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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말씀 그루터기: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마르 15,39)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5-06-09 조회수3,834 추천수1

[말씀 그루터기]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마르 15,39)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말하였다.”(마르 15,39).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 이론상으로는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예비자 교리에서도 아주 기초이지요.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아본다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것이 이상하게 들린다면, 혹시 우리가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고백하는 것이 복음서 전체의 분기점이 되고, 이후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어 그곳에서 수난하시고 돌아가시며 그 마지막에 이르러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라고 고백하는 것으로 결론이 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 이것이 이 복음서의 핵심입니다. 

 

복음서 중간의 몇 대목에서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이 당신 아드님이심을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마르 1,11)이라는 말씀이 들려오지요. 예수님의 신원은 처음부터 확실합니다. 그분의 신성은 복음서 첫머리부터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런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거룩한 변모 때에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마르 9,7)라는 음성이 들려오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다가오는 수난의 때에 그 영광을 기억하라고 제자들에게 미리 한 가닥 빛을 내비쳐 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제자들은 부활 이전에는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발설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제대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이 백인대장입니다. 언제 그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아봅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실 때입니다. 

 

“그렇게” 숨을 거두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사람들은 예수님께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합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기 목숨을 구한다면 메시아라고 믿겠다고 합니다. 어쩌면 그렇게 당신의 능력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믿게 하는 데에는 더 쉽고 효과적이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죽음에게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이것이 문제입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이, 죽음을 겪지 않는 것이 죽음을 이기는 길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을 피하려 하는 것은 내가 죽음보다 약할 때입니다. 죽음을 피해 도망가는 사람은 죽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이긴 것이 아니라 죽음보다 약해서 죽음에게 진 것입니다. 의술이 발달해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고도 살아 있으면 죽음을 몇 번이나 이기는 것인가요? 그렇게 죽음을 피하면 언젠가는 다시 죽음을 맞습니다. 결국 언젠가는 죽음에게 결정적으로 지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셨다고 할 때, 제 눈앞에는 사진처럼 떠오르는 모습이 있습니다. 무력하게 고개를 땅으로 떨군 모습입니다. 완전히 꺾어진 모습, 죽음에 맞서지 않고 그 죽음을 그대로 당하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런 죽음이었습니다. “그렇게”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분은 죽음 앞에서 “괴로워 죽을 지경”(마르 14,34)이라고 하실 만큼 큰 두려움을 느끼셨지만, 그래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시기를 청하셨지만 결국 남김없이 죽음을 겪으십니다. 아버지의 뜻이라면, 죽음이라도 온전히 받아들이십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손에서 죽음까지 받을 수 있으셨기에, 죽음에 지지 않으시고 오히려 죽음이 당신 앞에서 힘을 잃게 만드셨습니다. 당신 죽음으로 죽음을 꺾으셨습니다. “그렇게” 머리를 푹 숙인 가장 철저한 패배자의 모습으로 죽음을 이기셨고 백인대장은 그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알아봅니다. 수난과 죽음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가장 결정적으로 보여 주는 순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히브 5,8-9). 

 

예수님은 “그렇게” 숨을 거두시어 완전하게 되셨고, 당신의 뒤를 따르는 이들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 ‘고난을 겪음으로써 순종을 배운’ 순교자들을 생각합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하려고만 하면 죽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배교하든지, 아니면 적어도 말로만 배교한다고 하면 목숨은 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 길을 선택했다면 그것이 죽음 앞에서 패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죽음을 받아들였고 그래서 믿음으로 죽음을 이긴 이들이 되었습니다. 

 

현대에도 순교자들은 있지만, 고대에는 지금보다 순교자들이 더 많았고 순교에 대한 열망도 더 강했습니다. 그들이 순교를 원했던 것은 순교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최고도로 드러낼 수 있는 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요약하지요. 물론 아무도 내가 하느님을 많이 사랑해서 순교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순교는 특별한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교를 원했다는 것은 그 은총을, 달리 말하면 죽음을 이기는 믿음을 원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들은 삶을 원하기보다, 죽음에도 굴하지 않는 믿음을 더 원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예수님의 뒤를 따라 “영원한 구원”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안에 그와 같은 열망이 있습니까? 죽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꼭 오래 살려고 한다기보다, 실패를 겪지 않으려고 하고 상처를 입지 않으려고 하고 피해를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고통은 벗어나려 하고 어려움과 위험은 이리저리 피해 다닙니다. 박해 시대에 있었던 ‘순교에 대한 열망’은 표현조차 생소합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삶 안에서 우리는 분명 수많은 죽음들을 겪고 있지만 그 죽음을 못 본 체합니다. 마치 나는 죽지 않아야 하고 내 삶 안에는 죽음이 없어야 하는 것처럼, ‘눈 가리고 아웅’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죽음을 이기는 믿음은 사라졌습니다. 아버지께 대한 순종으로 죽음을 꺾는 승리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연피정을 끝내고 나오는 길입니다. 피정 동안 가장 많이 생각한 말씀이 바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마르 15,39)라는 구절이었습니다. 

 

여러 장면이 겹쳐졌습니다. 죽음을 겪는 것만 같았던 시기, 그 시기에 십자가 아래 앉아 나누던 대화, 그때 보았던 고개 떨군 십자가의 예수님. 백인대장은 예수님의 죽음에서 그분의 신성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아봅니다. “그렇게” 숨을 거둘 수 있는 분은 죽음을 이기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죽음 없는 부활이 있을 수 있을까요? 믿음으로 죽음을 이기지 않았다면, 부활 신앙이 있을 수 있을까요? 아직도 감히, 제 삶 안에 들어 있는 죽음의 어둠들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힘없이 죽겠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그 어둠이 퍼지는 것이 두렵고, 어둠을 영원히 무거운 뚜껑으로 덮어 눌러두고 싶습니다. 고개를 떨어뜨린 예수님의 모습과 지금의 제 모습은 아직도 거리가 멉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용기를 내어, 죽음을 이기는 믿음을 주시기를 청해 봅니다. 그런 은총을 주신다면 “그렇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이길 수 있겠지요. 

 

사도 바오로와 함께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필리 3,10-11). 

 

무덤에서 일으켜지신 주님께서는 다시는 죽지 않으십니다. 온갖 실패를 겪으시고 죽음까지 겪으신 예수님의 부활은, 무수한 패배와 좌절을 겪는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줍니다. 

 

[땅끝까지 제87호, 2015년 5+6월호, 안소근 실비아 수녀(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성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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