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여행] (31) “니네베가 망하였다!”(나훔 3,7)
위정자는 벌하시고 가난한 백성은 살리시니
때는 요시야 통치 초기. 백성들이 살기 힘들었던 시기입니다. 나훔 예언자가 “피의 성읍”(나훔 3,1)이라고 부른 아시리아의 군사력은 주변의 약소국들을 마구 짓밟았습니다. “온통 거짓뿐이고 노획물로 가득한데 노략질을 그치지 않는다”(나훔 3,1).
시리아, 북왕국 이스라엘, 티로, 시돈 모두 아시리아에게 함락되었습니다. 유다의 백성들도 시달렸습니다. 다윗 왕조의 후손이라는 므나쎄와 아몬은 아시리아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새로 임금이 된 요시야는 아직 나이가 어렸습니다. 기댈 곳 없는 백성! 스바니야와 나훔은 그 백성을 향해 예언을 선포합니다.
스바니아의 예언, 아나윔
우상 숭배가 만연한 기원전 630년대의 유다와 예루살렘에게 스바니야가 선포할 말은 심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날을 선포합니다(스바 1,14-18 참조). 사람들은 악하게 살면서도 “주님은 선을 베풀지도 않고 악을 내리지도 않으신다”(스바 1,12)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든 하느님은 그저 내버려 두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느님께서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이미 아모스도 주님의 날은 유다를 심판하실 날이 되리라고 말했었습니다. 스바니야는 예언자들 가운데 가장 무섭게 득달같이 달려올 그 날을 예고합니다. “그날은 분노의 날, 환난과 고난의 날, 파멸과 파괴의 날, 어둠과 암흑의 날, 구름과 먹구름의 날이다”(스바 1,15). 유다 왕국은 이미 기울어가고 있습니다. 모든 유배 전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스바니야는 멸망을 알립니다.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해도, 왕국이 무너질 날이 50년 앞으로 다가와 있습니다. 예언자는 그것을 알아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은 아닙니다. 스바니야는 전혀 새로운 소식을 전합니다. 불의와 억압을 저지르는 유다와 예루살렘에게 심판이 선고되어도, 그 파멸을 뚫고 ‘남은 자들’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나는 네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스바 3,12). ‘남은 자들’, ‘주님의 가난한 이들’(아나윔), 이들은 바빌론 유배 이후로 중요하게 부각될 개념입니다. 그 시초가 스바니야입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선포하시는 징벌의 날에 온 나라가 무너진다 해도, 잿더미 속에서 자라나는 새싹이 있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 새싹이 다름 아닌 지금 정복자들에게 약탈당하고 무능한 임금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약하고 가난한 백성이라는 것을 예고합니다.
스바니야서가 신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가난한 이들(아나윔)에 대한 신학 때문입니다. 그는 왕국의 멸망을 겪으면서도 주님께 피신할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을 둡니다. 이 ‘아나윔’은 영적으로만 가난한 것이 아니라 우선 실제적으로 가난한 이들입니다. 스바니야는 그들에게서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지리라고 말합니다. 지난주에 보았던 것처럼, 이스라엘을 멸망으로 이끈 것은 임금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조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이제 임금이며 통치자들에게 무슨 희망을 두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거만한 이들을 치워 버리실 것입니다(스바 3,11). 남는 것은 가난한 이들입니다(3,12). 억누르는 자들은 하느님께서 치워 버리실 것이고, 절뚝거리는 이들은 주님께서 구하실 것입니다(3,19). 왕국이 무너지면 그 나라 안에서 세력을 부리던 이들도 모두 무너지겠지요. 그러나 기댈 곳이 없어 오직 하느님께만 의지하는 이들,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는 이들은(3,12) 왕국이 멸망한 후에라도 미래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체로 쳐서 돌을 골라내듯 하느님은 힘 있는 자들은 모두 베어내시고 그 밑에서 죽어가던 백성들에게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분노에 더디신 분
시간이 좀더 흐르고 나면, 영원히 세상을 지배할 것 같던 아시리아도 기울게 됩니다. 기원전 6세기 중반에는 바빌론에서 아시리아를 거스른 반란이 일어나고, 아시리아 안에서도 왕권 계승을 둘러싼 내전이 일어납니다. 급기야 기원전 612년 메대와 바빌론이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를 무너뜨립니다. 나훔은 니네베의 함락을 노래합니다.
“보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 평화를 알리는 이의 발이 산을 넘어온다”(나훔 2,1). 제2이사야에 이와 매우 비슷한 구절이 있습니다(이사 52,7). 이사야서에서 그 기쁜 소식이란 이스라엘이 유배에서 풀려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훔서에서 말하는 기쁜 소식은 니네베의 멸망입니다.
신학적으로 일부 신자들이 나훔서에서 어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나훔이 니네베의 멸망을 너무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요나서에서 하느님은 니네베를 아끼십니다. 그와 달리 나훔서에서는 하느님을 “보복하시는 분”(1,2)이라 부르며 니네베에게 불행을 선언합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나훔서 1장 2-8절의 노래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나훔서에서는 하느님을 “분노에 더디신 분”(1,3), “선하신 분”(1,7)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은 쉽게 분노하시고 마구 보복하시는 분이 아니시며, 분노에 더디신 분이시면서도 아시리아의 지나친 불의를 벌하지 않은 채 끝까지 그대로 두지는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지배하시는 하느님은 아시리아보다 강하십니다. 아시리아가 폭행을 저지를 때, 그 아시리아를 응징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며, 불의를 꺾고 정의를 세우십니다.
하느님께서 불의를 심판하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불의에 희생된 이들을 구원하시겠습니까? 폭력에 피 흘리는 이들에게 구원을 선포하시는 하느님과 피의 성읍을 세우고 있는 이들에게 징벌을 선포하시는 하느님은 같은 분이십니다.
[평화신문, 2015년 7월 19일, 안소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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