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음악자료실

제목 '청년 성가집'출판의 문제점 (1)
작성자김종헌 쪽지 캡슐 작성일1999-06-24 조회수3,213 추천수12

청년성가집이 출판된다는 보도를 접하고부터 걱정이 시작되었는데 과연 청년성가집은 꼭 출판되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가장 큰 걱정거리로 등장하였다.  가톨릭성가집, 어린이성가집, 청소년성가집이 이미 출판되었고, 올 해 말에 청년성가집이 출판되고 나면 이제 기다려야 할 것이라곤 노인 성가집뿐인가? 왜 전 세계를 통틀어  오직 한국 교회만이 이렇게 세대마다 완전히 다른 성가집을 가져야 하는 것인가?  왜 한국교회는 어떤 성가집을 만들 때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도록 곡을 공모하지 않고 몇 명이서 적당히 자신들의 작곡집 같이 만들어버리고 마는가?  청소년성가집도 또 이렇게 만들어질 것인가?  

 

이렇게 단순했던 걱정거리는 서울 본당 청년사목부가 전 교구와 본당에 배포한 시범판을 살펴본 이후로 더욱 커졌다. 이 성가집의 노래들은 과연 정식으로 음악을 공부한 사람들의 작품인가?  전례와 전례음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일까?  전례를 무슨 창작성가 발표회장으로 오인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과연 오늘 한국 교회의 모든 젊은이들은 이런 성가 풍의 한 가지 형태만을 좋아한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왜 가톨릭성가집과 청소년 성가집의 곡은 한 곡도 포함시키지 않았는가? 왜 한국교회는 이런 중요한 성가집을 극소수의 아마츄어들이 만들도록 방치하고 성가집 편찬위원회 같은 것을 만들어 그 책임을 다하지 않는가? 한국 교회는 가톨릭 교회음악에 관심을 가진 재능있는 젊은이들을 양성시킬 계획은 없는가? 여기에 수록된 성가들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전례와 전례음악에 대한 왜곡된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인가? 하는 것들이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청년성가집을 분석한 결과를 과연 본인의 짧은 문장력으로 논리적으로 서술하여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이 글의 발표를 주저하였다. 그러나 이제 용기를 내어 청년 성가집을 분석하고 느낀 점을 몇 차례에 걸쳐 이곳에 게재하고자 한다.  "전례란 교회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 (전례헌장 10항) 이며, 전례에는 음악이 어떤 부수적인 장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필수불가결한 것임 (전례헌장 112조)을 생각할 때, 이 청년 성가집의 출판은 서울 본당 청년 사목부의 작업으로 끝나서는 안 될 것 같고, 전국적으로 많은 의견과 토론을 거친 다음 교회의 권위있는 결정에 따라 일이 진척되어야 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본인은 이 글에서 음악적인 분석을 시도하려고 한다.  어느 누구나 자신의 것을 비판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우리들 모두는 자신에게 속한 것을 언제나 매우 사랑스럽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술인들의 경우, 자식과도 같은 자신의 작품에는 무한한 애정을 가지게 마련이고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객관적인 눈으로 자신의 작품을 평가하기가 상당히 어렵게 된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이 작곡가 혼자 만의 만족이나 감상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이런 성가집에서와 같이 미래의 한국 교회의 음악의 방향을 좌우할 수 있는 것이라면 마땅히 검증 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여기의 비판은 생면부지의 여러 작곡가들을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나은 한국교회 음악을 위한 고언 (苦言) 임을 분명히 해 두고 싶다.  아무튼 이 글이 비록 한 개인의 의견을 적은 것이지만 이 글에서 제기되는 문제점을 편집위원회는 간과하지 말기를 바라고, 더 나은 성가집 출판을 위해 참고해 주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이다.  

