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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 황사평 성지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신축교안으로 희생된 순교자들의 안식처
지번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기와5길 117-22 
도로주소 제주도 제주시 기와5길 117-22
전화번호 (064)721-0146
팩스번호 (064)721-0146
홈페이지 http://www.diocesecheju.org
전자메일 catholic-cheju@hanmail.net
관련기관 제주교구청    (064)729-9500
관련주소 제주도 제주시 관덕로8길 14
제주 교안(濟州敎案)
 
1901년 봉세관(封稅官)의 조세 수탈과 천주교회의 교폐(敎弊)에 대하여 제주 도민들이 반발하여 일어난 교안. 그 결과, 제주 지역의 천주교 신자 수백 명이 민군(民軍)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지금까지 1901년 제주 교안은 신축 교난(辛丑敎難), 이재수(李在守)의 난, 제주 민란 등 여러 가지로 불려왔다. ‘교안’(敎案)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국가 정책이 전면 박해에서 전면 개방으로 옮겨가는 과도 이행기에 생겨나는, 종교 문제 또는 종교 문제와 관련되어 벌어진 다툼이 정치적 · 행정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사안을 표현하는 보편적 의미를 지닌 역사 용어이며, 특정 종교의 의식을 담은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교안이며 최대로 인명의 희생을 초래한 참극이었던 1901년 제주도에서의 교 · 민 소요 사안을 한낱 민군 지도자의 이름을 붙여 부르는 ‘이재수의 난’이나 단순히 ‘제주 민란’으로 명명하기보다는, 1901년 ‘제주 교안’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배경과 원인
 
전제 군주 체제의 강화를 꾀하던 대한제국은 황실 재정을 채우기 위하여 내장원(內藏院)에서 봉세관 강봉헌(姜鳳憲)을 1900년 제주도에 내려보냈다. 그는 공유지에 대한 무리한 징세를 하였고, 심지어 어장 · 그물 · 소나무 · 목초지에 대해서도 세금을 매겼다. 더구나 지금까지 징세를 담당하던 지방관 · 향임(鄕任) 세력들을 배제하고 독점적인 징세를 함으로써 토착 세력과 주민들로부터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1899년 5월 제주에는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페네(Peynet, 裵嘉祿) 신부와 조선교구(조선 대목구) 소속의 한국인 성직자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신부 등 두 명의 선교사가 파견되었다. 1900년 초에는 페네 신부가 본토로 전출되고 그 대신 라크루(Lacrouts, 具瑪瑟) 신부가 부임하였으며, 제주 교안이 벌어진 직후인 1901년 5월에는 무세(Mousset, 文濟萬) 신부가 증파되었다. 천주교의 제주 선교는 외국인 및 이문화에 대해 폐쇄적이던 제주도민의 습성과 뿌리 깊은 무속 신앙 등으로 인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서민층과 향리층 · 유배인 등이 교리를 배우고 세례성사를 받으면서 차츰 제주 사회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점차 신자가 늘어나면서 천주교회는 제주도 내의 새로운 사회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이 과정에서 마을의 신당을 파괴하고 신목을 베어 버리는 등 무리한 행위가 이루어져 자주 주민들과 충돌하였다.
 
1901년 2월 정의군 하효리의 오신락(吳信洛) 노인이 교당에 끌려갔다 온 뒤 자살한 사건이 터지면서 주민들의 교회에 대한 반감은 고조되었다. 더구나 일부 신자들은 봉세관 강봉헌의 중간 징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주민들을 더욱 격분하게 하였다. 이러한 세폐(稅弊)와 교폐에 대항하기 위하여 대정군에서는 사설 상무사(商務社)가 조직되어 신자들과 사사로운 충돌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전개 과정
 
결국 1901년 5월 초 중앙의 조세 수탈에 저항한 민회가 열리고 제주 교안은 민란으로 시작되었다. 봉세관의 조세 수탈을 시정하기 위하여 일어난 민란은, 강봉헌이 도망쳐 버린 데다 신자들의 한림 민회소 습격 사건이 벌어지자 이를 계기로 민군과 교회 측의 대결로 치달았다. 민군은 동 · 서진으로 나뉘어 도민들을 규합, 세력을 강화시켜 제주읍성 남쪽 황사평에 주둔하였다. 이로부터 민군과 제주읍성으로 쫓겨 들어간 신자들 사이에 상호 살상이 이어졌다. 결국 서로의 접전 끝에 5월 28일 제주 성내의 주민들에 의해 성문이 열리자, 민군은 성내로 진입하여 제주성을 장악하고 신자들을 관덕정 앞에 모아 놓고 살해하는 참극으로 귀결되었다.
 
교회 측에서 바라본 교안의 전개 과정을 대체적으로 나누어 보면 ① 상무사와 신자들과의 충돌 ② 신자들의 제주읍 교회로의 피신 ③ 신자의 한림 민회소 습격, 장두 체포 압송 ④ 신자의 대정성 진입, 발포, 주민 피살 ⑤ 민군의 무장 ⑥ 신자들의 무장 ⑦ 신자의 황사평 주둔 민군 선제 공격 ⑧ 민군의 성 밖 신자 타살 ⑨ 교회 측의 프랑스 함대 원조 요청 ⑩ 민군 진압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위의 전개 과정을 보면, 상무사의 신자 압박, 신자의 선제 공격, 민군의 무력 대응, 교회의 강경 대응으로 이어지면서 교회 측과 민군 사이에 상호 타협의 여지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중간 조정에 나서야 할 지방관들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다. 김창수(金昌洙) 제주 군수의 경우 읍성을 벗어나 별도(別刀)로 피신하여, 민군 회유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채구석(蔡龜錫) 대정 군수는 신자들로부터 원성의 대상이 되어 교회 측에 대한 타협안 제시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교회 측에서는 신부가 직접 타협에 나서려고 하였으나, 최형순(崔亨順) 등 강경한 신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어 버렸다. 한편 민군의 경우에도 장두들은 타협을 원하였으나, 흥분한 군중들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해결 과정
 
당시 교안의 과정에서 피살된 자들은 대부분 천주교 신자들이었다. 교회 측에서는 대체로 500-700명 정도가 피살된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당시 제주에 파견된 평리원 안종덕(安鍾悳) 검사가 공식적으로 집계한 희생자 명단[濟民物故成冊]에 따르면, 신자 309명, 평민 8명이었다. 이 숫자는 샌즈(Sands)가 상경하여 고종에게 보고하였던 쌍방 간 300명이란 숫자와도 일치한다. 1902년 제주에 남아 있던 신자 강인봉(姜寅奉)도 신자들 중에 피살된 자가 350-360명이라 하였다. 따라서 제주 교안으로 희생된 신자 수는 300-350명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제주에서의 사태가 진압된 후에도 서울을 무대로 한 사후 수습 과정이 마무리될 때까지 제주 교안은 계속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도 교회와 내부(內部), 프랑스 공사관과 대한제국 외부(外部)에서 계속해서 사건 완결을 위한 대립과 교섭이 진행되는 알력이 있었다. 뒤처리의 현안 문제는 주모자에 대한 재판과 처벌 문제, 피살 희생자에 대한 휼금 배상(恤金賠償)의 문제와 피살 희생자의 묘지인 영장지(營葬地) 문제 등 세 가지였다. 주모자에 대한 재판이 끝나고 그들이 처형된 것은 1901년 10월 9일이었고, 휼금 배상의 집행이 1903년 11월 16일 실시되고 다음날 17일 영장지 문제가 타결됨으로써 제주 교안은 최종 마무리되었다. [박찬식,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0권,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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