교사들은 이 이질적인 유교식 조상제사와 공자 공경의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또 그리스도교 신앙과 병행할 수 있느냐는 난제에 봉착하게 되었고, 이 문제에 대해 1세기 간이나 논쟁을 벌였다. 마침내 로마 교황청에서 이 의례들을 미신적인 행위라고 판단하여 금지 명령을 내리게 되며 이로써 한국, 중국, 일본 등 유교문화권의 극동지방 선교는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교황청이 이런 금령을 내린 데는 여러 요인이 있었으나 선교정책에 있어 토착화보다는 신앙의 통일성을 중시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 후 약 200년간 이 금령은 엄격히 준수되어 오다가 20세기에 들어와 시대의 변천과 교황의 선교정책의 변화에 따라 상당히 완화되었다. 그러나 이 조상제사문제는 앞으로 극동지방 선교와 토착화를 위해 더욱 연구되고 해결되어야 할 중대한 과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2. 유교 조상제사의 근본 의미
 
인(仁)을 핵심으로 하는 유교는 효를 통해 인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아 효를 무엇보다 강조하며, 또한 모든 덕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이 효에 의해 그 사람됨을 평가하며 효도하지 않는 자는 자식이라 할 수도 없고 사람이라고도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유교의 효의 정신은 가장 귀중한 생명과 지극한 사랑과 은혜를 조건 없이 주신 생명의 근원인 부모와 선조께 감사의 보답을 드리는 데 있다. 보본(報本)과 보은(報恩)의 마음에서 연유한 이 효는 구체적으로 3가지 효도(孝道)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즉 부모로부터 받은 몸을 잘 보전하고 후손을 통해 지속시키며, 부모를 지성(至誠)으로 봉양하며, 부모의 뜻을 받들어 도(道)를 닦아 떳떳한 사람이 됨으로써 후세에 이름을 빛내고 부모에게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이러한 효도는 부모 생시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계속 “죽은 이 섬기기를 산 이 섬기듯이 함”[事死如事生](中庸 19章)으로 이어가며 특히 제사를 통해 실천된다. 제사는 생명의 근본에 보답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돌아가신 부모와 선조를 생시와 같이 공경하여 효를 이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유교 조상제사의 근본 의미는 복을 구하기 위함이나 기타 다른 목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녀로서 자기 생명의 근본인 부모와 선조에게 보본과 보은의 효를 계속 실천하는 데 있다.
 
이러한 조상제사는 다음과 같은 예절들로 구성되어 있다. 즉 죽은 이의 신상(神像)인 신주(神主)에게 인사를 드리는 참신(參神), 향을 피우고 술을 부음으로 혼(魂)과 백(魄)을 불러들여 임재(臨在)하도록 하는 강신(降神), 정성의 재물을 올리는 초헌(初獻)과 아헌(亞獻) 및 종헌(終獻), 사모의 정을 표하면서 제물의 흠향을 간절히 청하는 축(祝), 제물을 흠향하도록 잠시 문을 닫고[闔門] 시간적 여유를 주는 유식(侑食), 차나 숭늉을 드리는 헌다(獻茶), 작별 인사를 올리는 사신(辭神), 제물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죽은 이와 일체(一體)를 이루고 친족 간의 일치와 유대를 도모하는 음복(飮福) 등이다. 이 모든 예절은 죽은 이를 생시와 같이 정성껏 섬기려는 효도의 상징적 표현이요, 또한 “선조에게 제사 지낼 때는 여실히 임재(臨在)해 계신 듯이”(論語 八佾 12) 하는 성경(誠敬)의 실천인 것이다.
 
한편 유교 제사에 있어 중심이 되는 신주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는 사람의 죽음이란 혼과 백의 갈림인데 백을 떠난 혼이 의지할 곳 없이 떠돌아다니게 하는 것이 살아 있는 자의 도리가 아니라고 여겨 혼이 의지하도록 마련해 준 의빙처(依憑處)요, 둘째는 인간의 본성적 조건에서 볼 때 돌아간 이를 계속 사모하고 섬기기 위해 볼 수 있는 상(像)이 필요한데, 신주는 바로 즉은 이의 신상인 것이다. 사진도, 초상화도 없던 아주 옛날에는 제사 때 죽은 이와 혈육이 같은 손자 중 하나를 뽑아 신상으로 삼아 제사상에 올려놓고 지냈는데 이를 시(尸) 또는 시동(尸童)이라 한다. 시동에게는 죽은 이의 웃옷을 입혔으니 이는 돌아간 이를 잘 연상하여 극진한 정성을 드리기 위함이다. 후대에 와서는 시동 대신 신주를 세웠으며 또 지자(支子)가 제사를 지낼 때는 지방(紙榜)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신주의 유래나 또 제사 후 지방을 태워 없애는 것은 신주 또는 위패(位牌)는 의빙처보다는 신상의 의미가 더 강하며 더구나 현대에 와서 의빙처의 의미는 거의 상실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3. 중국 의례논쟁(儀禮論爭)과 교황청의 금령
 
