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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 영광 순교자 기념성당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피 흘려 주님께 영광을 바친 영광 순교자들의 얼을 이어받아
지번주소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읍 도동리 143 
도로주소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읍 중앙로2길 40
전화번호 (061)351-2276
팩스번호 (061)351-0775
홈페이지 http://cafe.daum.net/ygcatholic
칼 모양의 기둥으로 영광의 순교자 네 분을 상징하는 순교자 기념문.

천주교의 전파 경로  영광 지역에 복음이 처음 전해진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선 호남의 사도인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1756-1801년)를 통해 전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유항검은 전주, 김제, 금구 등 10여 개 군(郡)에 약 15,000마지기나 되는 엄청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여 전라도 지역 최초의 신자가 되었다. 세례를 받은 후 그에게는 빈부귀천이 따로 없었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면서 모두에게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가난한 이웃은 물론 자신의 종들에게도 애긍과 희사를 베풀었다.


유항검과 그의 동생 유관검의 자선과 가르침에 감화받은 많은 이들이 입교하여 두서너 고을 백성의 반이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고도 한다. 다소 과장된 표현이지만 유항검 형제가 전교한 고을 중에는 영광도 포함된다. 신유박해 때 유관검을 신문하던 신문관도, “지금 허다하게 체포된 자는 너의 인척이나 가객이 아니면 모두 노비들이거나 소작인들인데, 그 무리가 거의 몇 개 군에 걸쳐서 성행했다.”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영광 지역에 산재해 있던 유항검 형제 전답의 소작인과 마름 중에 천주교에 입교한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고 믿어진다.


영광 성당은 2010년 9월 영광순교자기념성당으로 지정되었다.

다음으로 진산의 복자 윤지충 바오로(1759-1791년)를 통해서도 영광 지역에 천주교가 전해졌다고 보인다. 일찍이 고종사촌 정약용 요한 형제를 통해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후 스스로 교회 서적을 구해 읽으며 3년 동안 교리를 공부한 윤지충은 1787년 인척인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가족 친지에게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했는데, 인척인 유항검과도 자주 오가면서 널리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했다. 윤지충은 자신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무장의 최여겸, 고산의 양언주, 무안의 고시윤 등에게 전교하여 복음을 전라도 각지로 전파시켰다. 전라도 지방에서 그의 영향이 대단히 컸던 점과 영광 위에 있는 무장에서 한참 아래 있는 무안에서까지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가 교리를 배우고 입교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진산의 윤지충을 통해서도 영광에 천주교가 전해졌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사실은 영광에 살던 이우집 집안과 윤지충 집안의 혼인 관계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이우집의 아버지 이명일은 윤지충의 작은할아버지 윤덕렴이 사위이다. 유관검이 신유박해 때 신문 받는 과정에서 윤지충의 동생 윤지헌과 영광에 사는 이우집이 서로 격려하며 천주학을 공부한 사람들이라고 진술했다. 이우집이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신문 받으면서 유관검의 권유로 그의 집에서 1795년 무렵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고 진술한 사실도 있다. 따라서 늦어도 1795년 무렵에는 이미 영광 지역에 유관검의 사촌 형의 처가가 있는 월산리를 중심으로 천주교가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영광순교자기념성당 내부.

그리고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1751-1791년)가 1791년 신해박해로 전주에서 순교한 후 고산 저구리로 거처를 옮겨 교우촌을 형성한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1764-1801년)를 통해서도 영광에 복음이 전해졌다. 그가 고산 저구리에 정착하자 많은 이들이 그를 찾아와 천주교 교리를 배웠는데, 이때 입교한 이들 중에 영광의 윤종백이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무장의 복자 최여겸 마티아(1763-1801년)를 통해서도 영광에 복음이 전해졌다. 최여겸은 영광과 이웃한 고을인 무장현 동음치면 개갑에 살던 이로 진산의 윤지충에게 교리를 처음 배웠다. 혼인한 후 처가가 있는 충청도 한산에서 충청도 내포의 사도인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1759-1801년)를 만나 다시 교리를 배우고 아주 열심인 신자가 되었다. 무장으로 돌아온 최여겸은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중하였고, 자신이 깨달은 신앙의 진리를 이웃에게 전파하는 데 힘써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그들 가운데 28명이 신유박해 때 체포되었다. 그가 입교시킨 많은 사람 중에는 영광에 살던 조카 최일안과 영광 고을의 양반인 이화백이 포함되어 있다.


