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30) 기원전 7세기의 임금들
왜 훌륭하냐고, 믿음이 강한 임금이니까
다윗 왕조가 무너지는 중요한 순간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속도를 늦추고 몇몇 임금들에 대해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시기는 아주 훌륭한 임금들과 아주 나쁜 임금들이 교차됩니다. 도표는 히즈키야부터 다윗 왕조의 멸망까지를 요약한 것입니다. 오늘은 그 처음의 네 임금을 살펴보고, 요시야의 죽음과 나머지 임금들은 몇 주 후에 예레미야와 함께 다룰 것입니다. 이 임금들을 보면서 다윗 왕조가 왜 무너졌을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원전 7세기 다윗 왕조
그만한 임금이 없었다
이사야와 미카는 유다 임금 히즈키야 시대까지 활동했었습니다. 히즈키야(재위 기원전 716~678)는 상당히 좋은 임금이었습니다. 임금들에 대한 평가에서 점수가 후하지 않았던 열왕기는 그래도 히즈키야가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신뢰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유다의 모든 임금 가운데 그만한 임금이 없었고, 그보다 앞서 있던 임금들 가운데에서도 그만한 임금이 없었다”(2열왕 18,5)고 말합니다. 요시야가 히즈키야보다 더 훌륭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히즈키야의 특징은 “하느님을 신뢰하였다”는 것입니다.
열왕기는 신명기계 역사서이고, 신명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신명 6,4 참조). 열왕기는 이 기준에 충실했는지 여부에 따라 임금들을 평가합니다. 그렇다면 히즈키야가 훌륭한 임금으로 여겨지는 이유도 짐작할 만하지요. 그가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했던 종교 개혁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산당들, 기념 기둥들, 우상들을 없앴고 율법의 계명들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아시리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애썼습니다. 그의 아버지 아하즈처럼 아시리아의 그늘 아래 살려고 하면 아시리아의 신들을 섬기지 않을 수 없었기에, 종교 개혁과 정치적 독립 추구는 늘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 임금인 므나쎄였습니다(재위 기원전 687~642). 여기서도 평가를 하자면, 다윗 왕조의 임금들 가운데 열왕기에서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것이 므나쎄입니다. 열왕기는 므나쎄의 손자 요시야가 훌륭한 임금이었는데도 나라가 망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므나쎄가 주님의 분노를 몹시 돋우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유다를 거슬러 타오르는 커다란 분노의 열기를 거두지 않으셨다”(2열왕 23,26)고 말합니다. 다윗 왕조의 몰락은 그때에 이미 결정됐다는 것입니다.
므나쎄는 히즈키야의 뒤를 이어 아시리아에 의하여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되었으며, 당연히 친 아시리아 정책으로 우상 숭배를 끌어들였습니다. 아시리아 사람들이 섬기던 이런저런 신들을 들여왔던 것입니다. 온 나라에 우상이 바글바글했다고 해야 할까요? 그 영향이 요시야 초기까지 갑니다.
나쁜 임금이었지만 회개를
그런데 연대표를 보십시오. 이 나쁜 임금이 너무 오래 왕위에 눌러앉아 있었습니다. 인과응보를 매우 강조했던 역대기 저자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열왕기에는 없는 므나쎄의 회개에 관한 본문을 삽입합니다. 나쁜 임금이었지만 회개해서 오래 왕위에 있을 수 있었다는 설명입니다.
므나쎄 다음으로는 아들 아몬이 임금이 됩니다(재위 기원전 642~640). 아버지 므나쎄의 노선을 따라갔으니 좋은 임금일 수 없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나마 왕위에 있었던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비난을 덜 받는 것 같습니다. 질이 같아도 양이 적다고나 할까요?
요시야는 다윗을 제외하고 가장 훌륭한 임금으로 평가됩니다(재위 기원전 640~609). 연대표를 보면 그도 상당히 왕위에 오래 있었던 것 같이 보이지만, 8세에 임금이 되었기에 요절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가 전사했을 때 온 유다가 땅을 치며 애통해 하고, 실상 그의 죽음으로 유다 왕국은 완전히 기울기 시작할 것입니다.
지방 성소를 없애
요시야에게서도 가장 큰 업적은 종교 개혁입니다. 열왕기 하권 22─23장에 따르면, 그가 성전 보수 공사를 하던 중에 두루마리를 발견했다고 전해집니다. 하기는 이미 성전을 보수하고 있었던 것을 보아도 그는 하느님께 충실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이때에 그가 발견한 두루마리가 신명기의 일부 또는 그 옛 형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그 두루마리의 내용에 따라, 예루살렘을 제외한 지방 성소를 없앱니다. 소위 “경신례의 중앙 집중”입니다. 우상 숭배만 금한 것이 아니라, 같은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라 하더라도 다른 곳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이 한 분이심을 강조하기 위한 조처였습니다. 이곳저곳에서 예배를 드리면 사람들이 그 지역의 다른 신을 섬기는 줄 알고 쉽게 우상 숭배에 빠지기 때문입니다(신명 12장 참조).
하지만 그가 개혁한 것은 기원전 622년에 이르러서입니다. 재위 18년째이지요. 8세에 임금이 되었기에 초기에는 업적이 없습니다. 그 시기는 오히려 아직도 므나쎄와 아몬 시대의 영향으로 우상 숭배가 한창이었습니다. 스바니야 예언자가 활동한 것이 그 시기였습니다.
이 정도 배경을 깔아 놓고 다음에는 다시 이 시대 예언자들에게로 돌아갈 것입니다. 왕국이 기울기 시작하는 것이 보이십니까? 기원전 8세기의 문제는 아시리아였고 다음에는 바빌론이 문제가 될 것이지만, 열왕기는 아시리아나 바빌론 때문에 유다 왕국이 망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멸망의 원인은 이스라엘이 한 분이신 하느님께 충실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한 데에 있고, 그 선봉에는 임금들이 있습니다.
[평화신문, 2015년 7월 12일, 안소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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