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그루터기] “별을 보고”(마태 2,2) 주님 공현 대축일을 맞아 이 글을 씁니다.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동방 박사 세 사람을 떠올리며 (실존 인물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상징적 의미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쓰겠습니다. 동방 박사들을 좋아한 지는 꽤 오래된 것 같습니다. 처음 좋아하게 된 계기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잠든 밤에 깨어 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남들은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던 그때에 그들은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금년에는 조금 다른 의미로 동방 박사들이 와 닿습니다. 그들이 하늘을 바라보고 별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좋습니다. 그들은 별만 보았습니다. 넓고 넓은 세상에서 별 하나만, 그 한 점만 바라보았던 그들이 아름답습니다. 작년 가을이 되면서부터 금년 한 해를 위한 성경 구절을 찾고 있었습니다. 지난 가을 언젠가 미사 때에 성전 정화에 관한 말씀을 듣고는, 이거다 싶었습니다. 세리와 창녀는 용서하시지만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드는 것은 용서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다른 온갖 죄인에게는 다 너그러우시면서도 성전을 이익을 위한 도구로 만드는 것은 그대로 두지 못하시는 예수님. 거룩한 성전과 사리사욕은 공존할 수 없다는 것, 그 의미가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책상을 들어 엎으시고 사람들을 내쫓으시는 성전 정화 장면은 한 해를 살기 위한 말씀으로 아무래도 좀 거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주제를 표현하는 다른 구절이 없을까 이리저리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주친 구절이 이번에는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마르 10,43)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 옆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두 제자들에게, 그리고 그 두 제자에게 화를 내는 나머지 열 제자에게, 백성 위에 군림하고 백성에게 세도를 부리는 고관들이나 통치자들처럼 되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이지요. “그러나 너희는”이라는 표현이 분명해서 아주 좋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한다고 해서 그대로 따라가지 말라고, 달라야 한다고 하시는 말씀이 또 좋았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도 “… 하지 마라”는 것이지 어떤 긍정적인 가치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어서, 좀 더 찾아보았습니다. 연말이 다 되었을 때 다시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 3,1). 여기까지 왔을 때 물리적으로 시간이 흘러 새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 구절로 낙착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에는 앞에서 거쳐 왔던 구절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 3,2).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그 한 가지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추구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이어지는 콜로새서의 단락에서는, 무엇을 버려야 할 것인지를 열거합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콜로 3,5)을 버리고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콜로 3,12)다운 것들을 선택하라고 말합니다. 땅에 있는 것에 대한 포기가 없다면, 위에 있는 것에 대한 추구가 진실한 것인지 의심스럽게 됩니다. 요즘 다른 일을 하느라 한동안 계속 사도행전을 읽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땅끝까지 당신의 증인들이 되라고 세우신(사도 1,8 참조) 사도들에 대해 많이 생각했습니다. 사도들은 순교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증언은 힘이 있습니다. 재판에서나 경찰서에서 어떤 사람이 증언을 했다고 합시다. 그가 그 증언을 하는 것이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이익을 가져오는 것이었다면, 그 증언이 혐의를 면하게 하거나 경제적 이익을 얻거나 정치적으로 입지를 확고하게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었다면, 그 증언이 참된 증언인지 거짓 증언인지 확실히 알 수 없게 됩니다. 사실대로 증언하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하기 때문에 거짓 증언을 했을 수도 있지요. 아무리 맹세를 하면 무엇합니까? 자신의 이권이 개입되면 그 증언은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사도들의 증언을 믿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손해를 보면서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반대를 받을 것인 줄 알면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 증언했고 실제로 자신이 증언한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을 박해한 이들은, 아마도 자신들이 옳다고 여기고 있었을 것인데도 늘 백성의 눈치를 살핍니다. 박해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여부도 자신들이 믿는 진리에 따라서가 아니라 정치적 상황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이것이 진리라고 증언하지 못합니다. 진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하기에, 그 진리보다 더 놓을 수 없는 무엇이 있기에, 그만큼 진리의 가치는 상대적인 것에 머물고 맙니다. 동방 박사들은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들 같습니다. 별이 뜬 것을 보고는 그냥 따라갑니다. 어디서 떠났는지 성경에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동방”(마태 2,2),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동쪽이겠지요. “박사”(마태 2,1)라고 번역된 단어는 200주년 신약성서에는 “점성가”(마태 2,1)라고 나옵니다. 다른 문맥에서는 “점장이”, “마술사”(사도 13,6)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그들이 별을 보고 그 별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으로 나오는 만큼, 실제로 점성가에 가까울 것이고 점성술이 발달했던 그 먼 동쪽 지역에서 왔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 먼 나라 사람들에게 유다인들의 임금이 태어나는 것이 무슨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고, 목적지도 분명히 알지 못하면서 그들은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이 바라본 것은 별뿐이었습니다. 그 별하나 따라가기 위해서 아무 계산 없이 떠났습니다. 성경에서는 그들이 임금이었다고 말하지 않지만, 전통적으로는 세 사람이 임금이었다고 하지요. 임금이 그렇게 나라를 떠나면 어떡합니까? 할 일이 얼마나 많을 텐데, 얼마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 텐데 밤에 별이나 쫓아갑니까? 언제 돌아오겠다는 말도 없이? 정확한 위치를 안 것도 아니고, 기껏 헤로데에게 가서 물어보아야 할 처지이면서? 그나마 구약 성경을 알고 있던 율법학자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들은 그 아기가 태어난 곳이 베들레헴이라는 것도 알아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이 단락을 보면 별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을 인도해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그 별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의 다른 무엇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를 동시에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계산이 필요합니다. 두 가치가 상충할 때에 어느 것을 선택할지 생각을 해야 합니다. 때로는 이것을 위해 저것을 양보시키고, 또 때로는 거꾸로 저것을 위해 이것을 포기하고. 어느 것도 내가 목숨을 바칠 가치는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보다 더 나쁜 것은 꿩도 먹고 알도 먹겠다고,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면서 “현세적인 것들”을 바라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에서 광고를 하는 사람이 정말로 그 물건이 좋다고 믿는다고 여기지는 않으시지요? 그 사람은 출연료를 받고 그렇게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어떤 대가나 환영을 바란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는 그런 광고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야말로 성전 정화 대상입니다. 예수님께 쫓겨날 형국입니다. 그런 삶에는 동방 박사들의 별이 없습니다. 전에 어느 수도원에 갔더니 사람은 별을 보아야 한다고 옥상에 망원경을 설치해 놓았더군요. 오늘 문득 그 망원경 생각이 납니다. 제 책장에는 성탄 장식인 나무로 된 별 하나가 일 년 내내(6년째?) 자리 잡고 있습니다. 프린터 위에는 베들레헴의 별 목걸이가 얹혀 있습니다. 서랍에는 과자를 찍어내는 별 모양 틀이 있습니다. 책상 위에는 낙타 세 마리 그려진 카드가 몇 년째 서 있습니다. 여름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바라보았던 그 아름다운 별 하나를 품고 살고 싶습니다. “주님을 열렬하게 찾는 이들아 눈 들어 저 높은 곳 우러러보라” (주님 공현 대축일 찬미가). [땅끝까지 제86호, 2015년 3+4월호, 안소근 실비아 수녀(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성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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