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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구약성경의 열두 주제3: 아브라함 계약과 할례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5-03-18 조회수5,251 추천수1

[구약성경의 열두 주제 03] 아브라함 계약과 할례



우리 민족과 유다 민족의 공통분모 가운데 하나는 ‘할례’다. 필자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이웃집 꼬마가 포경수술을 받는다고 병원에 끌려간 적이 있었다. 지금도 두려움에 찬 그 녀석의 얼굴을 떠올리면 웃음이 난다.

우리는 위생에 관련된 이유로 할례(?)를 받는다고 하지만, 성경에서는 할례가 ‘계약의 표징’으로 나타난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며, 그 표징으로 할례를 규정하셨기 때문이다(창세 17,11).

그러나 할례는 아브라함 이전인 기원전 30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 근동의 일반 관습이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독자적 표시로 새 의미를 얻게 된다.


세상의 타락과 아브람의 등장

카인과 아벨 이후 세상은 타락의 길을 걸었다. “성읍”과 ‘음악’, “온갖 도구”로 표현되는 ‘인간 문명’은 동생을 살인한 카인에게서 비롯되었으며(창세 4,17-22), 초창기부터 쌓인 죄가 온 세상을 폭력으로 가득 채우기에 이르렀다(창세 6,11-12).

이때 저주받은 땅을 ‘위로’해 줄 휴식 같은 노아가(창세 5,23) 세상에 등장한다. 그러나 바벨탑 사건 이후 인류는 하느님에게서 다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느님은 ‘아브람’을 선택하시어 세상에 빛을 가져오는 계기로 삼으셨다(창세 12,1-3). 그래서 노아가 아담의 ‘열’ 번째 후손인 것처럼(창세 5장), 아브람은 노아의 아들 셈의 ‘열’ 번째 후손으로 세상에 태어났다(창세 11,10-26).

그리고 아담에게 주어진 번성의 축복이(창세 1,28) 노아에게 되풀이되었듯이(창세 9,1) 아브람에게도 비슷하게 내려졌으며(창세 17,2-6), 하느님은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과 많은 후손을 약속하시는 의미로 계약을 맺으셨다(창세 15장). 그리고 이 계약이 나중에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체결하실 ‘시나이 산 계약’의 기초가 되어 준다.


아브람과 맺으신 계약

“계약”이란 쌍방에게 각자의 의무와 권리를 규정한 다음, 그것을 지키도록 다짐하고 약속하는 관습이다. 성경에서 계약은 ‘맹세’(창세 21,22-32)나 ‘만찬’(창세 26,28-30; 탈출 24,11; 마르 14,22-26), ‘제사’(탈출 24,4; 시편 50,5) 행위 등을 통해 체결되었다.

“계약”을 뜻하는 히브리어 ‘브릿’은 어원이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묶다’로 추정한다. 곧, 상대방을 계약 의무에 ‘묶는’, 곧 계약 규정 준수의 책임을 지우는 행위를 암시한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고대 근동에서 계약은 주로 개인과 개인(창세 21,22-32), 나라와 나라 사이에(1열왕 5,26; 15,19) 맺어졌다.

성경은 남편과 아내가 되는 ‘혼인’도 ‘계약’ 관계로 표현한다(말라 2,14).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계약이 종교적으로도 승화되어, 하느님과 주님의 종들 사이에도 맺어지게 되었다. 그 가운데 하느님께서 아브람과 맺으신 계약은, 노아와의 계약(창세 6,18; 9,1) 이후 성경에 등장하는 첫 계약이다.

아브라함 계약은 창세 15장과 17장에 최초로 언급되며, 15장은 하느님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는 의식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아브람은 암송아지, 암염소, 숫양, 산비둘기, 어린 집비둘기 등을 준비하여, 날짐승을 제외한 짐승들을 반으로 잘랐다(창세 15,9-10). 그리고 주님께서 그 사이를 지나가시며, 계약이 체결되었음을 인증하셨다.

언뜻 보아, 이 의식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으나, 이것은 고대 근동인들이 일반적으로 계약을 체결하던 방식이었다. 특히 지배국과 피지배국 사이에 지켜져야 할 권리와 의무를 규정할 때, ‘짐승을 잘라’ 계약을 맺었다. 곧, 이 의식은 원래, 계약을 파기하는 경우 반으로 잘린 짐승처럼 되리라는 위협을 내포하는 것이었다.