 

1) "좋은 성가는 신자들의 신앙심을 북돋우고 영양을 공급해 주지만 나쁜 성가는 신자들의 신앙심을 약화시키고 심지어는 파괴시킨다" (미국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문헌 Music in Worship, 7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헌장이 나온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세계 여러 나라 중 오직 미국 주교회의의 전례위원회에서만 두 개의 문헌 (Music in Catholic Worship, Liturgical Music Today) 을 발표하여 전례음악이 실지로 어떻게 전례에 적용되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주었다.  이 문헌에서 미국 주교회의는 전례에 사용하는 음악의 판단은 음악적, 전례적, 사목적인 것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음악적인 판단이라 함은 한 마디로 전례에 사용할 음악은 훌륭한 음악성을 갖춘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음악이 작곡 기법상으로, 미학적으로 그리고 표현상으로 훌륭한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만약 전례에 사용할 노래가 선율적으로 평범하고 지루한 것이면 이런 음악은 전례에 합당한 것이 될 수 없다. 또 TV 광고나 대중 가요에 알맞은 음악 역시 거룩한 전례행위에 사용할 수 없으며, 신자들로 하여금 세속적인 것을 초월하여 영원한 것으로 즉 이런 음악을 통하여서는 하느님과의 통교를 이룰 수 있도록 우리를 초대할 수 없다고 하면서 구체적으로 아래와 같은 질문을 제시하고 있다.

 

  즉 - 음악이 일관된 구조와 형태를 가지고 있는가?

     - 선율과 화성은 잘 어울리는가?

     - 화성은 완벽한 것인가?

     - 가사와 음악적인 리듬이 억지로 끼워 맞추어진 것이 아닌가?

     - 악구나 음정과 화성은 신자들이 노래부르기에 편한 것인가? 즉 2도 - 5도까지의

       연접 진행하는 음정인가?

     - 음악이 가사의 분위기를 잘 표현하고 있는가?

     - 매력있는 음악인가?  빈약한 리듬이나 평범한 선율을 가진 음악이 아닌가 ?

     - 음악이 단순히 청각적인 것을 넘어 전례의 한 상징이 되고 있는가?

     - 과장되거나 정도가 지나친 기악의 편곡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교회 음악가는 위에 제시되는 질문들을 전례에 사용할 모든 음악마다 하나 하나 대조하여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을 위 문헌은 강조하고 있다.

 

 

청년 성가집의 창작곡들을 분석하면서 본인이 가장 크게 느끼는 것은 이 성가집의 노래를 작곡한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정규적인 음악 작곡교육을 받지 않은 것 같다는 인상이다. 소위 아마츄어 작곡가들 같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음악 혹은 성가를 작곡한다는 것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유보된 영역은 절대 아니다.  아울러 정식으로 음악대학에서 작곡을 공부한 사람이라고 하여 반드시 좋은 곡을 만든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이런 정식 과정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좋은 곡을 만든다는 것은 정식으로 공부한 사람보다 더 더욱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그리 큰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정상적인 음악 전문교육을 받지 않은 천재적인 음악가들도 있지만, 많은 분들이 그런 재능을 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청년성가집의 성가들 (정말 성가라고 표현할 수 있는지는 차후에 다루고자 한다)을 음악적으로 분석한 결과를 통해 얻은 결론은 이 성가들의 대부분이 음악적으로 대단히 미숙하다는 것이다.

 

  본인이 이 글에서 화성법 강의를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국어에도 문법이 있듯이 음악 작곡에도 법칙 (화성법)이 있음을 소개하면서 청년 성가집과 관련된 몇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물론 예외가 없는 법칙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

 

 우선 선율에 대해 생각해 보자. 선율의 진행에 있어 가장 초보적인 것으로,  음계의 7번째 음인 B (영어 표기)는 leading tone이라 하여 거의 대부분의 경우 으뜸음 (C)으로 가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4번째 음인 F는 3번째 음인 Mi로 가려고 한다. 또 부속7화음의 경우, 그 7음은 반드시 미리 준비되어야 하고 (속7 화음은 제외) 이 준비된 음은 거의 절대적으로 다음 화음에서 한음 아래로 하행하여 해결하게 되어있다.  이런 음들의 진행 방향을 무시하고 아무 곳으로나 갈 수 없다는 법칙이다. 또 네 번째 음인 F음에서 7번째 음인 B로의 도약(증4도 진행)은 화성법에서는'마귀의 소리' (Devil sound)라 하여 인간이 이 음정을 노래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만약 이 도약의 음정을 작곡가가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혹시라도 사용하였다면 세 번째 음은 가장 가까운 음으로 역 진행시켜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음악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5도를 뛰어넘는 음정의 도약은 사람들이 쉽게 노래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도약을 했을 경우 역시 역으로 진행시켜주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고, 여러 음을 사용하여 멜로디가 같은 방향으로 진행하더라고  한 옥타브 이상을 넘어 계속해서 진행하는 것은 노래하기도 힘들고 음악적으로 아름답지 못한 것이기에 작곡기법에서는 금하고 있다.  