중국에서의 소위 의례논쟁이란 그리스도교의 신(神, 라틴말의 Deus)에 해당하는 중국말 용어가 무엇이며 선조와 공자에게 드리는 유교식 제사와 존경의식을 허용할 것이냐는 문제에 대해 약 100년간 벌였던 쟁론을 말한다. 16세기 말엽 중국 선교에 임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와 그의 동료 예수회원들은 주로 지식층을 상대로 전교를 하였고 높은 수준의 유교문화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고서 그리스도교 신앙에 배치되지 않는 한 받아들이고 조화하려는 문화적 적응주의(適應主義)내지 보유론적(補儒論的) 입장을 취하였다. 그래서 선조와 공자에게 드리는 제사나 존경의식에 대해서도 그 본래 의미를 파악하여 자녀나 제자가 부모와 스승에게 드리는 효도와 존경의 표현이라고 해석, 허용하였다. 그러나 예수회보다 반세기 늦게 중국에 들어온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는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선교 방침을 비난하면서 조상제사와 공자 공경의식을 미신적 행위라고 반대하였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게 된 데는 선교 방침의 차이도 있었지만 이들이 접촉한 사람들이 예수회와는 달리 주로 시골의 서민층이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시골사람들이 거행하던 조상숭배 제사나 공자 공경의식에는 민간신앙의 영향으로 미신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의례논쟁의 발단은 1643년 도미니코회원 모랄레스(Morales)가 예수회의 선교 방침에 반대하여 17개항의 문제를 교황청에 제기함으로써 일어난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1645년 모랄레스가 제기한 행위들을 금하는 훈령을 내렸다. 이에 당황한 예수회는 마르티니(Martini)를 로마에 파견하여 자기들의 입장을 설명하였으며, 교황 알렉산데르 7세는 검토 끝에 1656년 예수회의 선교 방침을 허용하는 훈령을 내렸다. 이어서 1659년 포교성성은 모든 선교사를 위한 훈시를 통해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 한 선교지의 문화 전통을 존중할 것이요, 혹시라도 그것을 바꾸었으면 하는 생각은 하지 말 것이며 비록 비난을 받아야 할 것으로 판단되는 관습에 도전함에 있어서도 말로써가 아니라 자제와 침묵으로써 하고 좋은 기회가 주어지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시달하였다. 이러한 교황청의 결정에 불만을 품은 도미니코회는 다시 이의를 제기하게 되며, 이에 교황청은 1669년 먼저의 훈령이 나중의 관용훈령에 의해 무효화된 것이 아니라 둘 다 각각 제시된 문제점과 환경에 따라 지켜져야 한다고 신축성 있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런데 파리 외방전교회의 입국은 다시 문제를 재연시켰으니 파리 외방전교회 중국 책임자이며 복건성(福建省)의 주교인 메그로(Charles Maigrot)는 1693년 자기 관할구역에 있는 사제들에게 공자와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를 금하는 명령을 내리고 이 문제에 대한 명백한 결정을 교황청에 요청하였다. 이에 오랜 연구와 검토 끝에 교황 글레멘스 11세는 1715년 3월 19일 칙서 를 통해 제기된 의례에 대한 금지령을 내렸다. 즉 그리스도교의 신의 명칭으로는 천주(天主) 이외에 천(天)이나 상제(上帝) 등의 다른 용어를 사용할 수 없으며, 조상숭배 제사와 공장 공경의식을 금하며, 또한 조상의 위패도 금하나 다만 신위(神位)라는 글자 없이 이름만 써서 모시는 것은 허용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1742년 7월 11일 칙서 를 통해 글레멘스 11세의 칙서를 재천명하면서 모든 선교사에게 칙서 준수를 서약하도록 명하고 이에 불복하는 자는 엄한 벌과 함께 중국에서 추방될 것이라고 경고하며 이 문제에 대한 일체의 논란을 금함으로써 파란만장했던 1세기 간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의례문제에 대한 교황청의 판단기준은 그 근본의미가 무엇이냐는 관점에서보다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병행할 수 있느냐는 점이었으며, 금지령을 내린 이유는 당시 중국인의 종교 심성으로 볼 때 이 의식들이 미신과 혼합되어 있어서 미신적 요소를 분리해 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처의 이면에는 교황청의 선교정책에 있어서 토착화보다는 신앙의 순수성과 통일성의 중시, 유럽화된 그리스도교와 보편적 그리스도교 신앙과의 혼동 및 언어의 장벽 등 많은 요인들이 작용했던 것이다.
 
