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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역사서 해설과 묵상: 사무엘의 하느님 체험(사무엘기 상권 3장)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8-14 조회수3,983 추천수1

역사서 해설과 묵상 (57)


사무엘의 하느님 체험(1사무 3장) ①

 

 

사무엘기 상권 3장은 ‘하느님 체험이 전혀 없는 젊은이가 하느님을 체험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내용이다.

 

이야기의 첫머리는 알아듣기 쉽다. 사무엘기 상권 3장 1절에서 우리는 이야기의 중심인물이 될 두 사람 곧 사무엘과 엘리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내용을 본다. 여기서 사무엘은 ‘소년’이라고 한다. 히브리어 ‘소년’이라는 단어는 ‘열 살에서 서른 살 사이의 남자’를 뜻한다(예레 1,6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사무엘이 아주 나이 어린 꼬마가 아니라 어느 정도 성숙한 성인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사무엘기 상권 3장 전체에서 우리는 엘리를 ‘사제’라 언급한 대목을 한 번도 만날 수 없다. 이것은 무엇인가 큰 의미가 있는 것이므로 여기에 주의를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 사실에 주의를 집중하지 않는다면, 최소한 엘리가 사제라고 제시되지 않는 이유를 물어야 한다.

 

사무엘기 상권 3장을 다음과 같이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3절 : 이 부분은 이야기 전체와 관련해 서론적 기능을 한다. 엘리 곁에서 봉사하는 사무엘을 언급한 것은 3장을 앞부분(1사무 1-2장)과 연관시켜준다. 그 다음 그 당시의 일반적 상황을 말한다. “그때는 주님의 말씀이 드물게 내렸고 환시도 자주 있지 않았다.”(1사무 3,1). 당시의 영적 상황이 매우 메마르고 어두운 시기였음을 말한다.

 

이어서 엘리와 사무엘의 개인적 상황을 묘사한다(1사무 3,3). 두 사람 다 성소 곁에서 누워 자고 있었다. 때는 밤이었다. 시간적으로도 밤이고, 영적으로도 밤이었다. 그때는 주님께서 말씀도 자주 들려주지 않았고 계시를 보여주시는 일도 드물었기 때문이다. 3장 15절까지 이런 밤이 계속된다. 따라서 1-14절까지 벌어지는 모든 상황은 밤에 일어났던 것이다. 2장 22절에 따르면 엘리는 나이가 매우 많았다. 그리고 3장 2절에서는 ‘엘리의 눈이 어두워졌다’는 것이 강조되었다. “그는 이미 눈이 침침해지기 시작하여 잘 볼 수가 없었다.” 육체적인 시력이 떨어졌다는 것은 영적으로도 눈이 어두워졌음을 암시한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이 엘리에게 더는 내리지 않았고, 심판의 말씀은 엘리 가문의 죄악을 들추어냈다.

 

4-9절 : 주님은 사무엘을 세 번이나 부르셨다. 그럴 때마다 사무엘은 엘리의 목소리를 들은 것으로 생각하여 엘리에게 달려갔다.

 

10-15절 : 여기 사용된 동사들(찾아오셨다. 서셨다)을 볼 때, 10절은 앞의 이야기와 단절을 만드는 동시에 하느님의 새로운 부르심으로 이끈다. 하느님의 새로운 부르심은 사무엘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끝난다.

 

16-18절 : 사무엘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엘리와 사무엘 사이의 대화로 옮겨간다. 여기서 엘리는 사무엘에게 부탁하는 처지로 바뀐다. 이야기의 시초에는 사무엘이 엘리에게 물어보았으나 하느님이 개입하신 뒤 사무엘은 감히 엘리에게 말을 하지 못했다. 심판의 내용이 너무 엄청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엘리는 먼저 물어볼까 말까 갈등하다가 결국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알아보려고 사무엘에게 물어보았다. 이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처지역전임이 틀림없다. 그런 처지역전은 사무엘이 아침에 성전 문을 여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는데, 그 새 시대의 문을 사무엘이 여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바야흐로 때는 ‘아침’이다. 시간적으로도 ‘아침’이고, 영적으로도 ‘아침’이다.

