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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리노(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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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바울리노 (Paulinus)
축일 6월 2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저술가
활동지역 놀라(Nola)
활동연도 353-431년
같은이름 바울리누스, 빠울리노, 빠울리누스, 파울리노, 파울리누스
성인 기본정보

   성 파울리누스(또는 바울리노)는 353년 프랑스 보르도(Bordeaux)에서 그리스도교 신자인 로마의 부유한 상원 의원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래 이름은 메로피우스 폰티우스 파울리누스(Meropius Pontius Paulinus)로 보르도의 학교에서 그리스-라틴 문화를 접하고, 수사학과 시는 로마 황제 그라티아누스(Gratianus, 375~383년 재위)의 스승이었던 데키무스 마뉴스 아우소니우스(Decimus Magnus Ausonius)에게 배웠다. 그의 부친은 오늘날의 프랑스 지역인 갈리아(Gallia) 지방 총독으로 상당한 지위와 재산을 갖고 있었다. 훌륭한 교육을 받고 성장한 성 바울리노는 30세 때에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Campania) 지방의 집정관이 되었고, 그러면서 처음으로 그의 생애에 깊은 영향을 준 나폴리(Napoli) 교외 놀라의 수호성인인 성 펠릭스(Felix, 1월 14일)의 영성과 삶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는 잠시 보르도에 머물다가 에스파냐 동북부 지역인 카탈루냐(Cataluna)로 가서 그곳의 상류층 가문 출신인 테라시아(Therasia)를 만나 결혼하였다.

   결혼 후 보르도로 돌아온 성 바울리노는 아내와 함께 상속받은 막대한 영토를 관리하며 활발한 사회 활동을 펼쳤다. 그 지방 명사들과의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그곳에서 밀라노(Milano)의 파울리누스를 통해 성 암브로시오(Ambrosius, 12월 7일) 주교를 만나게 되었다. 그 만남을 통해 아직 비신자였던 그가 그리스도교에 마음을 두게 되었다. 그래서 성 바울리노는 아내와 함께 보르도의 주교인 성 델피노(Delphinus, 12월 24일)의 지도를 받아 세례성사를 받았다. 이때 그의 친구이자 나중에 부르주(Bourges)의 주교요 교회사학자가 된 성 술피치오 세베로(Sulpicius Severus, 1월 29일)도 함께 세례를 받았다. 그 후 그들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믿음을 키워나갔다. 세례를 받은 뒤 성 바울리노는 보르도를 떠나 390년부터 아내의 영지가 있는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 생활하며 아들 켈수스(Celsus)를 낳았다. 그런데 8일 만에 아들이 사망하자 그는 막대한 재산을 팔아 교회와 가난한 이들에게 희사한 후 철저히 금욕적인 생활을 시작했다.

   394/5년경 성탄절에 그는 주민들의 요청에 따라 바르셀로나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놀라 지방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막대한 재산을 팔아 놀라의 성 펠릭스의 무덤이 있는 치미틸레(Cimitile) 옆으로 이주하여 아내와 함께 투르(Tours)의 성 마르티노(Martinus, 11월 11일)의 모범을 본받은 작은 수도 공동체를 설립하였다. 그는 아내와의 부부관계를 포기하고 몇몇 회원들과 함께 성 펠릭스를 공경하는 일에 헌신하였다. 성 펠릭스의 무덤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을 맞아들이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며 교회의 직무를 수행하고 학문을 연구하며 수도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는 또한 성 펠릭스의 무덤 위에 대성당을 새로 지어 봉헌하고, 그 건물 벽에 성경의 내용을 벽화로 그려 넣도록 했다. 409년에 그는 놀라의 주교로 승품되어 22년 동안 주교직을 수행하였다. 그는 고트족의 침입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돌보고, 원죄와 유아세례를 부정하는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us) 이단으로부터 교회의 정통 교리를 지켜나갔다. 그는 431년 6월 22일 놀라에서 저녁 기도 중에 선종하여 성 펠릭스의 무덤 곁에 묻혔다.

   성 바울리노 주교는 자선으로 유명했을 뿐 아니라 당대의 저명한 그리스도인들과 폭넓은 교우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그와 가까웠던 인물 중에는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8월 28일), 성서학자인 성 예로니모(Hieronymus, 9월 30일),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 투르의 성 마르티노, 부르주의 성 술피치오 세베로 등 많은 명사가 있었는데, 서간을 통해 그들과 친분을 나누었다. 그는 51편의 서간과 31편의 시를 남겼다. 특히 그는 매년 성 펠릭스의 영광을 찬양하는 시를 지어 성 펠릭스에게 헌정한 성당에 모자이크 장식과 함께 이 시들을 적어두었다. 이 시들은 후대에 성 펠릭스의 전기를 작성하는데 기초 자료가 되었다. 그의 유해는 오토 3세 황제(Otto III, 980~1002년 재위)의 명으로 로마로 옮겨져 성 바르톨로메오 성당에 안치되었다가 1908년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 8월 21일)의 교서를 통해 이듬해 5월 14일 놀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그에 대한 공경 예식은 놀라에서 한 번도 끊긴 적이 없었고, 축일이면 백합꽃으로 장식한 성인상을 들고 온 마을을 돌며 행렬하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과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모두 6월 22일 목록에서 그의 성덕과 업적을 전해주었다. 개정 “로마 순교록”은 그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를 위해 가난과 겸손을 선택하고, 사제가 된 후 놀라로 이주해 아내와 동료와 함께 금욕적인 삶을 살며 순례자와 가난한 이들을 도운 학식과 성덕으로 유명한 주교였다고 기록하였다.♣

참고자료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상) - '놀라의 성 바울리노 주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339-341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5권 - '바울리노, 놀라의',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1997년, 3100-3102쪽.
  •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놀라의 성파울리노 주교', 서울(성바오로), 2002년, 146-148쪽.

사진/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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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울리노(6.2 ...] 놀라의 성 바울리노 주교 독서기도 주호식 2006/01/11 51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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