창세 15장에서는 계약의 지배자가 하느님이고, 피지배자는 하느님의 종 아브람이다. 아브람이 짐승들을 반으로 자르자, 하느님은 계약 인증을 위해 ‘연기’와 ‘횃불’의 형상으로 그 짐승들 사이를 통과하셨다(창세 15,17). 그리고 ‘계약을 맺다’로 번역된 창세 15,18은, 히브리어 본문(리크롯 브릿) 상에서 ‘계약을 쪼개다’, ‘계약을 자르다’로 직역된다. 곧, 이 표현에는 짐승을 잘라 계약을 체결하던 고대 의식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쪼개진 짐승들 사이를 통과하셨으므로, 계약의 의무를 지는 쪽은 하느님이다. 바꿔 말하면, 주님은 아브람에게 당신 계약이 결코 깨어지지 않을 것임을 행동으로 확인해 주신 셈이다.


영원한 계약

하느님은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과 많은 후손을 약속하시는 의미로 계약을 체결하셨고, 이것이 나중에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는 시나이 산 계약의 배경이 되어준다(탈출 6,8; 24,1-11).

그러나 십계명을 비롯한 여러 율법 준수를 요구한 시나이 산 계약과 달리(레위 26,15), 아브람과 맺으신 계약은 아무 조건이 붙지 않은, 곧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선물처럼 내리신 ‘무조건적 계약’이었다. 그래서 아브람 계약은 깨어지지 않을 “영원한 계약”이다(창세 17,19).

게다가 주님께서 직접 연기와 횃불 형상으로 쪼개진 짐승을 통과하셨기에(창세 15,17), 계약의 의무를 지는 쪽은 오히려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시나이 산 계약은 율법 준수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파기되는 ‘조건부’지만, 아브람과의 계약은 조건 없이 ‘영원토록 유효할 수 있는’ 계약이다. 이는, 아브람이 하느님께 보여드린 신의에 대해 상급처럼 내려진 계약이었기 때문이다(창세 15,6; 느헤 9,8).

그래서 예레미야나 에제키엘과 같은 예언자들은 시나이 산 계약이 파기되어 유다 왕국이 망한 뒤에도, 아브람 계약에 기초하여 시나이 산 계약을 대체할 ‘새 계약’을 선포할 수 있었다(예레 31,31; 에제 37,26). 그리고 이것이 신약시대에 예수님을 통하여 새 계약체결로 실제화된다(마르 14,24).


계약의 표징, 할례

아브람 계약은 ‘조건 없이’ 영원토록 유효한 계약이지만, 창세 17,11은 아브람을 포함한 후손들에게 할례를 받아 계약의 표징으로 삼도록 명한다. 곧, 할례는 계약 유지를 위한 조건이 아니라, 하느님과 계약을 체결했음을 보여주는 “표징”이 된다. 할례를 통해 주님과의 계약이 몸에 새겨져, 영원히 깨어지지 않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할례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육체적으로도 자기가 계약 공동체의 일원임을 표시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자기 몸에서 이 표징을 볼 때마다, 하느님과의 계약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할례를 받을 때 아브람의 나이는 아흔 아홉이었다(창세 17,1). 그리고 이때 그의 이름이 “아브라함”으로 바뀌게 된다(창세 17,5).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히 신분 확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름 안에는 그 사람의 본질과 존재의 특성이 담겨있다.

그래서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이름이 제명되는 처벌을 받으면(신명 7,24; 9,14 등),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강력한 것이 된다. 자손 없이 죽은 형제의 과부와 혼인하도록 규정한 ‘수숙혼’도, 죽은 형제의 ‘이름’이 지워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신명 25,6).

아브람은 많은 민족들의 조상이 될 운명임을 확인받는 차원으로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받았다. 창세 12,2는 아브람이 ‘큰 민족’이 될 것을 예고했지만, 창세 17,5는 ‘아브라함’이 된 그가 ‘많은 민족들의 조상’으로 확대될 것임을 약속한다.

게다가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는 그 상대에 대한 지배권을 상징한다(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준 창세 2,19 참조). 그래서 하느님은 아브람에게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주시어, 당신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영원히 주군이 되실 것임을 알리셨다.