 

19-21절 : 우리는 여기서 결론적인 표현들이 나열됨을 볼 수 있다. 이런 나열은 온 이스라엘과 관련해 사무엘에게 이루어진 일을 강조하는 것이다. 결론부분은 하느님께서 사무엘을 선택하신 행동이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어떤 여파를 끼쳤는지 강조한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전체를 위해 일했고, 이스라엘은 그를 하느님에게서 인정받은 분으로 인정해야 했다. 그래서 사무엘은 모세와 같은 큰 인물로 간주되었다.

 

묵상주제

 

주님께서 찾아와 서시어 아까처럼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사무엘은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1사무 3,10). [2013년 8월 4일 연중 제18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58)


사무엘의 하느님 체험(1사무 3장) ②

 

 

사무엘기 상권 3장을 읽은 독자들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이 이야기에서 사용된 어휘의 대부분이 시각적인 어휘가 아니라 ‘청각적인 어휘’라는 사실이다. 성경의 다른 곳에 나와 있는 하느님 발현과는 달리 사무엘에게 나타나신 하느님의 발현은 시각적으로 볼 때 아주 단순하다(1사무 3,10). 시각적인 요소는 아주 간결한 표현으로 절제되어 있다. 하느님의 발현은 확실하지만, 그 발현이 정확하게 묘사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느님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이런 확신을 드러내고, 그런 확신을 전제한다. 이런 확신은 하느님 체험을 말하는 이 이야기 전반에 계속 흐르는 사상이다.

 

이 이야기는 대화의 형태로 되어 있고, 그 대화의 형태는 등장배우들의 역할을 드러낸다.

 

- 하느님께서 먼저 사무엘에게 말씀하신다(4.6.10.11-14.19.21절).

- 사무엘이 엘리에게 말한다(5.6.8.16절).

- 엘리가 사무엘에게 말한다(5.6.8.16절).

- 사무엘이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에 대답한다(10절).

-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시지만 주님의 말씀이 자율적인 형태로 행동하신다(1.7.21절).

 

그러므로 이 이야기 전체는 ‘말씀’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말씀은 사무엘에게는 분별을 요구하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엘리와 그의 집안에게는 심판의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는 엘리의 인물됨을 지나치게 깎아 내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무엘이 밤에 찾아오는 그분이 누구인지 가려낼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은 엘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사무엘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마지막에 가서 인정한 사람 역시 엘리였다(1사무 3,18). 사무엘기 상권 3장 18절은 엘리가 하느님의 심판을 수긍하는 내용이긴 하지만, 엘리의 이 말은 사무엘에게 나타나신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확인하는 말이다. 만일 엘리가 없었더라면 사무엘과 그 시대 사람들은 하느님을 체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 체험에는 하느님의 주도권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중재의 중요성’도 있다. 이 사실은 이 이야기가 강조하는 것 가운데 하나다. 이런 점에서 엘리의 역할이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통해 하느님을 체험하지 않는가!

 

이 이야기는 하느님을 분별하고 그분의 말씀을 분별하는 것을 아주 훌륭하게 묘사한다. 왜냐하면 처음 세 번의 부르심은 문학적인 전개방법으로서, 거기에는 다양한 요소가 엘리의 말에 의해 나타난다. 이 전개방법은 예언자들의 소명설화와는 사뭇 다른 것으로서, 하느님께 주도권이 있지만 하느님은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지 않으시며, 또 사무엘 역시 그런 식으로 하느님과 통교하려 하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침묵’ 가운데서 말씀하신다. 곧 당신이 부르시는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서 말씀하신다. 이런 점에서 아무 것도 듣지 못한 엘리에게 세 번이나 뛰어가는 사무엘의 반응은 주목할 만하다. 만일 사무엘이 외적인 어떤 소리를 들었다면 그 소리가 엘리의 목소리인지 아닌지 왜 구별하지 못했겠는가? 그러나 사무엘은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자기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고 그 목소리의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엘리가 자기를 부르는 것으로 착각하고 엘리에게 세 번이나 뛰어갔던 것이다.

