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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성경 속의 인물: 마카베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2-10-05 조회수4,556 추천수1
[성경 속의 인물] 마카베오 (1)


기원전 2세기의 이스라엘은 그리스의 지배하에 있었다. ‘유다 마카베오’는 형제들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군인이다. 이들의 쿠데타는 기원전 164년에 성공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성경이 ‘마카베오기’ 상하권이다. 한편 이스라엘에서는 지금도 그때의 승리를 축제로 이어오고 있다. 매년 12월에 열리는 ‘하누카’ 축제다(요한 10,22).

마카베오 시대의 지중해 연안은 로마와 그리스가 대치하고 있었다. 로마가 우위에 있었지만 동방은 그리스 세력이 지배하고 있었다. 역사에서 말하는 ‘셀레우코스 왕조’다. 페르시아를 정복한 뒤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그의 왕국은 신하들이 다스렸는데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이 맡았고 오리엔트는 셀레우코스 장군이 차지했던 것이다.

마카베오의 반란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 때의 일이다. 성경에서 악명 높은 박해자로 등장하는 ‘에피파네스’다. 그는 터키와 페르시아, 그리고 팔레스티나에 그리스 도시를 건설하여 부강한 왕국을 만들려 했다. 당연히 그리스 문화를 강요했고 자국의 종교전통은 없애려했다. 이스라엘은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상숭배의 강요였기 때문이다.

안티오코스 4세는 대사제를 포섭했다. 당시 대사제는 예루살렘의 재정과 운영을 책임졌고 최고의회(산헤드린) 의장을 겸임했다. 대외적으로 민족을 대표했던 것이다. 그는 ‘계약 궤’를 모신 ‘지성소’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일 년에 한번 ‘속죄의 날’에 기도하러 들어갔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를 12지파의 구심점으로 받들게 했다. 원칙적으로 모세의 형인 ‘아론’의 혈통을 지녀야만 대사제가 될 수 있었다.

대사제 ‘오니아스 3세’는 에피파네스의 포섭을 완곡히 거절하며 정책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는 파면되었고 그의 동생 ‘야손’이 대사제로 임명되었다(2마카 4,8). 대사제가 된 이방인의 임명으로 경질된 것이다. 더구나 야손은 에피파네스에게 뇌물을 바치며 로비를 벌였기에 왕의 통치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이래저래 유다인들은 자존심이 상했다.

이후 에피파네스는 유다교 말살정책을 펼친다. 군인들을 동원해 예루살렘을 점령한 뒤에는 공포정치로 일관했다. 안식일 준수와 제사봉헌을 금지시켰고 할례도 받지 못하게 했다. 율법서(토라)는 불태웠고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했다. 어기면 사형이었다. 마침내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유다인들로 하여금 강제로 제사를 지내게 했다(기원전 167년 12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그들의 감정은 자극되었고 결국은 폭동으로 이어졌다. 주역은 마카베오의 아버지 ‘마타티아스’였다. 이렇게 해서 유대독립운동은 시작되었다. [2010년 3월 7일 사순 제3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호계본당 주임)]


[성경 속의 인물] 마카베오 (2)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자 그의 제국은 양분된다. ‘시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권과 ‘이집트’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권이다. 두 세력이 부딪히는 완충지대에 ‘팔레스티나’가 있었다. 이스라엘은 양쪽의 눈치를 봐야하는 운명이 되었다. 처음에는 이집트 세력이 이들을 80년간 지배했다(BC 320-200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다.

그들은 ‘헬레니즘’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리스 문화를 심는데 열정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종교적 자치권’을 부여하며 대국의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기원전 198년부터는 ‘셀레우코스 왕조’가 지배한다. 시리아를 통치하던 세력이다. 전쟁을 일으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몰아낸 것이다. 이들의 지배는 60년이었다. 하지만 경제적 착취가 극심했고 강제로 그리스 문화를 심으려했다. 가장 극렬했던 사람이 ‘에피파네스’라 불린 ‘안티오코스 4세’다.

그러자 많은 유다인들이 이스라엘을 떠나 이집트로 건너갔다.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수도 ‘알렉산드리아’에는 집단 거주지가 생겨났다. 이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뭉쳐 살았는데 ‘디아스포라 유다인’이라 부른다. ‘해외거주 유다인’이라는 의미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들이 만주로 옮겨간 것과 같은 이치다.

시리아의 세력은 기원전 140년경 이스라엘에서 물러난다. ‘마카베오 가문’에 의해 축출당한 것이다. 마카베오의 항전은 아버지 ‘마타티아스’가 먼저 시작했다. 사건은 예루살렘 인근은 작은 도시 ‘모데인’에서 일어났다(1마카 2,15-28). 임금 ‘에피파네스’의 명령으로 이곳에도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경배를 시작했다. 어느 날 임금의 관리가 확인을 위해 왔는데 마타티아스는 그를 죽이고 신상을 파괴해버린 것이다.