영광의 순교자 네 분을 다양한 십자가를 넣은 비석으로 기념하고 있다.

천주교의 전파 시기와 순교  영광 지역에 천주교가 전파된 경로를 통해 볼 때 영광 지역에 복음이 전래된 시기는 윤지충이 순교한 1791년 신해박해 이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영광 지역은 1791년 신해박해 이전부터 복음이 전해진 곳으로, 전북 전주 · 고산 · 금산 · 무장 · 김제 지역과 더불어 호남 지역에서 천주교가 다른 지역에 비해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곳이다. 영광 지역 신자 중 1801년 신유박해 때 이화백과 복산리의 양반 오씨(정확한 이름은 모름)가 영광에서 순교했고, 이우집과 최일안은 전주에서 처형당했다. 그리고 이종집과 남조이는 황해도 문화와 운율로 각각 귀양 갔고, 여회장 복녀 강완숙 골룸바(1761-1801년)의 딸 홍순희 루치아가 영광으로 귀양 왔다. 병인박해(1866-1873) 중인 1867년 영광 뜸밭 출신으로 공주 국실에 살던 김치명이 공주에서 교수형으로, 1872년 한때 영광 신어실에 살았던 유문보 바오로가 나주에서 옥사로 순교했다.


1801년 신유박해를 받아 영광 지역의 신앙공동체가 와해되기 전의 교세는 어느 정도일까? 기록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된 숫자는 이우집, 이종집, 오씨, 이화백, 윤종백, 남조이와 그녀의 남편 김득겸 등 7명이 전부이다. 그런데 이들 7명은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처벌받은 신자들 숫자이지 당시 영광 지역의 전체 신자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박해 때마다 전체 신자 중 일부만 체포되어 처벌받은 점을 고려하면 신유박해 직전 영광 지역의 신자는 이들 7명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신유박해 때 신문 과정에서 드러난 영광 지역 신자들의 수 7명은 전라도에서 전주 36명, 고산 16명 다음으로 세 번째로 많았다. 그리고 처벌된 신자 수도 처형된 신자 3명과 유배된 신자 2명을 합해 모두 5명으로 역시 전라도에서 세 번째로 많았다. 이러한 사실은 영광 지역의 교세가 전라도에서 세 번째로 컸다는 것을 말해준다.


순교자 기도상으로 영광 순교자들의 끈질긴 믿음을 대지의 흙덩어리로 형상화했다.

영광 본당의 설립과 재설립  그 이후 계속된 박해로 인해 신앙 선조들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지만 1937년 10월 영광 본당이 설립되었다. 1920년대 초 나주 노안 본당의 서 미카엘 가족이 영광군 백수면 대신리로 이주하자 당시 노안 본당의 카다스(J. Cadars) 신부가 서 미카엘 가정을 방문해 성사를 베풀었고, 그 후 정읍 본당의 김사언 요셉, 목포(현 산정동) 본당의 박기철 토마스 등이 이주해 오면서 영광 지역에 10여 명의 신자가 거주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설립된 영광 공소는 1930년대 초까지 노안 본당의 헨리(H. Henry) 신부가 관할했고, 1937년 광주지목구가 설정되면서 그해 10월 본당으로 승격되어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의 멀컨(T. Mulkearn, 姜) 토마스 신부가 초대주임으로 부임하였다. 멀컨 신부는 대지 1,851평과 20평 정도의 한옥 1동을 매입해 성당 겸 사택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이듬해에 성당을 신축하여 본당의 기반을 다져갔다. 또 성심학원이라는 3년 과정의 초등학교를 설립하여 200여 명의 학생들을 교육하였다.