 

묵상주제

 

하느님께서는 내면 깊은 곳에서 말씀하신다. 이것이 사무엘의 새로운 하느님 체험이다. 이런 체험은 신앙생활의 일반적인 체험과 혼동되어서는 안 되고, 더구나 기도나 전례 등을 통한 외적인 하느님 체험과 동일시되어서도 안 된다. 사무엘은 외적인 전례나 일반적인 신앙생활을 통해 하느님을 이미 알았지만 깊은 내면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은 아직 체험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무엘의 체험은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새로운 체험이었다. [2013년 8월 11월 연중 제19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59)


사무엘의 하느님 체험(1사무 3장) ③

 

 

사무엘기 상권 3장을 역사비평적인 측면에서 읽어보자. 먼저 사무엘기 상권 3장의 이야기는 사무엘에 관한 직접적인 증언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이야기는 기원전 1050년경부터 1030년경에 활동한 ‘사무엘’이라는 실제 역사적 인물의 시대와 비교해 볼 때 상당한 거리를 가정하므로, 사무엘의 역사적 역할을 알아내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사무엘은 상당히 복잡한 인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를 판관으로 볼 수 있고(1사무 7,15-17), 예언자로 볼 수 있고(1사무 3,20), 또한 사무엘기 상권 1-3장에서 주님께 봉사했음을 강조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사제로 볼 수도 있다. 물론 사무엘의 시대에는 이런 서로 다른 기능들이 아직 제대로 구별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사무엘을 무엇보다도 먼저 ‘판관’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는 기원전 1030년경 왕정의 시초에 관한 증인이 된 판관이었다. 후대의 문헌들을 보면 판관시대와 사무엘이 증인이 된 왕정시대 초기에는 서로 왔다갔다하는 불분명함이 있다. 그래서 사무엘기 상권은 사무엘이 사울을 도유하고(1사무 10,1) 그 다음에 다윗을 도유(1사무 16,1-13)했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이런 중재자 역할은 다음 사실을 설명한다. 곧, 사무엘은 그의 행동을 통해 점차로 ‘하느님에게서 영감을 받은 사람’으로 간주되었고 이어서 ‘예언자’로 묘사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가 최초로 형성된 시기가 상대적으로 늦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이야기에서 사무엘이 예언자로 간주되지는 않지만, 이 이야기는 기원전 8세기 예언자들의 예언적인 체험을 가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무엘기 상권 3장의 시대를 기원전 8세기말로 잡을 수 있다.

 

사무엘기 상권 3장은 역사적인 사무엘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가 거의 없다. 그러나 이 텍스트는 왕정 이전 시대 백성의 일치를 지켜주었던 ‘사무엘’이라는 인물을 찬양하는 전통적인 자료들이 사무엘을 어떻게 말하지를 알 수 있는 좋은 증거가 된다.

 

사무엘기 상권 3장을 여러 가지 방면에서 살펴보았지만, 우리는 이제 신학적으로 이 텍스트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앞에서 사용된 학문적인 방법들이 신학적인 읽기와 상충하지 않는다.

 

먼저 이 텍스트는 어떤 사실의 확인으로 시작된다. 곧 ‘하느님의 침묵’이라는 상황이다. 왜냐하면 계시의 정상적인 방법이 사라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다음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계시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는 현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계시 수령자의 처지에서 본다면 계시는 말씀이 활동하는 시기와 침묵하는 시기를 통해 알려졌다. 하느님의 이러한 침묵은 인간의 죄악의 결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사무엘기 상권 3장도 그렇게 설명하지 않는다.

 

‘계시’라는 측면에서 이 이야기를 알아들으려면, 상징적인 읽기가 필요하다. 이야기의 시초에 언급된 영적인 부족함(1사무 3,1)은 사제 엘리에 의해 개선될 수 없었다. 엘리는 나이가 많았고 앞을 잘 볼 수 없었다. 육체적인 시력의 저하는 영적인 분별력의 부족으로 더욱 심화되었다. 그렇다고 ‘엘리가 영적인 분별력이 전혀 없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외적인 경신례는 물론 계속되었고 사무엘은 엘리 앞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사제 엘리에게 직접적으로 내리지 않았다.