많은 유다인들이 마타티아스 주위에 모여들었고 그들은 게릴라전을 펼치며 저항했다. 항전 소식은 전국으로 퍼졌고 ‘하시딤 세력’이 가세하자 거국적인 조직이 되었다. 하시딤은 율법준수에 철저했던 상류층 신앙집단이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파’는 하시딤에서 파생된 하나의 분파라고 할 수 있다.

마타티아스가 죽자(BC 166년경) 셋째 아들 ‘마카베오’가 뒤를 이었다. 그는 산발적인 저항이 아니라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에피파네스는 수차례 토벌대를 보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나중에는 방어에 급급해야 했다. 그의 주력부대는 시리아 동쪽의 ‘파르티아’ 제국과 전투 중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마카베오는 예루살렘을 탈환했고 성전에 세워진 제우스의 신상을 제거했다. 그리고 새로운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바쳤다. 유다인들은 축제를 지내며 환영했다. 기원전 164년 12월의 일이다(1마카 4,36-60).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임시 자치권’을 획득했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2010년 3월 14일 사순 제4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호계본당 주임)]


[성경 속의 인물] 마카베오 (3)


마카베오는 아람어 마카바(makkaba)에서 왔으며 ‘망치’를 뜻한다고 한다. 그의 일생을 함축하는 말이라 하겠다. 시리아의 세력을 분쇄하러 투쟁 일변도로 살았기 때문이다. 그의 항전은 ‘모데인’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아버지 ‘마타티아스’에 의해 시작되었다(1마카 2,28). 자칫 우발적인 사건으로 끝날 뻔했는데 ‘하시딤’의 참여로 전국적인 봉기로 발전했다.

하시딤(Hasidim)은 하시드(Hasid)의 복수형 단어다. 하시드는 ‘경건한 자’로 번역된다. 이들은 율법과 조상들의 전통을 철저히 지켰고 어떤 이념에도 타협하지 않았던 골수분자들이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면 한여름에도 까만 정장에 까만 모자를 쓴 구레나룻 사람들이 활보하고 있다. 현대판 ‘하시드’들이다. 아무튼 이들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 마카베오 항전에 협력했던 것이다.

마카베오는 기원전 160년경 전투 중에 죽는다(1마카 9,18). 그러자 동생 요나탄이 저항군의 리더가 되었다(1마카 9,31). 이 무렵 하시딤은 신앙의 자유를 되찾은 것에 만족하며 저항군을 떠나기 시작했다. 군사력은 서서히 약화되었고 결국 요나탄은 암살되고 만다(기원전 141년).

이후 ‘시몬’이 지휘권을 이어 받는다. 그는 마카베오와 요나탄의 형이었다. 그런데 시리아는 왕위를 둘러싼 내분에 휩싸이면서 유다인을 포섭하려는 위치가 되었다. 기회를 잡은 시몬은 이스라엘을 독립국으로 선포한다. 그리고 시리아의 잔존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감격한 백성들은 기원전 140년 9월, 시몬을 ‘대사제와 사령관’을 겸임토록 했으며 자녀들을 통한 세습을 인정했다. 이것이 ‘하스모니아’ 왕조(Hasmonean dynasty)의 출발이다.

하지만 ‘하시딤’은 반발한다. 통치권은 인정하지만 다윗 가문이 아닌데 대사제가 되는 것은 불가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들의 저항은 집요했다. 결국 시몬의 가족은 BC 134년, 자신의 사위였던 ‘포톨레마이오스’에게 피살되고 아들 하나만 살아남는다. 이렇게 해서 마카베오 형제들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이스라엘의 통치권은 시몬의 셋째 아들에게 돌아갔다. 그가 ‘히르카누스 1세’다. 그는 BC 104년 죽을 때까지 영토 확장에 힘썼다. 사마리아를 병합했고 ‘이두매아’ 주민들을 강제로 유다교로 개종시켰다. 그들은 사해 ‘남동쪽’에 살고 있던 ‘에돔족’이다. 예수님 시대에 이두매아 출신의 ‘헤로데’가 유다인의 왕으로 있은 것은 이런 역사 때문이다. 이두매아인은 서기 70년 ‘유다 독립전쟁’으로 예루살렘이 멸망하자 고향에서 쫓겨난다. 이후 그들은 유다인에 흡수되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 [2010년 3월 21일 사순 제5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호계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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