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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 가회동 성당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1795년 부활 대축일에 한국교회 최초로 미사를 봉헌한 곳
지번주소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 30-3 
도로주소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57
전화번호 (02)763-1570
팩스번호 (02)762-7758
홈페이지 http://www.gahoe.or.kr/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1752-1801년)

 

1752년 중국 강남의 소주부 곤산현에서 태어난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다가 스스로 천주교 신앙을 진리라고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후 북경교구 신학교에 입학하여 제1회 졸업생으로 사제품을 받았다. 


당시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그는 신앙심이 깊은 데다가 조선 사람과 닮은 주 야고보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고, 성무 집행에 필요한 모든 권한을 부여하였다. 


주 야고보 신부는 1794년 2월에 북경을 떠나 약속된 장소로 가서 조선 교회의 밀사인 지황 사바와 박 요한을 만났다. 그러나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려야만 했기 때문에 요동 일대에서 사목을 하다가 약속된 날짜에 다시 국경 마을로 가서 조선의 밀사들을 만났다. 그런 다음 조선 사람으로 변장하고 그해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밤에 조선에 입국하였다. 


한양에 도착한 주 야고보 신부는 계동(현, 서울 종로구 계동 지역)에 있는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 머물면서 한글을 배웠으며, 1795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는 신자들과 함께 처음으로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그의 입국 사실이 탄로 나자, 그는 부랴부랴 여회장 강완숙 골롬바의 집으로 피신해야만 하였다. 반면에 주 야고보 신부의 입국을 도운 밀사 윤유일 바오로와 지황 사바, 그리고 집주인 최인길 마티아 등은 그날로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다가 모두 순교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주 야고보 신부는 아주 비밀리에, 그러나 열심히 성무를 집행하였다. 이곳저곳으로 다니면서 성사를 베풀었으며, 신자들의 교리 공부와 전교 활동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하였고, 교리서도 집필하였다. 이처럼 그가 활동한 지 6년이 지나면서 조선 교회의 신자수는 모두 1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가 모든 것을 앗아 가고 말았다. 


박해가 일어나자 연이어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주 야고보 신부의 행방을 자백하도록 강요를 받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이때 주 야고보 신부는 자기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귀국을 결심하였다가, ‘나의 양 떼와 운명을 같이하여 순교함으로써, 모든 불행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수를 결심하였다. 


1801년 4월 24일(음력 3월 12일), 주 야고보 신부는 스스로 박해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내 재판이 열리고 문초가 시작되었으나, 그는 형벌 가운데서도 침착한 자세를 잃지 않고, 모든 질문에 신중하고 지혜롭게 대답하였다. 


“제가 월경죄(越境罪, 몰래 국경을 넘나드는 죄)를 두려워하지 않고 지황을 따라 조선에 온 것은, 오로지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 예수님의 학문은 사악한 것이 아닙니다. …… 남에게나 나라에 해를 끼치는 일은 십계에서 엄금하는 바이므로, 절대로 교회 일을 밀고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박해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말을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주 야고보 신부에게 군문효수형(軍門梟首形, 죄인의 목을 베어 군문에 매어 달던 형벌)을 선고하였고, 이에 따라 신부는 형장으로 정해진 한강 근처의 새남터로 끌려갔다. 그곳에 도착한 뒤, 주 야고보 신부는 자신의 사형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고 나서 조용히 머리를 숙여 칼날을 받으니, 그때가 1801년 5월 31일(음력 4월 1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순교할 당시 다음과 같은 기이한 현상이 있었다고 전한다. 


“하늘이 본디 청명하였는데, 홀연히 어두운 구름이 가득 차고 갑자기 광풍이 일어, 돌이 날리고 소나기가 쏟아져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형 집행이 끝나자 바람과 비가 곧바로 그치고, 하늘의 해가 다시 빛났으며, 영롱한 무지개와 상서로운 구름이 멀리 하늘 끝에서 떠서 서북쪽으로 흩어져 버렸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주문모 야고보 신부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강완숙 골룸바(1761-1801년)


강완숙(姜完淑) 골룸바는 1761년 충청도 내포 지방에서 양반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지혜로움이 뛰어나고 정직하여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1801년에 순교한 홍필주 필립보는 그녀의 아들이다. 


장성한 뒤 덕산 지방에 살고 있던 홍지영의 후처로 들어간 강 골룸바는, 혼인한 지 얼마 안 되어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런 다음 이에 관한 책을 얻어 읽는 가운데 그 신앙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 그녀는 “천주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고, 그 종교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올바르니, 그 도리가 반드시 참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후 강 골룸바는 신앙에 대한 열정과 극기를 바탕으로 교리를 실천해 나갔으며, 이러한 그녀의 행동은 누구나 감탄할 정도가 되었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신자들을 보살펴 주다가 자신이 도리어 옥에 갇힌 적도 있었다. 또 그녀는 시어머니와 전처의 아들인 홍 필립보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온갖 노력을 다하였음에도 남편만은 입교시킬 수가 없었고, 오히려 신앙 때문에 남편에게 시달림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후 남편은 첩을 얻어 따로 생활하였다. 