고대 근동의 할례

그러나 사실 할례는 이스라엘의 독자적 전통이 아니라, 고대 근동 나라들이 일반적으로 행한 관습이었다. 이집트, 에돔, 암몬, 모압 등이 할례를 받았고, 헤로도토스에 따르면(2,104) 페니키아인들도 이집트의 영향을 받아 할례를 치렀다고 한다. 예레 9,24는 “몸의 할례만 받은 자들”을 벌하시겠다는 신탁에 이집트, 유다, 에돔, 암몬, 모압의 이름을 언급한다.

할례 관습은 기원전 3000여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고대 근동의 북쪽 지방에서 유래하여 남쪽 이집트까지 퍼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히브리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이 관습을 받아들인 듯하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통해 할례는 ‘계약의 표징’이라는 의미를 새롭게 얻게 되었다. 반면, 필리스티아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았다(판관 14,3; 15,18). 필리스티아는 에게해 방향에서 배를 타고 이스라엘로 이주해 온 이방인들이었으므로, 할례 관습이 없었던 듯하다.

그래서 사울이 다윗에게 할례 받지 않은 필리스티아인들의 포피를 요구한 배경도 이해할 수 있는데(1사무 18,27), 할례 받지 않은 이들의 포피는 죽은 다음에라도 잘라야 할 정도로 부정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성경은 또한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의 죽음”을 불명예스러운 죽음, 곧 ‘개죽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도 사용했다(에제 28,10; 32,24.30). 그러나 필리스티아뿐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인들도 할례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할례가 유다인들의 독특한 상징처럼 여겨지기 시작한 때는, 남 왕국 유다가 멸망하여 바빌론으로 유배된 이후부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근동의 민족들은 대개 사춘기 때 할례를 받았으나, 창세 17,12는 생후 ‘여드레’로 그 시기를 앞당긴다. 그래서 열세 살에 할례를 받은 이스마엘과(창세 17,25)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이사악의 운명은(창세 21,4) 여기서도 차이가 난다.

고대 근동인들이 사춘기 때 할례를 치른 이유는, 성인으로서 결혼생활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단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할례는 같은 셈족 언어인 아랍어로 ‘하타나’라 하고 히브리어로는 신랑을 ‘하탄’이라 하므로, 예부터 ‘할례’와 ‘혼인’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이집트 탈출 이전 모세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는, 치포라가 아들의 포경을 잘라 모세의 발에 대며 “당신은 피로 얻은 나의 신랑입니다.”라고 말했다(탈출 4,25 참조). 이 또한 ‘신랑’과 ‘포경을 자르는 행위’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암시해 주는 듯하다. 그뿐만 아니라, 아브라함도 할례를 받은 다음에야, 사라를 통해 이사악을 얻을 수 있었다(창세 17,19.21).


마음에 받는 할례

할례가 고대 근동에 일반화되어 있던 관습인 만큼, 구약은 형식적 할례를 넘어 ‘마음에도 할례’를 받아야만 아브라함 계약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고 선포한다(레위 26,41; 신명 30,6). 마음의 포피를 벗겨야 비로소 하느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고, 가슴에도 새겨지기 때문이다(예레 6,10).

바빌론 포로기를 살았던 에제키엘도,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회복의 시대에 ‘돌같이’ 완고한 백성들의 마음이 “살로 된 마음”으로 변모하리라 예고한다(에제 36,26).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해석처럼, ‘돌’은 아무것도 못 느끼는 무생물이지만 ‘살’에는 감각이 있기 때문이다. 곧, “살로 된 마음”이란 ‘할례 받은 마음’(신명 30,6)이나 ‘포피를 벗겨낸 마음’(예레 4,4)과 유사한 표현이다.

‘살로 된 마음으로의 변화’는 신약성경에 “성령으로 마음에 받는 할례”(로마 2,29)로 반영되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더 나아가, 이제는 육의 할례가 하느님 백성이 되기에 필수적인 요소가 더 이상 아니며, 오직 믿음으로만 의로움을 얻을 수 있다고 선포하기에 이른다(로마 3,30).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으로 형성된 ‘계약 공동체’였다. 그래서 이방인이 이 ‘공동체’에 들어가려면 할례를 받아야 했다(탈출 12,48). 그러나 신약시대를 거치며 선민과 이방인들의 경계가 허물어진 뒤, 육의 할례는 점차 의미를 잃고, 마음의 할례를 통해서 신앙 공동체에 합류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 김명숙 소피아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에서 구약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5년 3월호, 김명숙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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