 

 화성의 경우를 살펴보자.  이 성가집에 4성부로 된 노래가 없다면 혹은 4성부로 된 노래를 단성부로 바꾼다면 여기에 지적되는 점은 자연히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성가집에는 창작 4성부의 노래가 있기에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4성부의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는 삼화음 중의 한음을 중복시켜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때의 가장 중요한 법칙으로 장조와 단조를 구별하는 세 번째 음은 주요 화음에서는 중복도 할 수 없으며 절대로 생략시킬 수도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도,미,솔의 미). 더구나 어떤 조에서건 속화음(혹은 딸림화음, V)의 3음, 즉 leading tone Si)의 중복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또 어느 성부에서건 두 개의 선율이 같은 방향으로 5도 혹은 한 옥타브로 움직이는 것을 금하고 있다.(병행 5도, 8도의 금지).  그 이유는 5도와 8도로써 음이 같은 방향으로 진행하면 사람의 귀에는 배음 관계에 의해 한 소리로 들리기 때문에 4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세 성부로 들리어 공허한 소리를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기본적인 것 한 가지를 더 언급한다면 삼화음의 제2전위는 경과적으로 혹은 곡의 마지막에서 종지적으로만 사용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청년 성가집'에는 아무 곳에서나 (정말 아무 곳에서나)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상 위에서 지적한 몇 가지 법칙들은 고전 음악 시대에서부터 유명 작곡가들의 곡을 분석하여 나온 결론으로서 화성법의 가장 기초에 속하는 것이며, 음악 대학 작곡과에서는 현대음악의 작곡이 아닌 이상 학생이 아무리 좋은 멜로디를 쓰고, 고도의 작곡 기법을 이용하여 곡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위의 법칙에서 실수가 있으면 거의 0점으로 처리된다.   이런 점에서 "청년성가"집에 나오는 거의 대부분의 한국어 창작노래는 이런 기본적이고도 최소한 지켜야 할 작곡기법을 거의 지키지 않고 있으며, 위에 지적한 것을 거슬리는 치명적인 실수가 곳곳에 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특별한 경우 작곡가는 음악적인 효과를 위해 위의 법칙들을 무시할 수는 있지만, 이 성가집의 대부분의 창작곡을 분석한 결과는 특별한 음악적인 효과를 위해 이 법칙들이 무시된 것이 아니라,  음악의 작곡기법에 대한 연구가 소홀한 것에서 나온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이외에도 무리한 리듬의 변화, 불협화음의 남용 (계류음, 선행음 등)이 귀에 거슬린다.  또 이 성가집의 편집이 전문인에 의해 수행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성악곡의 성가를 기악곡으로 사보한 것이라든지,  외국곡을 소개한 성가 42과 45는 곡이 중간에 끊어진 것으로, 전문가라면 소개할 수 없는 성가가 소개되는 것을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내일의 교회의 주인공이라는 젊은이들을 위한 성가가 전적으로 아마츄어에 의해 작곡되고 심사되어 성가집이 편집되어도 좋은 것인지...

 

이 성가집이 출판될 경우, 음악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가톨릭교회에는 음악공부를 한 사람이 그렇게나 없는가?' 하는 비난에 얼굴이 뜨거워질 것 같다. 옛날에는 음대에서 화성학을 배우기 위한 교재로 성가집이나 찬송가집을 추천하였었다.  과연 이 성가집의 화성을 모범으로 음대생들이 화성법을 공부할 수 있을까?  음악가 출신인 미국 밀워키 대교구의 교구장 Rembert Weakland 대주교의 말씀을 새겨들을 만하다. "교회의 전례는 아마츄어 음악가들의 작품을 실험하는 곳이 아니다."  청소년 성가집과 함께 청년 성가집의 출판이 왜 아마츄어 작곡가들의 등용을 위한 문이 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2) 청년성가집의 노래는 연주회를 위한 음악 ?