어느 날, 강 골룸바는 한양의 신자들이 교리에 밝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에 그녀는 시어머니와 아들 홍 필립보와 의논한 뒤 함께 상경하였고, 이후로는 신자들과 오가면서 생활하였다. 또 성직자 영입 운동이 시작되자, 이를 위해 노력하는 교우들에게 경제적인 뒷받침이 되어 주었다. 


1794년 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그녀는 주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그를 도와 활동하였다. 이때 주 신부는 강 골룸바의 인품을 알아 여회장으로 임명하여 신자들을 돌보도록 하였다. 


1795년 을묘박해가 일어나자, 강 골룸바는 자신의 집을 주 야고보 신부의 피신처로 내놓았다. 여성이 주인으로 있는 양반 집은 관헌이 들어가 수색할 수 없다는 조선 사회의 풍습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이후 그녀는 주 야고보 신부의 안전을 위해 자주 이사를 하였으며, 그때마다 그 집은 신자들의 집회 장소로 이용되었다. 윤점혜 아가타가 동정녀 공동체를 이끌어 나간 곳도 강 골룸바의 집이었다. 


강 골룸바는 지식과 재치를 겸비하였으므로, 여러 사람들을 권유하여 입교시킬 수 있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지체 높은 양반 부녀자들도 있었고, 과부, 머슴, 하녀도 있었다. 왕실 친척인 송 마리아와 며느리 신 마리아가 주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게 된 것도 강 골룸바 덕택이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한결같이 “골룸바는 슬기롭게 모든 일을 권고하였으며, 열심인 남자 교우들도 기꺼이 그의 교화를 받았다. 그것은 마치 망치로 종을 치면 소리가 따르는 것과 같았다.”고 말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강 골룸바는 그동안의 활동들 때문에 곧바로 관청에 고발되었고, 4월 6일(음력 2월 24일) 집 안에 함께 있던 사람들과 같이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그 와중에서도 그녀는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잊지 않았다. 


박해자들은, 강 골룸바에게서 주 야고보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여섯 차례나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굳은 신앙심은 형리들조차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라고 감탄할 정도였다. 3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강 골룸바는 신심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함께 갇혀 있는 동료들을 권면하면서 순교의 길로 나아갔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40세였다. 


형조에서는 사형 선고를 내리면서 이렇게 죄목을 붙였다. “강완숙은 천주교에 깊이 빠져 이를 널리 전파하였고, 6년 동안 주문모를 숨겨 주면서 남녀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불러들여 천주교에 물들게 하였다.” 이에 대해 강완숙 골룸바는 다음과 같이 최후 진술을 하였다. 


“이미 천주교를 배웠고 스스로 ‘죽으면 즐거운 세상(곧 천당)으로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형벌을 받아 죽을지라도,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고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강완숙 골룸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윤유일 바오로(1760-1795년)와 지황 사바(1767-1795년)와 최인길 마티아(1765-1795년)


‘인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윤유일(尹有一) 바오로는 1760년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이웃에 있는 양근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에 순교한 윤유오 야고보는 그의 동생이고, 윤점혜 아가타와 윤운혜 루치아는 그의 사촌 동생들이다.


양근으로 이주한 뒤 권철신 암브로시오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던 윤 바오로는, 서적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차츰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 다음 스승의 동생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이후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열중하였다.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은 1789년에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에게 밀사를 보내 그동안의 상황을 보고하고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이때 밀사로 선발된 이가 바로 윤 바오로였는데, 그 이유는 그의 성격이 온순한 데다가 심지가 굳고 학식이 높았으며 교리에도 밝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윤 바오로는 북경을 오가는 상인으로 가장하고, 주교에게 보내는 신자들의 서한을 옷 안에 숨긴 뒤, 1789년 10월 조선을 떠나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초에는 북당에 있는 라자로회 선교사들과 남당에 있는 구베아 주교를 만날 수 있었다. 또 윤 바오로는 북경에 머무는 동안 라자로회의 로오(N. J. Raux, 羅) 신부에게 조건부 세례를 받고, 구베아 주교에게 견진성사를 받았다. 아울러 구베아 주교에게서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하는 데 필요한 준비’에 대해 들었다.


