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묵시록의 올바른 이해] 요한의 소명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 (2)
‘사람의 아들’의 모습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1,13에서 의복의 상징“(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과 가슴에 두른 “금띠”)을 통해 ‘사람의 아들’을 묘사한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1,14-15에서는 그분의 신체적인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신체적 묘사에서도 각 요소들 사이의 연관성은 보이지 않은 채, 신체의 특정 부위를 다른 대상과 직접 비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묵시록의 전형적인 상징체계에 의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분의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처럼 또 눈처럼 희고”
머리와 머리카락이 ‘사람의 아들 ’모습의 첫 번째 특징이 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머리카락이 희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머리까지 희다는 것은 상상하기 쉽지 않다.
어쨌든 저자는 머리든 머리카락이든 모두 희다고 함으로써 흰색을 강조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출전(出典)이 되고 있는 다니 7,9과 비교해 보아야 한다.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같았다.”
다니엘서와 묵시록의 두 본문에서 머리카락이 양털 같은 흰색이라는 것, 눈처럼 희다는 표현, 그리고 다음에 나오는 불의 상징이 공통점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세부사항을 구체적으로 해석하기 전에 이미 문맥에서 첫 번째 단서가 나온다. 다니엘서의 문맥에서는 흰색이나 불꽃이 “연로하신 분”, 곧 ‘아주 먼 옛날부터 계신 분’이신 하느님의 속성으로 표현되고 있다.
묵시록의 저자는 다니엘서의 문맥을 배경으로 하면서 하느님의 속성을 ‘사람의 아들’에 적용시킨다.
이는 묵시록의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과 동일한 속성을 지니신 분, 곧 하느님과 동등한 차원에 계신 분이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단서는 흰색의 상징에서도 드러난다. 다니엘서에는 “연로하신 분”의 옷이 흰색이지만, 묵시록은 옷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머리와 머리카락의 흰색에 집중하고 있다.
이미 “양털”도 흰색을 나타내지만 “눈”의 표상은 성서적 용법에서 흰색의 극치를 표현한다. 양털에서 눈으로 흰색은 점점 더 강조된다.
묵시록에서 말하는 흰색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실현되고 부여된 초월적 차원을 드러낸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셨고 부활의 원천으로서, 흰색에 잠겨있기 때문에 하느님과 동등한 위치에 계신다.
여기에 다른 또 다른 측면이 첨가될 수 있다. 옷 대신 머리가 희다고 강조하는 것은, 머리가 묵시록에서 생명 또는 생기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머리가 희다는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충만한 생명을 의미한다. “그분의 눈은 불꽃 같았으며”
이 구절 또한 다니엘서에서 영감을 받은 것인데(10,6: “눈은 횃불 같고”), 묵시록의 저자는 횃불이라는 표상을 불꽃으로 변형함으로써 불 자체를 더욱 강조한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느님을 지칭하는 불에 대한 언급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먼저 하느님의 현현을 나타내는 불, 하느님 심판으로서의 불, 하느님의 은혜로운 활동을 표현하는 불 등이다.
따라서 이 표현 또한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차원에 계심을 지칭하는 것인데, 불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언급은 신명 4,24“(주 너희 하느님은 태워버리는 불이시며 질투하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에서 발견할 수 있다. “태워버리는 불”은 불꽃의 상태로 타오르는 불을 지칭한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은 “태워버리는 불”이신 것처럼, 그리스도는 묵시록에서 “불꽃 같은” 눈을 지니신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그분이 하느님과 동등한 위치에 계시다는 것을 다시 확인시키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교회와 관련하여 불타는 사랑을 지니신 분임을 나타낸다.