사람의 숨쉬기를 생각해 보자. 사람이 숨을 들이키기만 하고 내 쉬지 않는다면? 숨을 들이키지는 않고 내 쉬기만 할 수 있을까?  우리의 걸음걸이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걷기 위하여 발을 들었으면 내려놓을 때가 반드시 있는 법이다.  발을 들고만 있어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음악에서도 높은 음이 있으면 낮은 음이 있어 그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그리고 전 곡을 통해서 한 번, 많으면 두 번 정도의 클라이막스 부분을 가지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이 성가집의 대부분의 한국 창작곡들은 계속해서 높은 곳에서 소리를 지르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이는 다분히 성가제 같은 공연을 염두에 두고 작곡되었기 때문임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실지로 이 성가집의 많은 곡들은 창작성가제의 출품작들이기도 하다.  성가제에서는 참석한 가수들의 우열을 가리게 되어 있기에 청중의 반응을 무시한 곡은 이미 존재할 수가 없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청중들의 큰 박수를 받기 위해서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다분히 극적인 음악, 선동적인 음악으로 끝을 내는 것이다.   

 

 이 성가집의 39번을 제외한 모든 외국 곡들은 음악의 마지막이 하행으로 끝나 곡이 끝마치는 종지의 느낌을 편안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그러나 일반성가에 수록된 거의 대부분의 한국 창작곡들은 반드시 올라가는 음악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고 높은 음으로 끝나도록 함으로써 과장된, 그리고 극적인 효과를 노리며 만들어진 것을 쉽게 식별할 수 있다. 바로 이런 노래들은 청중들의 박수를 유도하는 곡들이며 감상을 위한 곡이며 경쟁을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라 할 수 있다.  (과연 그래도 이런 곡들이 미사 전례를 위해 만들어진 성가라고 말할 수 있는지 다음에 다루고자 한다.)  

 

또 한가지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온 세계가 우리 한국 민족의 위대한 음악성을 알아준다고 하지만 이 성가집의 창작곡들은 위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연주용이기에 가수들이나 목을 쥐어짜면서 겨우 노래할 수 있는 높은 음역을 사용한다.  그래서 보통 신자들은 음이 높아 노래를 따라 부를 수가 없는 곡들이 대부분이다. 신자들은 입을 다물고 앞에서 노래하는 가수 혼자서 노래하게 되어 있다.  신자들은 감상이나 하라는 것인가?  

 

모든 교회음악가들은 자신들이 전례에 봉사하는 목적이 신자들을 음악적으로 도와주는 것이지 연주를 위한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전례에서의 음악적인 기능은 공동체의 기도를 도와주는 것이며 즐기는 것에 있지 않음을 생각해야 한다. 만약 교회음악가들의 목적이 연주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 백성들이 바치는 노래로 하는 기도를 돕는 것이라면 이 성가집의 음악으로는 그 기능을 수행하기가 힘들 것 같다.  또 연주용의 이런 음악을 신자들이 전례 때에 기도하기 위해서는 이 성가집의 음악이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음악을 전공한 사람들도 이 성가집에 포함된 노래들을 (심한 음의 도약과 까다로운 리듬 그리고 가사 붙이기 등) 자유롭게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본인의 음대 교수 생활의 경험을 통해 볼 때,  정말 훌륭한 연주가라고 칭찬을 아끼고 싶지 않다. 이제까지 우리가 보고 들어온 복음성가 내지는 생활성가의 음악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어렵다는 판단이다. 곡을 만든 사람들은 자신이 애정을 가지고 만들었고, 그 곡을 자주 불러 보아 쉽게 느껴질런지 모르지만,  앞에서 선창하며 이끌어주는 사람이 없거나 음반을 통해 노래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노래부르기에는 거의 불가능하리라 생각된다.

 

 