 
4. 한국에 있어 제사 금령과 그 영향
 
외국 선교사의 입국 전교 없이 스스로 천주교에 대해 학문으로 연구한 끝에 신앙으로 신봉하고 또 전파한 초기 조선 학자들은 천주교 교리와 유교의 가르침을 조화시키려는 보유론적 입장을 취했으며, 이런 태도는 당시 지식층을 이론적으로 설복, 입교시키는데 주효하였다. 그런데 유교와 천주교의 충돌, 참혹한 피의 참사를 불러일으킨 사건이 발생하니 조상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워 버린 소위 폐제분주사건(廢祭焚主事件)이다. 물론 이전에도 천주교 교리에 대한 이론적인 논란이 있었으며 을사추조적발(乙巳秋曹摘發)과 정미반회사건(丁未泮會事件)이 일어났으나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었다.
 
1790년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을 통해 조선에 전해진 북경 구베아(Alexandre de Gouvea) 주교의 조상제사 금지명령에 따라 전라도 진산(珍山)에 살던 선비 윤지충(尹持忠, 바오로)과 그의 외종형 권상연(權尙然, 야고보)은 조상의 제사를 폐하고 그 신주를 불태워 버렸다. 또한 1791년 5월 윤지충의 어머니 권씨(權氏)가 별세하자 이들은 정성으로 장례를 치렀으나 위패는 만들지 않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이 사건은 당시 조상숭배를 신앙과 같이 지켜 오던 전통 유교사회에서는 마치 ‘모든 계층의 눈동자를 찌른 격’이었으며 그 충격과 파문은 엄청났던 것이다. 당시의 임금 정조(正祖)는 평소 학자들을 아끼고 천주교도들에 대해 호의적이어서 사건이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온 조정이 들끓고 상소가 빗발치듯 할 뿐만 아니라 국시(國是)를 어긴 자들을 그대로 둘 수 없어 이들을 사형에 처하고 천주교도들을 문초했으며 더 나아가 천주교에 대한 금교령(禁敎令)과 함께 전국의 모든 서학서(西學書)를 불태워 버리도록 명했으니 이것이 이른바 신해박해이다.
 
조선에 있어 천주교에 대한 100여 년간의 탄압은 사상적 갈등, 당쟁, 경제적 피폐, 민족적 위기의식 등 여러 배경에서 기인했으나, 이 폐제분주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으며 피의 참사를 정당화하는데 충분한 이유를 제공해 주었다. 천주교도들은 부모도 모르는 불효자, 인륜(人倫)을 저버린 짐승의 무리로 낙인이 찍히고, 사회 ·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기존 윤리질서와 사회체제에 대한 부정과 파괴를 자행하는 불온세력 내지 비국민(非國民)으로 인식되었다. 이로써 천주교 선교는 큰 타격을 입었고 신앙의 토착화를 막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나, 다른 측면에서는 지식층의 입교를 극난케 함으로써 천주교가 점차 서민층으로 확산되어 서민층이 주류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면 조선에서 이렇듯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 폐제분주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윤지충과 정하상(丁夏祥)은 공술(供述)과 <상재상서>(上宰相書)에서 다음과 같이 상세히 진술하고 있다. 첫째, 물질적 음식물은 혼의 양식이 될 수 없고, 잠자는 사람에게 음식물을 드리지 않듯이 영원히 잠든 이에게 제물을 차려 봉헌하는 것은 허세요 가식이며, 둘째 신주는 목수가 만든 나무 조각이므로 나의 골육이나 생명과 아무 관계가 없어 부모라 부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죽으면 그 혼이 어떤 물질에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그들의 독자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구베아 주교의 사목서한의 설명을 그대로 인용했음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이런 이유들은 당시 조상숭배가 국교와도 같이 준행되던 유교사회에서는 상상치도 못한 일이요, 이들 역시 천주교회에서 금하는 까닭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상제사에 대한 윤유일과 구베아 주교의 대하는 당시 유학자들과 천주교회간의 인식의 차이를 단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유일(有一)이 ‘제사를 드리는 것은 돌아간 이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이 하기 위함[事死如事生]인데, 천주교를 믿으면서는 제사를 지낼 수 없다면 이는 매우 곤란한 일이온데 무슨 방도가 없겠습니까?’ 하고 묻자, 주교가 대답하기를 ‘천주교는 반드시 성실을 가장 중요시하는데 사람이 죽은 후 음식을 차려 놓는 것은 크게 성실한 도리[誠實之道]에 어긋난다’고 하였다”(≪邪學懲義≫ 移還送秩 權儉供草).
 