그뿐 아니라 그분은 불의 결정적인 힘을 지니신 당신의 눈으로 교회들의 전체상황을 꿰뚫어보시고, 불꽃 상태의 불처럼 그 안에 있는 이질적인 것을 태워버리실 수 있다. 여기에는 심판이 암시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정과 정화의 차원이다. “발은 용광로에서 정련된 놋쇠 같고”
이 구절 또한 다니 10,6“(팔과 다리는 광을 낸 청동과 같았으며”)에 의존하고 있다. 다니엘서의 표현과 비교하여 묵시록의 저자는 “팔”이라는 말을 삭제하고서, “광을 낸”이라는 표현을 “용광로에서 정련된”이라는 표현으로 바꾸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틀림없이 불의 요소를 도입하면서, 용광로와 정련이라는 중복적 표현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정련된”이라는 동사의 시제가 완료형이며, 그리스 말 동사의 완료형이라는 시제 자체가 지난 날의 동작이 현재까지 그 효과를 지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이미 정련되었지만 그 속성이 지금까지 지속되는 청동의 상태, 곧 모든 것을 녹여버릴 수 있는 용광로의 화로에 있는 것처럼 작열하는 순수한 청동금속을 지칭한다.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금속적인 면에서도 청동을 용광로에서 정련시켰다는 것은 요한 묵시록의 시대에 알려진 금속의 성질이나 합금 방법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면서 이러한 상징적 표현을 종합해 본다면, 금속의 가치는 불의 효과와 연결된다. 금속의 측면이든, 불의 측면이든 모두 그리스도의 특징으로서, 이는 인간이 검증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서는, 그리스도의 고유하고 초월적인 가치를 나타낸다. 이러한 금속의 고유성과 함께 저자는 불과 연관된 특성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다른 요소들과 달리 “발”의 특징은 특정한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 듯하다. 발은 사람의 한 지체일 뿐이지만, 어떤 지체이든 그렇게 강조할 만큼 불에 정련되었다는 사실은 그 사람 전체가 그러한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한다.
하느님과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도 “태워버리는 불”의 속성을 지니시는 분, 다시 말해 “질투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분을 정련시킨 불, 그분의 “불과 같은” 본성은 인격으로서 그리스도의 사랑, 심판, 그리고 정화의 능력을 강조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에 좀 더 자세히 설명될 것이다.
이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티아티라 교회의 신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소개하시는 묵시 2,18ㄴ에서 다시 나오는데, “불꽃 같은 눈”과 “놋쇠 같은 발”이 “하느님의 아들”과 같은 의미를 지닌 병행구로 사용된다는 점에서도 이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목소리는 큰 물소리 같았습니다”
이 표현은 다니 10,6“(그가 말하는 소리는 군중의 아우성 같았다.”), 그리고 우주적 상징(물소리)을 사용한다는 면에서 에제 1,24“(날갯소리가 들리는데, 마치 큰 물이 밀려오는 소리 같고 전능하신 분의 천둥소리 같았으며”)이나 에제 43,2“(그런데 보라,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이 동쪽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큰 물이 밀려오는 소리 같았고”)에 맞닿아 있다.
묵시록의 저자는 다니엘서에서 초월적 존재에게 부여된 매우 큰 소리에서 출발하여, 에제키엘서의 빛으로 그 목소리의 능력을 해석한다. 이 목소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뛰어넘어 하느님 영광의 초월적 영역에 자리한다.
이미 묵시 1,10(“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내 뒤에서 나팔 소리처럼 울리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에서 “나팔 소리” 같은 목소리로 말씀하신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선포하실 뿐 아니라 자신 안에서 그 현존을 실현시키신다.
하느님의 모든 능력은 이제 그분 안에 있고, 그분의 말씀에 집중된다.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에게 말씀하시기 이전에 이미 그분은 하느님의 권위와 어조로 말씀하시리라는 것과 그분의 말씀은 하느님 차원의 영광을 드러내리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분의 메시지는 각 교회의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안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될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의 특징은, 그것이 의복의 상징이든 인간적 상징이든, 모두 교회와 가지는 관계 안에서 규정됨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위해 하느님의 아드님이 되는 능력을 지닌 분이심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측면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묘사하는 부분에 이어 1,16에서 그분의 행동을 소개하는 부분과, 특히 개별 교회들에 대한 편지 안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 이성근 사바 신부. 1991년 사제로 수품, 교황청립 성서대학을 졸업했다.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서울분원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5년 7월호, 이성근 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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