3) 편협된 음악형식의 선택

전례헌장은 어떤 한 가지 형태만의 음악을 교회 음악의 전형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는 어떤 형태의 음악 안에서도 전례음악의 순수성을 간직하려는 노력 또한 계속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이런 노력을 통해 교회음악은 음악의 미학적인 것만을 추구하려 하지 않고, 전례와 관련된 음악으로서의 기능에 그 강조점을 주려고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청년 성가집에 선정되어 수록된 창작곡들은 거의 대부분이 현재 대중음악이 사용하고 있는 풍의 음악 형식들을 이용하고 있다. 빠른 템포, 순수 예술음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리듬의 변화, 불협화음의 잦은 남용, 변화화음의 사용, 반음계의 잦은 사용 등 여러 가지를 지적할 수 있겠다. 그러나 교회는 성음악에 대한 풍부한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공의회 이후 작곡된 현대적인 전례음악을 통해 그 전통을 더욱 확대시켰다. 이와 같이 교회는 옛 것을 보호하는 동시에 새로운 것을 이끌어낸다. (로마 미사경본의 총지침 15항과 마태 복음 13:52).  따라서 교회는 젊은이들을 전통적인 음악형식과 현대적인 음악형식의 다양성을 감상할 수 있도록 초대할 의무를 가진다.  그러나 이 성가집에는 전통적인 성가는 전혀 찾아보기 드물고 소개된 120여 곡의 노래는 거의 한 곡 없이 소위 말하는 신곡이다.  누가 가르치며 누가 배울 것인가?  

 

여기에 소개된 노래들을 보면서 이런 풍의 음악만이 오늘의 젊은이들이 진정 바라는 음악이라고 그 누가 단정지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무슨 이유로 이 성가집은 한 가지의 음악형식만을 수록하고 있는가? 이런 풍의 노래들만을 소개하는 이유는 단지 젊은이들이 좋아한다는 이유 때문인가?  옳은 이유가 아닌 것 같다. 마이클 잭슨과 엄정화의 음악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이 있는가 하면 파바로티와 조수미의 노래를 더 좋아하는 젊은이들도 많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키타치며 빠른 템포의 성가를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있는가 하면 조용히 가사를 음미하며 전통적인 성가 부르기를  좋아하는 젊은이들도 있다는 것을 무시하면 안 될 것이다. 젊은이들의 이런 다양한 정서를 무시하고 한 가지의 음악형식만을 성가집에 수록하는 것은 다른 음악정서를 가진 많은 젊은이들을 외면하는 것임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들 역시 자신들의 신앙의 표현으로써 전례 안에서 하느님께 찬미를 드릴 권리가 있는 젊은이들이다.   

 

더구나 오늘의 현대인들은 음반, 방송, 잦은 음악회 등을 통해 고전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더 나아가 한국의 음악 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수준 높은 음악을 감상할 기회가 너무나 많은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미사 때나 교회에서 사용하는 음악이 음악적으로 조잡한 것이라면 많은 신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 내기가 어렵다.  과연 음악적으로 미숙한 이런 곡들을 모든 젊은이들이 만족해하는 성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또 아직도 많은 본당에서는 '가톨릭 성가집'을 애용하고 있다. 성가집을 편집하는 측에서는 소위 말하는 청년문화에 맞는 음악이 없어서 마지못해 사용하고 있다고 할지 모르나 이 것 역시 하나의 단견이 아닐까?  많은 젊은이들 중에는 "성가는 성가다워야 한다"는 소박한 의견과 "웃긴다. 유행가 같이 중간에 랩도 들어간다." "이런 유행가 같은 노래말고 전통성가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새로운 곡을 소개한다고 하면서 이 성가집에는 (청소년 성가집도 마찬가지) 현재 전 세계적으로 전례음악의 모델이라고 생각되어지는 Taize 공동체의 노래가 한 곡도 실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전례음악가들을 의아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 한 곡도  수록하지 않은 것일까?  음악성이 없는 노래들이어서 그런가? 아니면 전례 정신에 맞지 않아서?  아무리 이해를 하려해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또 '청소년 성가집'에 수록된 노래 중 한 곡도 청년 성가집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어떻게 이해를 하여야 하는 것일까?. 같은 풍의 음악이라도 청소년과 청년들의 심한 세대 차이 때문일까? 그렇지만 두 성가집의 작곡가들은 거의 비슷한 젊은 연령층이 아닌가? 일반인들에게는 위의 두 개의 성가집이 거의 비슷한 곡을 많이 수록할 것이라고 상상하는데 비해 실지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한국교회는 더 많은 작곡가들이 필요하다고 여겨서인가?  서로 협력할 수는 없었는가?  그 이유는 뭘까?