 

묵상주제

 

“그때에는 주님의 말씀이 드물게 내렸고 환시도 자주 있지 않았다”(1사무 3,1). [2013년 8월 18일 연중 제20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역사서 해설과 묵상 (60)


사무엘의 하느님 체험(1사무 3장) ④

 

 

사무엘기 상권 3장 15절에서 하느님의 발현이 끝나고 사무엘이 아침에 성전 문을 여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역대기 하권 29장 3절과 비교해 보면 이것을 알 수 있다. “히즈키야는 임금이 되던 첫해 첫째 달, 주님의 집 문들을 열고 보수하였다.” 히즈키야의 행동은 자기의 아버지 아하즈가 한 행동과 정반대였다. “아하즈는 또 하느님의 집 기물들을 모았다. 그는 하느님의 집 기물들을 떼어내고 이 주님의 집 문들을 잠가버렸다”(2역대 28,24). 아하즈의 이런 행동은 ‘하느님과 관계를 단절함’을 뜻한다. 그러나 히즈키야는 성전 문들을 다시 열었다. 이것은 ‘하느님과 맺는 관계가 다시 트였음’을 뜻한다. 사무엘이 성전 문을 여는 것 역시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하느님과 가까운 사무엘이 하느님과 다시 관계를 트고, 이런 관계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와 직결되었다. 

 

이야기의 시작과 비교해 볼 때 이야기의 끝에는 두 가지 중요한 변화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사무엘이 처음에는 하느님을 섬겼고(1사무 3,1), 나중에는 주님께서 사무엘과 함께 계셨다(1사무 3,19)는 것이다. 또한 사무엘이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주님의 말씀이 드물게 내렸고 환시도 자주 없었지만(1사무 3,1) 나중에는 주님께서 실로에서 거듭 나타나셨고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당신을 드러내셨다(1사무 3,21). 이런 상황 역전은 엘리와 사무엘의 처지 역전으로 더 강조되었다. 3장 16절부터는 비록 사제 엘리가 사무엘에게 스승으로서 말하지만 사무엘은 더 이상 제자의 처지가 아니다. 사무엘은 이제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이고 엘리는 그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 이야기 안에서 하느님 말씀의 내용은 엘리 가문에게 내리는 심판의 선언이다(1사무 3,11-14). 이 선언은 우리가 사무엘기 상권 2장 27-36절에서 이미 본 내용 말고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 선언은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분이 주님이시라는 신원확인을 정당화하며, 사무엘기 상권 2장의 말씀이 유효함을 인정하도록 이끌어준다. 사무엘기 상권 2장에 언급된 하느님의 심판을 3장 11-14절에서 다시 인용하는 것은 하느님이 맡기신 사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역할도 한다. 사제 엘리와 그 아들들이 할 수 없었던 것을 사무엘이 이루어야 한다. 

 

사무엘기 상권 3장 19-21절 결론 부분은 하느님께서 사무엘을 선택하신 행동이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강조한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위해 일했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를 하느님에게서 인정받은 분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사무엘이 모세와 같은 큰 인물로 간주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사실 그 뒤 성경의 전통은 사무엘을 그렇게 높이 평가한다. 이런 예를 시편에서 볼 수 있다. “모세와 아론은 그분 사제들 가운데, 사무엘은 그분 이름을 부르는 이들 가운데 있네. 그들이 주님께 부르짖자 그들에게 친히 응답하셨네”(시편 99,6). 이처럼 모세와 사무엘은 하느님에게 선택받은 사람이고, 아주 예외적인 하느님 체험을 한 사람이었다(J. Briend, ‘Le Dieu dans l'Ecriture’ 참조). 

 

우리의 영성생활을 염두에 두고 사무엘기 상권 3장을 전체적으로 요약해 본다면, 다음 몇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하느님 체험은 영적인 메마름과 어두움의 시기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둘째, 하느님 체험은 시끄러운 가운데서보다는 ‘내면의 깊은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셋째, 그러한 하느님 체험을 중재하고 확인하는 영적인 지도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도 사무엘처럼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하자. 

 

묵상주제 

 

“사무엘이 자라는 동안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어, 그가 한 말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 단에서 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 온 이스라엘은 사무엘이 주님의 믿음직한 예언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1사무 3,19-20). [2013년 8월 25일 연중 제21주일 청주주보 2면, 이중섭 마태오 신부(오송 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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