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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5.31)

펠릭스(5.31)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인쇄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펠릭스 (Felix)
축일 5월 3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사
활동지역 니코시아(Nicosia)
활동연도 1715-1787년
같은이름 펠리체
성인 기본정보

   니코시아의 성 펠릭스는 1715년 11월 5일 시칠리아(Sicilia) 섬의 니코시아에서 아버지 필리포 아모로소(Filippo Amoroso)와 어머니 카르멜라 피로(Carmela Pirro)의 아들로 태어나 그날로 바로 필리푸스 야고보(Philippus Jacobus)라는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작은 구둣가게를 운영하던 제화공이었는데, 그가 태어나기 한 달 전쯤인 10월 12일에 아내와 세 자녀를 남겨두고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가족은 비록 가난했지만 매우 깊은 신앙심을 갖고 있었다.

   어린 소년 시절에 펠릭스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 수도원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조반니 카바렐리(Giovanni Cavarelli) 제화공의 작업장에서 구두 만드는 일을 했다. 그러면서 종종 수도원 공동체를 방문할 기회를 얻어 수도원에 대해 알게 되면서부터 그들의 삶의 방식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부분의 시칠리아 섬의 소년들처럼 그 역시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하지만 펠릭스는 더 많은 시간을 수도원에서 보내면서 수도자들의 생활, 즉 그들의 자발적인 엄격함과 자유로운 가난, 참회와 기도, 애덕과 선교 정신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20살 때 그는 니코시아 수도원의 원장에게 평수사로 입회할 수 있도록 메시나(Messina)의 관구장 신부에게 말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문맹이었던 그는 성직자가 될 수는 없었지만 평수사로서의 성소는 그의 겸손하고 단순한 천성에 비추어 더 적합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뜻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8년 동안 계속해서 입회를 요청했지만 매번 돌아온 것은 거절의 답변뿐이었다. 그래도 그는 실망하지 않고 자신의 성소를 더욱 굳건히 키워갔다. 이렇듯 그는 충분한 숙고의 기회를 통해 오랜 시간 동안 잘 준비한 성소자였다. 그토록 많은 거절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른 비슷한 수도회에 입회할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사람과 카푸친 작은 형제회는 하나이자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1743년 메시나의 관구장 신부가 니코시아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펠릭스는 그를 만나 오랫동안 간직해온 자신의 소망을 설명하고자 청했고, 마침내 관구장 신부로부터 입회 허락을 받고 미스트레타(Mistretta)에 있는 수도원에서 수련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1743년 10월 10일 수련기에 들어가면서 그는 펠릭스라는 수도명을 선택했다. 그에게 있어서 수련기는 많은 덕행들을 실천하며 지낸 특별한 해였다. 그의 전기를 쓴 모든 작가들은 펠릭스 수사야말로 순명과 순결, 금욕에 대한 사랑과 천사적 인내에 있어서 그 수도원에서 가장 두드러진 존재였다고 말했다. 이런 덕행들을 간직한 채 그는 1년간의 수련기를 마치고 1744년 10월 10일 첫 서원을 발했다.

   첫 서원 후 미스트레타의 수도원장은 평소 관례와는 달리 펠릭스 수사를 고향인 니코시아의 수도원으로 보냈다. 사실 젊은 수도자가 고향 마을로 파견되는 것은 친척과 지인들로부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예는 아니었다. 하지만 수도원장은 이 세상의 모든 애착으로부터 초연한 펠릭스 수사라면 그곳에서도 영적 성장을 이루는데 있어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펠릭스 수사는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의 금언대로 수도자는 이 세상에서 순례자요 이방인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미 몸으로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니코시아 수도원에서 구호금 모금의 소임을 받는 그는 매일같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탁발에 나섰다. 그는 부자들의 대문을 두드리며 그들의 부유함을 나누도록 초대했고, 가난한 이들의 초라한 대문을 두드리면서는 그들이 매일 필요로 하는 구호품을 제공하였다. 거리에서 이집 저집으로 옮겨 다니면서도 그는 늘 평온함과 신중함을 간직했다. 그는 어떤 것을 받든지 항상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으며, 심지어 그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에게조차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라고 응답하였다. 그는 글을 읽고 쓸 수가 없어 교리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도 없었지만 마음으로 배우고 삶으로 풀어가며 영혼을 풍요롭게 만들어갔다. 그는 수도원 식탁에서 들려주는 교훈적인 책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온몸으로 느끼고자 노력했고, 니코시아 성당에서 강론을 들을 기회 또한 놓치지 않았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 대한 깊은 신심을 갖고 있었는데, 매주 금요일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3월의 매 금요일에는 단단히 굳은 빵과 물만 먹으며 십자가 모양으로 두 팔을 치켜 올리고 무릎 꿇은 상태로 십자고상 앞에서 깊은 명상에 잠겼다. 그는 또한 성체성사에 대한 특별한 경외심을 갖고 있었기에 매일의 고된 일들을 마친 후에도 감실 앞에서 몇 시간씩을 보내곤 했다. 그는 하느님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깊은 신심을 갖고 있었다. 엄격한 참회와 금욕 생활의 결과로 육체적으로 병약해져 모든 의무에서 벗어난 펠릭스 수사는 수도원의 병실에 머물면서도 늘 다른 병든 수사들을 위해 어떠한 봉사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건강은 점점 더 나빠졌지만 하느님께 대한 그의 집중과 기쁨 그리고 단순한 순명의 정신은 더욱 더 강해졌다.

   1787년 5월 말경 정원에서 일하던 펠릭스 수사에게 갑작스런 고열이 찾아왔다. 마카리오(Macario) 원장 신부는 그에게 순명의 자세로 누워서 쉬라고 요구하였다. 자신의 마지막이 다가왔음을 깨달은 그는 약을 처방하는 의사에게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소용없다고 말하고, 5월 31일 새벽 2시에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의 유해는 1891년에 니코시아의 주교좌성당으로 옮겨 안치되었다.

   성 펠릭스 수사는 일생 동안 엄격한 고행과 탁발로써 큰 덕을 쌓았으며 이웃에게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표현하며 살았다. 또한 그에게는 육체는 물론 영적인 병을 앓는 사람까지 치유하는 놀라운 은사가 있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로부터 위로를 받고 회개하였다. 60세가 지난 후에도 그는 늘 하느님께 간구하며 병자들을 치료하고 노동을 계속하였다. 허가 없이 행한 일은 아무 것도 없을 정도로 일생을 순명하며 살았던 그는 1888년 2월 12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리고 2005년 10월 23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서는 그의 축일을 6월 2일에 기념하고 있다.

사진/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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