이어 제2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재석 요셉 신부는 1941년 준적성 국민으로 분류된 골롬반 외방선교회 신부들과 접촉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수감되었다. 다음 해에 김재석 신부는 석방되었으나 목포 본당으로 전임되었고, 이후 본당의 사정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1944년 김재석 신부가 요양을 겸해 다시 영광 본당으로 부임한 것으로 보아 이 시기까지 존속되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후 영광 본당은 폐쇄되어 산정동 본당, 함평 본당의 공소가 되었다.


성당 둘레에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1960년대에 들어와 영광 지역 신자 수가 점차 증가했지만, 이들을 사목할 본당이 없었다. 이에 교구에서는 미국인 그리스머의 도움으로 1965년 5월 한국 전쟁 당시 전소된 성당 자리에 72평의 새 성당을 재건하고, 그해 12월 15일에 영광 공소를 함평 본당에서 분리하여 다시 본당으로 승격시켰다. 본당의 재설립과 함께 제3대 주임으로 부임한 오록(C. O’Rourke, 吳) 가롤로 신부는 1967년 5월 13일에 ‘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를 주보 성인으로 정하고 성당을 봉헌했고, 7월에 본당의 종각을 건립해 그달 30일에 1873년 미국 피츠버그에서 제작된 종을 설치했다.


영광순교자기념성당 지정  2007년 9월 1일 제18대 주임으로 부임한 문병구 스테파노 신부는 영광 지역 순교자 역사 발굴 작업을 시작하고, 2009년 3월 27일 영광 순교자 고찰(1801년 신유박해) 학술회의 개최했다. 이러한 노력에 이어 광주대교구장 김희중 대주교는 2010년 9월 10일자 공문을 통해 신유박해 때 목숨을 잃은 영광 지역 순교자들을 기리고자 순교터와 인접한 영광 성당을 ‘영광순교자기념성당’으로 지정했다. 여러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영광순교자기념성당 정문 앞(현 전남 영광군 영광읍 도동리 석장승 앞 남쪽 개울가 인근)이 1801년 신유박해 때 영광에서 순교한 이화백과 오씨가 처형된 순교터로 확인되고 있다. 이곳은 영광 읍성 밖으로 물이 흐르는 홍교가 있고, 수많은 사람이 모이는 옛 장터이며, 우시장이 있던 곳으로 1832년에 잡귀 · 액 · 살 등 부정한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석장승을 이곳에 세운 것도 순교터 추정의 근거가 되고 있다.


이화백과 오씨가 처형된 순교터로 석장승이 세워져 있다.

2011년 7월 28일 제19대 주임으로 부임한 최상준 유스티노 신부는 그해 11월 ‘영광순교자현양사업회’를 구성하고, 2013년 7월 27일 영광순교자 기념성당 신축 기공식을 교구장 김희중 대주교의 주례로 거행했다. 2014년 6월 20일 “영광성당 75년사”를 발간하고, 그해 6월 28일 영광순교자기념성당 축복식을 가졌다. 기념성당은 타원형 평면으로 교회를 상징하는 배와 물고기 이미지를, 등대 형태의 종탑을 통해서는 영광을 비추는 그리스도의 빛을 표현하고 있다. 기념성당 정면의 순교자 기념문은 성과 속의 경계로서 네 개의 칼 모양 기둥은 영광의 순교자 네 분(이화백, 오씨 양반, 김치명, 유문보 바오로)을 상징하고 있다. 기둥은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배의 돛과 만장의 이미지이며, 가운데 십자가는 조선 시대 죄인의 형틀로써 순교를 의미한다.


