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의 인물] 느헤미야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임금 ‘아르타크세르크세스’(Artaxerxes) 때의 인물이다. 그는 왕궁에서 임금의 술시중을 지휘했다(느헤 2,1). 얼핏 하찮은 직분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언제나 왕 가까이 있어야 했기에 신분이 확실했다. 왕은 또 ‘독살의 위협’ 속에 살았기에 술시중 드는 이야말로 자신의 심복으로 여겼다. 그리고 가끔씩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므로 고대 사회에서는 막강한 자리였다.
느헤미야도 시종의 신분을 이용해 ‘조국 이스라엘’의 어려운 처지를 알렸을 것이다. 아무튼 그는 총독이 되어 그 자리를 떠났다. 기원전 445년의 일이다.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는 바빌론 유배가 끝나고 거의 두 세대가 지난 뒤였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은 여전히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불안정 속에 있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강화에 힘쓴다. 그리하여 주민수를 늘리기 위한 정책으로 유다인의 10분의 1은 예루살렘에 살아야 한다는 조례를 만들고 실행에 옮겼다.
이후 그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힘쓴다. 특별히 이것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임금의 비밀지령이기도 했다. 당시 페르시아와 대응할 수 있는 국가는 이집트였다. 따라서 이집트가 대륙진출을 시도할 경우 반드시 이스라엘을 지나가야 했다. 페르시아는 이때를 대비해 예루살렘을 보급기지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느헤미야는 임금의 보장이 있었기에 공공연하게 이웃 부족들에게서 경비를 조달했다. 그리고는 인건비를 통해 가난한 유다인들에게 되돌려 주었다. 조금씩 경제적 활기가 살아났다. 무엇보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다는 긍지가 민족의 일체감을 부추겼다. 이렇게 되자 인근 부족의 방해가 시작되었다. 사마리아 총독 ‘산발랏’과 암몬의 총독 ‘토비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이스라엘을 비웃고 조소하였다(느헤 4,1-4).
그래도 느헤미야는 공사를 감행했다. 결국 산발랏과 토비야는 남쪽의 아라비아와 서쪽의 블레셋까지 끌어들여 예루살렘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느헤미야는 어쩔 수 없이 백성을 나누어 한쪽은 공사를 강행하고 다른 쪽은 적군의 침입을 막아야 했다(느헤 4,10). 그래도 산발랏은 포기하지 않았다. 느헤미아의 암살을 시도하다 실패했고 성안에 있는 첩자를 이용해 반란을 꾀한다고 페르시아에 고발하기도 했다. 숱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성벽증축은 52일 만에 완성되었다. 느헤미야는 이렇게 외친다. “주위의 모든 민족들이 성벽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눈으로 확인했다. 그들은 이 작업이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느헤 6,15-16).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역사 중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2010년 1월 17일 연중 제2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호계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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