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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첸시오 페레르(4.5)

빈첸시오 페레르(4.5)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인쇄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빈첸시오 페레르 (Vincent Ferrer)
축일 4월 5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설교가
활동지역
활동연도 1350-1419년
같은이름 뱅상, 빈센트, 빈첸시우스, 빈첸티오, 빈첸티우스, 빈켄티오, 빈켄티우스, 원선시오, 페레리오, 페레리우스
성인 기본정보

   성 빈켄티우스 페레르(Vincentius Ferrer, 또는 빈첸시오 페레르)는 1350년 1월 23일 에스파냐 발렌시아(Valencia)에서 영국인으로 에스파냐에 정착한 아버지 윌리엄 페레르(William Ferrer)와 발렌시아 출신의 어머니 콘스탄스 미구엘(Constance Miguel)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탄생과 관련한 전설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꿈에서 도미니코회 수도자에게 자기 아들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리라는 말을 들었고, 그의 어머니는 산고를 경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부모는 그에게 발렌시아에서 순교하여 에스파냐의 첫 순교자로서 그 지방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는 사라고사(Zaragoza)의 성 빈첸시오 순교자(1월 22일)의 이름을 따서 아기의 이름을 지었다. 어려서부터 신앙 안에서 성장하며 교회에 자신을 봉헌할 결심을 한 성 빈첸시오 페레르는 1367년에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향에 있는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이듬해 첫 서원을 하고 타라고나(Tarragona)에서 2년간 수학한 후 레리다(Lerida)에서 논리학을 가르쳤다. 1373년부터는 바르셀로나(Barcelona)에 있는 도미니코회의 성서 연구소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379년에 툴루즈(Toulouse)에서 공부를 마친 후 바르셀로나에서 루나의 베드로(Petrus de Luna) 추기경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 바로 고향 발렌시아 수도원의 부원장으로 선임된 그는 임기를 마치고 1384년부터 발렌시아 주교좌성당 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쳤고, 1389년에는 신학 교수가 되었다.

   흑사병으로 인한 혼란이 채 가시기도 전인 1378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Gregorius XI)가 선종한 후 대립교황이 출현하면서 서구 교회를 크게 분열시킨 ‘서구대이교’(西歐大離敎) 사건은 성 빈첸시오 페레르에게 큰 시련이었다. 그는 로마의 교황 우르바노 6세(Urbanus VI)의 선출이 무효라 확신했고, 아비뇽(Avignon)에 머무는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VII)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그는 1390~1394년에 루나의 베드로 추기경을 보좌하면서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충성하도록 사람들을 설득했고, 에스파냐 전역을 순회하며 설교와 성사 집전에 헌신하였다. 그는 자신이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았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자뿐만 아니라 유대교와 이슬람교 신자들, 이단인 카타리파(Cathari)와 발도파(Valdesii)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그는 뛰어난 설교와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 덕분에 유대인과 무슬림 사이에서도 좋은 평판을 들었다.

   1394년에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가 선종하고 루나의 베드로 추기경이 베네딕토 13세(Benedictus XIII)라는 이름으로 대립교황이 되면서 그는 새 교황의 고해신부로 임명되어 아비뇽으로 갔다. 성 빈첸시오 페레르는 로마와 아비뇽의 교황이 모두 교황직을 사임하고 후계자를 선출함으로써 교회의 분열과 분리를 끝내기를 희망했으나 베네딕토 13세가 이를 거절하자 그에 대해 지지를 철회하고 1399년 11월 아비뇽을 떠났다. 그 후 20여 년 동안 에스파냐뿐만 아니라 남부 프랑스와 롬바르디아(Lombardia), 스위스와 북부 프랑스, 네덜란드 등을 순회하며 활발한 설교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설교 중에 참회의 필요성과 요한 묵시록 14장 6-13절에 나오는 심판의 천사가 다가왔음을 힘주어 강조했다. 많은 전기 작가들은 카탈로니아(Catalonia) 말만 할 줄 알았던 그가 여러 지방에서 설교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자 ‘말씀을 은혜’를 받았다고 믿었다. 또한 그가 가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나면서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란 별명도 얻었다. 그래서 그의 설교에 감동한 개종자의 무리가 마치 군대의 행진처럼 무리를 지어 나왔다고 한다. 1404년에 그는 자신의 설교에 감동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는 이들을 하나의 조직으로 구성하였다. 도미니코회의 복장을 하고 순례자의 지팡이를 지닌 그들은 ‘빈첸시오의 동료’(The Company of Master Vincent)라고 불렸다.

   성 빈첸시오 페레르는 활발한 순회 설교 중에도 교회의 분열을 걱정하며 교회 일치를 위해 베네딕토 13세의 사임을 설득했었다. 서구대이교의 극복을 위해 1414년에 콘스탄츠(Konstanz) 공의회가 개최되자 그는 다시금 교황의 사임을 설득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그는 1416년 베네딕토 13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함으로써 교회 분열을 극복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417년 콘스탄츠 공의회는 마르티노 5세(Martinus V)를 새 교황으로 선출함으로써 서구 교회의 분열은 정식으로 종결되었다. 성 빈첸시오 페레르는 선종하기 3년 전부터 프랑스의 노르망디(Normandie)와 브르타뉴(Bretagne) 지방에서 주로 순회 설교를 하며 지냈다. 그는 1419년 4월 5일 브르타뉴의 반(Vannes)에서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백년전쟁’(百年戰爭)을 끝내도록 설득하는 설교를 하던 중 선종하여 반 대성당에 묻혔다.

   성 빈첸시오 페레르가 선종한 후 신자들 사이에서 그에 대한 공경이 일어나 1455년 교황 갈리스토 3세(Callistus III)가 시성 절차를 거쳐 그를 성인으로 선언했고, 1458년 후임 교황인 비오 2세(Pius II)가 그의 시성 칙서에 서명했다. 회개와 참회를 중심 주제로 설교하여 제2의 세례자 요한이라 불리는 성 빈첸시오 페레르는 중세 시대에 가장 뛰어난 설교가 중 한 사람이었다. 요한 묵시록의 심판을 예고하는 천사에 대한 설교로 인해 그는 ‘심판의 천사’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래서 에스파냐의 많은 미술가는 그를 묵시록에 나오는 하늘을 나는 천사의 날개를 달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과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모두 4월 5일 목록에서 그에 대해 전하며, 여러 도시를 오가며 교회의 평화와 일치를 간절히 희망한 도미니코회 신부로 선종하는 순간까지 참회와 주님의 재림에 대해 선포했다고 기록하였다. 그는 라틴어로 성 빈켄티우스 페레리우스(Vincentius Ferrerius, 또는 빈첸시오 페레리오)로도 불린다.♣

참고자료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상) - '성 빈첸시오 페레르 사제',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456-458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6권 - '빈첸시오 페레리오',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1998년, 3833-3835쪽.
  •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성 빈첸시오 페레르 사제', 서울(성바오로), 2002년, 86-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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