2015년 1월 13일 제20대 주임으로 부임한 송홍철 루카 신부는 기념성당 1층에 영광순교자기념관을 마련해 2017년 5월 13일 김희중 대주교를 모시고 영광성당 설립 80주년 기념미사 및 영광순교자기념관 축복식을 거행했다. 본당 설립 80주년을 맞아 마련한 기념관은 영광의 여섯 분의 순교자와 세 분의 유배자, 초기교회 신자 두 분(윤종백, 김득겸)을 기리고 있다. 기념관 내부에 ‘핏빛 사랑으로 진복을 사신 영광의 순교자들’(양단철 작)이라는 대형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설치하고, 한국 천주교 103위 성인 중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다섯 성인의 유해를 두 개의 성인 유해함에 나눠 안치했다. [출처 : 이은주, 한국가톨릭대사전 제9권과 서종태 박사 논문, ‘영광 지역의 천주교 전파와 박해 및 순교터’와 관련 신문 기사를 중심으로 편집(최종수정 2018년 6월 27일)]


2017년 문을 연 영광순교자기념관의 핏빛 사랑으로 진복을 사신 영광의 순교자들 작품.영광순교자기념성당 전경.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모바일용 요약 설명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영광 지역에 복음이 처음 전해진 것은 1791년 신해박해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먼저 호남의 사도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유관검 형제의 모범과 애긍을 통해 그들이 소유한 전답의 소작인과 마름들뿐 아니라 가난한 이웃에게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윤지충 바오로를 통해 전라도 각지에 복음이 전파되는데, 그와 인척 관계를 맺은 영광의 이우집 또한 유관검의 권유로 입교했습니다. 1791년 신해박해로 고산 저구리로 들어와 교우촌을 형성한 윤지헌 프란치스코를 통해서도 복음이 전해졌는데, 그를 찾아와 교리를 배우고 입교한 이들 중에 영광의 윤종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무장에 살던 최여겸 마티아의 열정적인 선교를 통해서도 전해졌는데, 그가 입교시킨 많은 사람 중에 영광에 살던 조카 최일안과 영광 고을의 양반인 이화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광 지역은 호남에서 천주교가 비교적 일찍 그리고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영광 지역 신자 중 1801년 신유박해 때 이화백과 복산리의 양반 오씨가 영광에서 순교했고, 이우집과 최일안은 전주에서 처형당했습니다. 그리고 이종집과 남조이는 황해도의 문화와 운율로 각각 귀양 갔고, 강완숙 골룸바의 딸 홍순희 루치아가 영광으로 귀양 왔습니다. 병인박해 중인 1867년 영광 뜸밭 출신으로 공주 국실에 살던 김치명이 공주에서 교수형으로, 1872년 한때 영광 신어실에 살았던 유문보 바오로가 나주에서 옥사로 순교했습니다. 여러 기록으로 보아 당시 영광 지역의 교세는 전라도에서 세 번째로 컸다고 보입니다.

1937년 영광에 본당이 처음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나 해방과 전쟁의 와중에 한때 영광 본당은 폐쇄되어 산정동 본당과 함평 본당의 공소가 되었습니다. 60년대 들어 신자가 늘자 1965년, 전쟁 당시 전소된 성당 자리에 새 성당을 재건하고 12월에 공소에서 본당으로 재승격되었습니다. 영광 순교자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광주대교구는 2010년 9월 영광 성당을 ‘영광순교자기념성당’으로 지정했습니다. 2014년 6월 영광순교자기념성당을 봉헌하고, 본당 설립 80주년을 기념해 성당 1층에 ‘영광순교자기념관’을 마련했습니다. 이 기념관은 특별히 영광의 여섯 순교자와 세 유배자 그리고 초기교회 신자 둘을 기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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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  교중미사
평일미사 19:30  
09:30  순례자와 후원자 미사
06:00  동절기 6:30
19:30  
16:00  어린이미사(주일미사)
19:30  학생미사(주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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