 

4) 가사와 음악 형식

성가는가사를 가진 성악곡의 하나이다.  따라서 성악곡은 무엇보다 가사를 잘 표현할 수 있는 음악 양식을 취하여야 하는데 청년 성가집의 음악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가사를 묵상하게 하고 가사의 뜻으로 주님 앞에 영광을 돌린다거나 그 뜻 가운데서 내 삶이 변화된다는 것에는 별로 의식이 없는 듯이 느껴진다. 다만 그냥 음악의 분위기 (여러 가지 악기와 강한 리듬에 따른 감정의 격화)에 사람들이 휩쓸려가게 만든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노래부르는 사람들

자신들이 음악 자체와 그 음악이 주는 분위기를 즐기는 것이지 하느님을 찬양하려는 음악은 아닌 것 같다. 가사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음악만을 생각했기 때문에 쓸데없이 리듬의 변화를 주어 말 같지 않은 가사를 만들고 있다.

 

 서울 교구의 굿뉴스 홈 페이지의 굿사모 동호회 게시판 48번 기사의 제목은 아주 재미있는 한국말을 보여준다.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가입, 그러나"가 바로 그것이다.  아기다리와 고기다리?  이 말은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가입"이라는 말을 재치 있게 적은 것 같다. 많은 청년성가집의 가사들이 "아기다리 고기다리" 혹은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 같은 가사들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바로 대중가요에서 많이 사용하는 리듬을 사용함으로써 생기는 것들이다. 절뚝거리는 리듬과 가사는 어떤 현대 젊은이들에게 맞을는지는 모르지만 모든 젊은이들에게 다 맞는다고도 할 수 없으며, 기도하는 노래로는 어울리지 않는 음악 형식이다.  가사와 음악형식이 잘 융화된 노래는 가사도 쉽게 외울 수 있고 노래 부르기도 쉽다는 것을 기억하자.  

 

성악곡은 노래말과 음악의 형식이 잘 일치되어 있는지 그리고 음악형식이 가사의 분위기를 최대한 반영시키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사순절에 사용하는 '수난 기약'노래를 기타 치며 신 바람나게 빠르게 노래할 수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예수 부활하셨네"와 주님의 성탄을 경축하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느리게 청승맞게 노래할 수 있는가?  가사가 있고 그 다음에 음악이 있는 것이 성악곡이다. 가사의 내용과 분위기를 노래할 수 있도록 하지 않고 어떤 경우에라도 신이 나고 흥이 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음악적이라고 할 수 없다. 전례 안에서 부르는 성가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우리 자신들의 흥을 돋우고 신바람을 내기 위한 음악이 아니다.  이 성가집의 노래들이 사용하는 리듬이나 선율의 진행이 이런 가사와 음악의 부조화를 많이 느끼게 해 주고 있다.

 

5) 가사의 소재

이 성가집에 사용된 가사 자체의 문학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논하기로 하겠다.  기악곡이 아닌 이상 성악곡을 위한 가사의 선택은 그 곡의 형식을 결정짓게 하고 작곡되는 음악을 어떤 용도로 사용할 것인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한다. 전례에 사용할 성가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  성 아우구스틴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가 즉 '찬미가'란 그 대상이 하느님이어야 하며 가사의 내용은 하느님께 대한 찬미여야 한다고 정의하였다.  그러기에 전례헌장은 가장 좋은 가사의 소재로 성서와 전례기도문을 소개하고 있다 (전례헌장 121항).  이 성가집에서 볼 수 있는 가사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공동체의 믿음을 고백하는 내용이 아니라 개인이 느끼는 신앙적 체험이나 감정만을 읊은 가사들이 너무나 많다. 우리들의 삶을 조명하는 것이 성가의 가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행가 가사의 '그대'를 하느님으로 생각하라는 강변으로 느껴지는 것은 문학적인 소양이 없는 탓일까?  

 

초대 교회의 많은 신자들이 성가 가사를 이용하여 기도했다는 기록들을 우리는 볼 수 있다. 물론 대부분의 가사가 성서에서 가져온 것이기에 가사 그 자체를 기도로 이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지금도 우리는 성가 가사를 조용히 음미하며 기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과연 청년 성가집의 가사를 그대로 기도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시인지 궁금하다.  

 

 

 

 

 

필자: 대구 대교구 신부, 현 미국 가톨릭대학 음악 박사과정

여러분의 많은 의견을 기대합니다. 이 글은 계속될 것임으로 다른 인쇄물에 전재하는 것을 삼가 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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