 
5. 시대 변천과 허용 조치
 
약 200연간 엄격한 규제 하에 금지되었던 조상제사와 공자 존경의식이 20세기 전반서부터 해빙기를 맞게 되었다. 교황청이 이 문제에 대해 정책 변화를 하도록 작용한 요인으로는, ① 역사 연구의 발전으로 인한 토착화에 대한 재인식, ② 엄격한 단죄 신학에 반대하여 비 그리스도교 민족 안에 내재해 있는 영적 요소들과 그리스도교 은총을 조화시키려는 신학사조의 대두, ③ 동양에서 민족주의의 등장에 세계 정치무대에서 이들의 비중이 커짐에 따라 동방 민족들의 문화적 유산에 대한 서구인들의 보다 깊은 이해와 통찰, ④ 서양 문물과 사상의 영향으로 동양인의 종교 심성에서 미신적 요소의 감소, ⑤ 국법에 종교의 자유가 명시되고 국가에서 명하는 공경의식은 그 본래 기원이나 의미가 어떠하든지 간에 이제 와서는 단지 사회적 국민의식에 불과하다는 정부 당국의 발표 등을 들 수 있다.
 
20세기에 와서 이 문제에 대한 첫 도전은 1932년 일본의 팽창주의에 의해 세워진 만주국에서 강력하게 일어났다. 이 신생 만주국은 국민의 단결을 이루려는 목적으로 공자숭배를 국민에게 의무화했으며 이로 인해 천주교도들은 신앙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당황한 교회 당국은 공자숭배의 성격을 정부에 질의했으며 만주정부는 이 의식이 종교적인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사회적 국민적 예식일 따름이라고 답변하였다. 이에 교황 비오 11세는 1935년 공자 존경의식을 허용하였다. 또한 1년 후인 1936년에는 일본의 신사참배(神社參拜)를 허용하면서 지금까지 금지되었던 혼인, 장례, 그 밖의 사회 풍습 등에 대해서도 폭 넓은 허용조치를 취함으로써 적응주의원칙이 교회의 확고한 선교정책임을 드러냈다. 더 나아가 비오 12세는 1939년 12월 8일 <중국 예식에 관한 훈령>을 통해 공자 존경의식을 행할 수 있다고 전면적으로 허용했으며, 선조 공경의식에 있어서는 “시체나 죽은 이의 상 또는 단순히 이름이 기록된 위패 앞에 머리를 숙임과 기타 민간적 예모를 표시함이 가하고 타당한 일이다”라고 함으로써 비록 전면적인 허용은 아닐지라도 상당히 관용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이러한 조치를 취한 이유는 시대 변천에 따라 풍속도 변하고 사람들의 정신도 변해서 과거에는 미신적이던 예식이 현재에 와서는 다만 존경과 효성을 표하기 위한 민간적 예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훈령에 준하여 한국 주교단은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 관한 보다 상세한 지침을 정하였는데 허용 사항으로는, 시체나 무덤, 죽은 이의 사진이나 이름만 적힌 위패 앞에서 절을 하고 향을 피우며 음식을 진설하는 행위 등이며, 금지 예식은 제사에서 축과 합문(闔門)[혼령이 제물을 흠향하도록 잠시 문을 닫는 예식], 장례에 있어 고복(皐復)[죽은 이의 혼을 다시 불러들이는 예식], 사자(使者)밥[죽은 이의 혼을 고이 모시고 저승으로 가라는 뜻으로 밥과 신발을 상에 차려 놓는 것] 및 반함(飯含)[죽은 이의 입에 쌀, 조가비, 구슬 등을 넣는 예식] 등이다. 그리고 위패는 신위라는 글자 없이 다만 이름만 써서 모시는 경우 허용이 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완화조치에도 불구하고 이 조상제사문제는 아직도 그리스도교 선교에 걸림돌이 되고 있으며, 극동지방의 복음화를 위해 깊이 연구되고 재고되어야 할 과제이다. 또한 앞으로의 선교와 토착화를 위해 거울로 삼아야 할 역사적 교훈인 것이다. (崔基福)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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