윤 바오로가 1790년 봄에 귀국하자, 지도층 신자들은 성직자를 영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일 때문에 윤 바오로는 그해에 다시 한 번 북경을 다녀와야만 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다음 해, 조선 신자들과 한 약속에 따라 후안 도스 레메디오스(Juan dos Remedios)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그 신부는 조선 밀사들과 만나지 못함으로써 조선에 입국할 수 없었다. 이렇게 1791년에 있었던 첫 번째의 영입 시도는 실패로 끝났으며, 바로 그해 말에 일어난 박해로 이러한 노력은 한동안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윤 바오로는 실망하지 않고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아 등과 함께 성직자를 영입하고자 꾸준히 노력하였으며, 1794년 말에 마침내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뒤, 윤 바오로는 북경 교회와 연락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지홍’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지황(池璜) 사바는 1767년에 한양의 궁중 악사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원하여 교리를 배웠다. 본래 성격이 순직하고 부지런하였던 그는, 천주교에 입교하자마자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만 열중하였고, 하느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위험이나 궁핍, 고통을 당할 때에도 결코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성직자 영입 운동이 재개된 1793년에, 이미 북경을 다녀온 적이 있는 윤 바오로와 지 사바와 박 요한이 밀사로 선발되어, 함께 조선의 국경으로 가게 되었다. 지 사바와 박 요한은 조선의 사신 행렬에 끼어 북경으로 향하였고 윤 바오로는 그곳에 남았다.


북경에 도착한 지 사바는 얼마 안 있어 구베아 주교를 만날 수 있었는데, 이때 지 사바의 신심에 감명을 받은 구베아 주교는 뒷날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우리는 1793년에 지황의 신앙심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40일간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눈물을 흘리면서 견진과 고해와 성체성사를 아주 열심히 받았습니다. 그래서 북경의 교우들은 그의 신심에 감화를 받았습니다.”


1794년 초, 구베아 주교는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이에 지 사바는 주 신부와 만나 약속 장소를 정한 뒤, 각각 다른 길을 통해 국경으로 가서 상봉하였다. 그러나 감시가 심한 데다가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려야 하였으므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져야만 하였다.


지 사바는 이후 조선으로 귀국하였다가 다시 국경으로 가서 주 야고보 신부를 만났으며,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밤에, 그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런 다음 윤 바오로와 함께 주 신부를 안내하여 12일 만에 한양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1765년에 태어난 최인길(崔仁吉) 마티아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이벽 세례자 요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최인철 이냐시오는 그의 동생이다. 최 마티아는 이승훈 베드로가 신앙을 전파하고자 선발한 최초의 회장들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최 마티아는 입교 초기부터 동료들과 함께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 앞장섰으며, 윤 바오로가 1790년에 북경 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에는 성직자 영입 운동에 참여하였다.


한양 계동(현, 서울시 종로구 계동)에서 1795년 초에 주 야고보 신부를 맞이한 최 마티아는, 주 신부의 안전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밀고자에 의해 그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고 말았다. 다행히 교우들의 재빠른 처신으로 주 야고보 신부는 최 마티아의 집에서 빠져나와 여회장인 강완숙 골룸바의 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그에 앞서 최 마티아는, 주 야고보 신부에게 피신할 시간을 벌어주고자 자신이 신부로 위장하고 집에서 포졸들을 기다렸다. 그가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중국어를 알았으므로 이런 계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위장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체포된 지 얼마 안 있어 최 마티아의 신분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에 놀란 포졸들은 다시 주 신부의 행방을 쫓으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처럼 최 마티아는 주 신부를 안전하게 피신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곧 주 신부의 입국 경위가 밝혀지고, 그의 입국을 도운 밀사인 윤 바오로와 지 사바도 체포되고 말았다.


윤 바오로와 최 마티아와 지 사바는 체포된 날부터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이때 그들의 신앙심에서 우러나오는 굳은 인내와 결심, 그리고 지혜로운 답변은 박해자들을 당황케 하였다. 그들은 주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수없이 형벌을 가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에는 천상의 기쁨이 넘쳐 얼굴에까지 번졌다. 이제 박해자들은 더 이상 그들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때려죽이기로 결심하였다. 그 결과 윤 바오로와 지 사바와 최 마티아는 그날로 사정없이 매를 맞고 숨을 거두게 되었으니,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이었다. 당시 윤 바오로의 나이는 35세, 지 사바의 나이는 28세, 최 마티아의 나이는 30세였다. 박해자들은 비밀리에 그들의 시신을 강물에 던져 버렸다.


이후 구베아 주교는 조선의 밀사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듣고는, 윤 바오로와 그의 동료들이 순교 당시에 보여 준 용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공경하느냐?’는 질문에 용감히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모독하라고 하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참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최인길 마티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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